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세관 책임자는 외국인 - 발췌
⌜이코노미스트⌟가 본 근대 조선, ⌜100년 전 영국 언론은 조선을 어떻게 봤을까?⌟
다각도에서 역사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역사 기술은 지나치게 국수적이다. 우리의 실패와 치욕은 최소화한다. 원나라의 고려 침략은 고원전쟁으로 임진왜란은 조일전쟁으로, 병자호란은 조청전쟁으로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농민전쟁으로 한일합방은 조선망국으로 경신참변은 경신대학살로 기술되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바르게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 교과서나 강단 사학자나 재야사학자 할 것 없이 우리의 역사기록은 5,000년을 이어온 자랑스러운 한민족(韓民族)에 대한 기록이다. 수치와 치욕을 삭제하고 우리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는 것은 숨겨버리는 식의 역사기록이다. 어차피 역사는 사가들의 취사선택으로 편집되어지는 것이지만 우월감을 심어주는 판타지 소설식의 역사 기록은 반드시 고증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성락이 쓴, ⌜이코노미스트⌟가 본 근대 조선, ⌜100년 전 영국 언론은 조선을 어떻게 봤을까?⌟는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1870년대에서 1910년 사이에 조선 땅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영국인 기자가 ⌜이코노미스트⌟에 쓴 기록을 찾아서 정리한 것으로 조선말의 상황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조선말의 세관 업무를 묄렌도르프가 보았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세관장이 영국인 브라운이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브라운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부정부패를 엿보게 된다.
조선의 세관 책임자는 외국인
초략
⌜이코노미스트⌟는 조선의 수출입 상품 통계자료를 수년마다 보여준다. 이 자료들은 조선의 세관에서 발표한 것들이다.
재미있는 점은 발표를 조선의 세관에서 하는데 …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촙, 조선 세솬 책임자는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 그 이전의 책임자는 모건으로 기록돼있다. 이처럼 조선에서 세관을 담당하는 사람은 항상 외국인이었다.
조선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국제 업무를 새로이 시작했다. 국제 외교, 세관 등 그동안 조선이 경험해본 적 없는 업무는 청나라,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외국인 고문을 고용해서 해결했다. 이렇게 고용된 고문들은 제대로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브라운은 원래 탁지부 고문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탁지부 고문으로서 조선의 예산, 재정 부문에 도움을 주는 것이 임무였는데 탁지부 고문과 더불어 조선의 세관도 담당했다. 조선 세관에는 고문이 아니라 정식 책임자로 부임했다. 브라운은 처음에 5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에 고용됐다고 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조선 세관 일을 하는 브라운을 크게 칭찬했다. 브라운 덕분에 조선의 수출입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브라운에 대하여 칭송하는 것은
⌜이코노미스트⌟만이 아니다. 다른 서양인의 저술에서도 브라운애 대한 부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브라운을 가리켜 조선이 망하지 않고 나라를 유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브라운의 유능한 지도 덕에 한국의 재정 상태는 비교적 번영한 상태가 됐다.
브라운은 다시 세관 업무를 맡게 됐다. 국가 재정 전망의 개선이 기대된다.
이렇듯 ⌜이코노미스트⌟서양인들은 브라운을 칭찬했는데 ‘브라운 세관 업무에는 부정부패가 없다’, ‘ 원칙대로 세관 엽무를 충실히 하고 있다.’, ‘조선 정부의 다른 행정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한데 세관업무는 그렇재 않다’는 이유에서 였다. 또 조선의 다른 부분에 대한 정부 통계는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데 , 세관 업무에 과년된 정보들은 믿을 만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인데, 다른 정부 부서와 비교도히어 칭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쨌든 조선 정부의 다른 부문과 달리 세관 엽무에서 부정부패가 업었던 이유는 그 책임자가 외국인, 그것도 청나라나 일본인이 아닌 영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세관 업무가 중요했던 이유는 정부 세금에서 관세가 차지하는 비율이 굉장히 컸기 때문이다. 조선의 세금은 eID에서 얻는 지세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소득세, 부가가치세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세목이 없었다. 이 무련 조선 정부 수입 중에서 관세는 10%을 차지했다. 2018년 기준으로 한국 정부 세금 수입 중 관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2.9% 정도다. 이를 보면 조선 정부애개 과넷가 얼마나 중요한 수입원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조선 말기는 부정부패의 시대였다. 매관매직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정부 고관에 부탁을 하고 예외를 인정받는 것이 능력으로 통했다. 그런데 조선의 모든 곳에서 통하는 뇌물이 세관 엽무와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브라운은 조선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았다. 고관대작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원리원칙대로 업무를 수행하고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매겼다. …
브라운은 이처럼 원리원칙대로 업무를 수행하다가 조선 정부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1900년대 초, 고종과 탁지부 대신은 돈이 부족해서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으려고 했다. 왕이 새로 거주할 궁궐 등을 짓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외국으로부터 50만 파운드의 차관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정부의 재정은 국제적으로 신용을 받지 못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조선 정부의 채권은 트기등급이었다. 투기등급을 받은 나라는 다른 아라로부터ㅗ 신용으로 돈을 빌릴 수 없다. 나중에 갚겠다는 말만으로 조선에 돈을 빌려주는 외국은 없었다. 담보가 필요했다.
50만 파운드 차관의 담보는 세관 수입으로 하기로 협상이 진행됐다. 50만 파운드의 촤관을 빌려서 만약에 갚지 못하면 세관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갚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세관 책임자인 브라운은 이 협상안을 거절했다. 자기가 담당하고 있ㅇ는 세관의 수입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선의 왕이 세솬의 수입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리려고 하는데, 세관장이 그것을 거절했다.
만약에 세관장이 조선인이었다면 절대로 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브라운 세관장의 결정에 제3자인 외국인들은 환호했다. 왕이 50만 파운드를 차관으로 빌리면 그 돈은 어디론가 다 사라진다.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왕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다가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차관 협상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 50만 파운드를 조선에 빌려준다고 하는데 언제 줄 것인지에 대한 약속이 없었다. 많은 외국인들은 조선이 국제 사가를 당할 가능서이 크다고 보았다. 그런데 조선의 세관장이 그 차관 협상을 뒤엎으니 환호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브라운 세관장은 조선 정부로부터 큰 미움을 샀다. 그를 관저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인이었고, 조선 백성들처럼 마음대로 잡아다가 주리를 틀 수 없었다. 임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쫓아낼 수도 없었다.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미음을 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리고 많은 외국인들은 그런 브라운을 칭송했다. 브라운 덕분에 조선의 관세 업무가 제자리를 잡고, 또 조선의 재정 수입에 큰 기여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조선 말, 관세 행정만은 다른 나라가 부럽지 않았다.
최성락 저, ⌜이코노미스트⌟가 본 근대 조선, ⌜100년 전 영국 언론은 조선을 어떻게 봤을까?⌟에서 ❮조선의 세관 책임자는 외국인 ❯의 내용을 거의 옮겨 적었다.
다각도에서 역사를 보는 저자의 시도에 공감을 하며 감사를 드린다.
2021.10.11.월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