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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
사도행전 17:16-3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이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는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참으로 무의미하게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을 얻는 저와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마다 절망과 죽음과 고통 가운데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너진 가정이 회복될 것입니다. 삶이 회복되고, 신앙이 회복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뜨겁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오늘도 능력 있는 사명자로 주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유다왕 여호사밧 시대에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연합해서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습니다. 유다로서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여호사밧 왕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능력으로 임했습니다. 그 순간 왕은 모든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원수 앞에 떨지 말고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러면 견고히 서리라. 형통하리라. 이 말은 능력으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모압과 암몬 군대는 자기들끼리 싸워서 무수한 시체를 남긴 채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신뢰했더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여호와를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무슨 철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았더니 병든 자가 나았습니다. 절망에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희망을 얻었습니다. 무너진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능력으로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뢰아에서 은혜 가운데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제 아덴으로 가게 됩니다. 아테네라고 불리는 이 아덴은 대단히 중요한 도시입니다. 아덴이라고 하면 인류의 정신적인 기둥입니다. 소위 말하는 철학의 발상지요, 문명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도 아덴의 철학을 능가하는 철학은 없습니다. 아덴에서 활동했던 철학자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철학은 이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당시에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로마였지만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세계를 점령한 도시는 바로 아덴입니다. 이 아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헬레니즘이라고 부르는 세계사의 중요한 사상적 흐름을 이루고 있는 철학사조가 잉태된 곳이기도 합니다.
아덴은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고 아덴의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아덴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주전 4-5세기경 아덴의 조각, 문학, 수사학을 능가할 만한 문화는 역사상에 없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기초가 뿌리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주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로마인들은 아덴의 찬란한 과거를 고려하여 아덴이 로마 제국 안에서 자유 동맹 도시로써 자신의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를 함께 배웠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어쩌면 필로와 같은 사람이나 가말리엘과 같은 철학자가 되려고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을 해 봅니다. 히브리 종교와 헬라 철학을 통달해 가지고 히브리 종교를 철학적으로 파악하고, 또 헬라 철학을 종교화하려는 것이 바울이 꿈꾸었던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어느 누구 못지 않게 히브리 종교에 대해서 열심이었고, 또 헬라 철학에 대해서도 당시 최고의 철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많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 바울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한때 철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아덴은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종교'하면 예루살렘이요, '정치'하면 로마요, '철학'하면 아덴입니다. 여기에 바울이 왔습니다. 그는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속된 말로 실패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살펴보았지만,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거리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머물다 간 곳에는 언제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베뢰아에서도 그랬고, 데살로니가, 빌립보에서도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울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바울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쫓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선동하고 그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집에 가서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했다는 이야기가 있는지를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덴 도시를 선동했다는 이야기가 있는지 말입니다. 없습니다. 그는 마음대로 아덴의 거리를 활보했고, 마음껏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에서의 결과는 34절에 보니까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끝입니다. 지금까지의 전도의 결과를 놓고 본다면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이후에 아덴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다시금 사명자로 일어나서 위대한 복음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 사역에 실패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평생 흠모해왔던 아덴에 왔습니다. 기대와 부푼 가슴을 안고 아덴에 발을 내딛였습니다. 아덴에 들어서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니들이 철학을 알아? 내가 비록 길리기아에서 배웠고, 예루살렘에서 배웠지만 한번 대결해 보자." 전도자로서보다는 은연 중에 철학도의 자세로 아덴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바울의 행동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아덴의 길거리에 혼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만 물론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혼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또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분부하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혼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것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의 행동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복음을 전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도 그는 혼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의 곁에는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디모데와 실라를 멀리에 두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기다려서 일행이 합류하면 그때 복음을 전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는 설레이는 가슴으로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외치고 싶었습니다. 왜요? 자신이 배운 철학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는 쉽게 흥분을 했습니다. 화를 내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16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본문에 보니까 바울이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저에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은 이 언양 땅에 우상이 가득한 것이 기쁜 일입니까?" 몰론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보고 거룩한 분노를 품어야 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목탁 소리가 울려 펴지는 이 현실에 분노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상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믿고 지금까지 바울이 화를 내면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분통터져가면서 복음을 전한 일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분하다'는 말은 심한 자극을 받아서 분노했다는 뜻입니다. 노여워했다는 뜻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때리는 것도 아닙니다. 핍박을 당해서 분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계집종을 고쳐준 이후에 모진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히면서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서 쫓아와서 그가 머물고 있는 성을 선동하고 그래서 애매하게 모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아덴의 거리를 보면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 격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온 도시에 우상이 가득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많았는가? 사람의 수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을 만나기 보다 우상을 만나기가 더 쉬웠습니다. 네로 시대에 아덴 광장에 서 있는 공중 우상만 300개였고, 기타 신상은 3만여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덴에서는 사람을 찾기보다 신을 찾기가 쉽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덴의 온 도시에 우상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합니다. 화를 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어리석은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분노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들 앞에서 우상을 섬기는 아덴의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문대로 보면 바울은 마음에 아주 분통이 터졌다고 했습니다.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변론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이런 자세로 전도하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전도를 해야 합니다. 화를 내면서 흥분한 모습으로 전도를 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납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렇게 분노를 했을까? 우리는 바울의 심경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은 당대에 최고의 학문을 한 지성인입니다. 지금은 그가 주님을 만나서 복음 전도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래도 한 때는 헬라 철학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헬라 철학의 본산지라고 불리는 아덴에 왔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합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지성인들이 어리석은 비지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가? 그는 지금 철학적인 지성과 우상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는 철학에 대해서 기대를 걸었습니다. 적어도 교육에 대해서는 기대를 걸었습니다. 철학적인 지식이 높아지면 사회가 달라질 줄을 알았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적어도 우상숭배 따위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분노로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철학과 종교는 별개입니다. 교육적인 수준과 종교도 별개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가 우상을 버리고 종교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과도 별개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줄로 생각하지만 착각하지 마십시오. 공부를 많이 하니까 오히려 더 지능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간교한 생각만 발달해집니다. 소위 대학인이라고 하면 지성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서울에 있는 소위 일류 대학교가 있는 거리에 가 보십시오. 그곳에는 점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늘려져있습니다. 대학생들이 그곳에 가서 돈을 내고 점을 치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대통령 선거를 한다든가, 총선거를 하게 되면 국회의원을 꿈꾸는 사람들 때문에 점을 치는 집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점을 보고, 궁합을 보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새벽기도 잘 하는 교인에게는 주지 않아도, 무당은 정신문화재로 만들어서 국가가 월급을 줍니다. 정말로 미칠 일입니다. 화를 낼 일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화를 좀 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육 수준과 종교와는 별개라는 사실입니다. 소위 최첨단을 간다고 자랑하는 일본을 보십시오. 일본의 우상들은 날마다 더 많아집니다. 일본에는 우상이 얼마나 많은지 대략 800만 종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라는 것이 800만 개나 되니까 신상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골목이 전부 신상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지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지성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높은 교육 수준과 높은 생활 문화가 이 땅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언양 땅을 복음화시켜야 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 땅에 확산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더 열심히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흥분한 모습으로는 하지 마십시오. 온유한 심령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 전파에 실패한 이유는 그가 아덴에서 변론을 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아덴의 도성을 바라보면서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 사람들과 변론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17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여기에서 변론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강의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가지고 어떤 것을 증명하고자 스스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했다기 보다는 변론을 벌였습니다. 아덴에 있는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쟁론이라는 말은 말싸움을 벌이는 것을 말합니다. 돌을 던져 싸우듯이 말싸움을 벌였습니다. 이것을 연결해 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분하여, 변론하고, 쟁론했다. 분하여 변론했더니 쟁론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바울을 가리켜 '말쟁이'라고 했습니다. 졸지에 그는 말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말쟁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원문대로 해석하면 곡식을 쪼아먹는 참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로 쪼아대는 참새라고 비웃게 된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 말은 시장에서 물건을 팔면서 "싸구려, 싸구려"라고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이방에서 온 조그마한 사람이 말은 곧잘 한다. 바울은 그렇게 말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아덴에 온 바울은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니까 그가 아레오바고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넓은 언덕이 있고 거기에는 신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가 토론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도 그들과 변론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전도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는 변론만 벌였습니다.
바울이 논쟁을 했습니다. 쟁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비구레오는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를 추종하는 철학자들인데, 그들은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미래나 내세는 상관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요, 육체적이요, 물질적이요, 쾌락적입니다. 속된 말로 오늘 이 땅에서도 에비구레오 학파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이런 노래에 인생을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스토아 철학을 말하는데, 그들은 자연신을 믿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살고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의해서 진행되어질 뿐이라면서 운명론을 믿습니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정반대의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이들을 상대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영생을 전합니다. 그런가 하면 운명론자들을 향하여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합니다. 불가지론자들에게 영생과 부활을 전합니다. 이것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론을 벌였습니다. 계속해서 변론을 벌이는 동안 이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니까 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좀더 설명해 보아라는 말입니다. 비난하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바울과 말싸움을 벌이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아덴 전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몇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곳에서처럼 튼튼하게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보면, 바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보십시오. 아덴에서 바울은 그렇게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유대인 핍박자들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아덴에서는 어떠한 핍박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심히 떨어야 했습니까? 철학을 의지했기 때문에 아덴에서 실패하고 고린도에 갑니다. 고린도에 가서 굉장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훗날에 그는 이때를 깊이 뉘우치면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모름지기 지도자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면서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논쟁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말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이것은 결국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됩니다. 차라리 논쟁에는 지십시오. 그리고 사랑에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남에게 전도할 때에는 언제나 좀 미련한 방법으로 하십시오.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실패한 사도 바울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변론을 하지 마십시오. 철학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전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그것 때문에 흥분했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이후에는 오직 자신의 약한 것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위대한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 말씀을 깊이 깨달아서 주 앞에서 위대한 사명자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충성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