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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탐방 5탄
< 청도에서 감포 구경 가기 >
일시 : 2018년 2월 17일 ∼ 18일 (1박 2일)
장소 : 경주, 감포 일원.
참가자 : 안창성, 한경호, 황경철(3명)
2월 10일부터 15일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일본 규슈를 다녀온 후 뒤풀이 자리에서 퇴직 전 마지막 겨울방학인데 끝나기 전에 국내의 어디라도 다녀오자는 황선생의 제안이 있었다. 어디를 갈까 하다가 경주 대명콘도에 평일이니 방이 있을 거란 안선생의 말에 경주로 목적지를 정하고 구체적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구체적 계획이란 소주 몇 병에 맥주를 몇 병 챙겨갈 것인가를, 있을 수 있는 모든 변수까지 예상해 정밀하게 계산하는 어려운 과정을 의미한다. 교통편은 내 차를 이용하기로 하고 감포에서 참가자미 회를 사서 콘도에서 술판을 벌이기로 하고 날짜는 2월 27일과 28일 1박 2일로 정했다. 식사도 아예 함께 해결하자고 해서 기본적 양념과 쌀, 그리고 이들을 적절히 조합해 만들 요리를 구상해 최소한의 꾸러미로 준비하였다.
27일 10시에 우리 빌라 주차장에서 만나니 날씨가 엄청나게 좋다. 이런 날씨라면 굳이 고속도로를 이용해 빨리 갈 필요가 없어 운문댐을 따라가는 구불구불한 드라이브 코스를 선택했다. 운문댐은 재작년부터 한 번도 태풍이 가져오는 엄청난 양의 빗물을 받은 적이 없는지라 바짝 말라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저수율이 8%라고 하니 댐 완공 후 최저의 저수율이다. 운문댐에서 도둑 낚시하던 때의 재미난 일화들을 이야기해 가며 설렁설렁 가니 앞 유리창을 통한 봄볕이 따가울 지경이다. 나대로는 이번 여행에 감은사지와 이견대(利見臺)를 꼭 보고 싶은 바람이 있고 이를 소재로 수십 년간 미루어 두고 머릿속으로만 정리하던 무형의 생각들을 이제 유형의 글로 남기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 여행이라기보다 답사라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
일단 감포 바닷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옆 시장에서 참가자미 회와 생선 맑은탕(지리)을 끓일 생선을 산 뒤 슈퍼에서 나머지 필요한 것을 보충하고 이후에 이견대와 해중왕릉이 있는 대왕암을 보고 감은사지를 보기로 했다. 먹을 것은 먹고 나중에 먹을 것을 준비한 후 관광이든 답사든 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그리고 경주 보문단지의 대명콘도로 돌아와 여장(旅裝)을 풀고 그곳에서 계속 먹고 쉬기로 했다.
내가 운전하는 관계로 총무는 안선생이 하기로 했는데 아예 1인당 10만 원을 기본으로 내고 모자라면 그때 더 내기로 했다. 감포에 도착해 시장 옆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닷가 항구 쪽으로 가니 마침 점심때인지라 자기 집에 오라고 긴 앞치마를 입은 아줌마들이 손님을 부른다. 우린 몇 집을 스쳐 지난 후 ‘호궁 횟집’이란 곳에 들어갔다. 우리가 ‘호궁 횟집’을 선택한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어떤 심리적 요인이 작용해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되 선택의 필연적 이유가 있었을까? 이건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과제 중 하난데 음식점을 선택할 때 지금까지 첫째 집에 바로 들어간 적이 없다. 대개 너덧 집정도 지나쳐서야 비로소 선택하기 위해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 같다. ‘호궁 횟집’은 ‘송도 횟집’, ‘은정 횟집’, ‘대구회 센타’, ‘북해도 회도매센터’, ‘항구 도매회센타’를 거쳤으니까 6번째 집이다. 앞으로 지속해서 관찰해보아야겠다. ‘호궁 횟집’에서 아구 맑은탕을 주문하고 소주도 한 병 주문해서 식사를 마쳤는데 1인분에 15,000원이라 음식이 돈값은 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오니 바로 슈퍼가 있어 황선생 몫으로 맥주 페트병 2개, 안선생과 내 몫으로 소주 640mL로 4개를 샀다. 그리고 참기름과 식용유 작은 것, 초고추장을 산 후 전통시장으로 갔다. 발이 넓기로 소문난 안선생은 이곳에도 단골이 있어 가니까 미리 횟감을 준비해 두었다. 참가자미 1kg에 3만 원이었는데 이는 회를 뜨기 전 참가자미의 무게가 아니라 회 뜬 상태였기에 전에 ‘코스트코’의 광어회 800g을 3명이 먹어본 경험으로 볼 때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원래 감포는 가자미가 유명한 곳이라 빨간 알을 품은 참가자미 말린 것이 탐이 났다. 그래서 가격을 물으니 양이 대단히 많아 보이는데 5만 원이란다. 3명이 나누니 한 사람당 17마리 정도가 된다. 아주 만족할 만한 흥정이다.
우럭이나 볼락이나 맑은 탕을 끓일 생선 사는 일만 남았는데 마침 딱 한 집에 우럭이 수족관에 있어 2마리 1kg을 2만 원에 사서 손질까지 부탁했다. 황선생이 “우럭도 회를 좀 뜨지.”라고 했는데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나는 고기가 많으면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맑은 탕의 고기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오히려 국물을 비리고 뻑뻑하게 하여 뼈와 대가리만으로 끓인 것보다 아주 못했다. 어쨌든 감포 시장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이 끝났다.
차를 다시 남쪽으로 몰아 우선 이견대(利見臺)를 보기로 했다. 과거 내 기억 속의 이견대는 대종천(大鐘川 ― 고려말, 몽골군이 황룡사의 대종을 배에 싣고 가져가서 대종천이다. 종은 동해에 빠져 파도가 센 날에는 종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후손인 우리는 이 이야기라도 믿고 찾아보려는 노력을 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의 어뢰 추진체도 찾아내는 쌍끌이 어선에 기대해 볼까?) 끝자락에 자그마하게 서 있는 정자였는데 문제는 그런 정자들이 바닷가를 따라가면서 마을마다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가 본 이견대도 후대에 만든 것이지만 이건 뭐 정자만 보면 이견대인가 하고 차를 천천히 몰아야 하니 갓 쓴 사람은 모두 제 할배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내 머릿속 이견대를 깡그리 때려 부수고 나타난 ‘슈퍼 마징가Z’ 같은 우람한 건물이 있었으니 우선 그 위용이 과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이견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에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정사(正史)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려 있어 그 권위를 더한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682년(신문왕 2)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부산(浮山)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져서, 만파식적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뒤 효소왕 때 이적(異蹟)이 거듭 일어나,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 1970년 발굴을 통해 건물지를 확인하여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지금의 이견대를 세웠다고 한다. >
결국 이견대는 동해 용왕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피리 즉, 소리로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릴 신물(神物)을 내린 것이니 이 당시의 사건들을 시간적 순서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문무대왕릉을 해중릉으로 하여 문무왕이 동해의 호국용이 됨.
2. 신문왕이 용이 된 그 부친을 위하여 용의 출입이 가능한 감은사를 지음.
3. 문무왕이 신문왕에게 만파식적을 줌.
결과적으로 보면 신라인의 호국 의지는 대외적으로는 호국용, 대내적으로는 만파식적 이 두 가지로 축약될 수 있겠다.
< 이견대의 우측으로 대종천이 흐르고 바라보이는 동해의 우측에 대왕암이 자리 잡고 있다. >
<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대왕암이 보이는 바닷가에는 용을 섬기는 무당들의 굿당이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문무왕의 해중릉은 바닷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길이 20m 정도의 바위섬으로 가운데가 못처럼 되어 있고 가운데 부분은 길이 3.6m 너비 2.9m 두께 0.9m의 화강암이 놓여있다. 이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신라 30대 문무왕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는 유언에 따라 동해에 마련한 해중릉이다. 별다르게 시신을 넣는 무덤방을 만든 것이 아니라 화장 후 뼈를 뿌린 산골처(散骨處)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다만 용이 되었으니까 사방으로 물이 통하도록 뚫어 두었고 아마 이러한 통로를 통해 동해를 지키고 대종천 가녘에 위치한 감은사 본당 부처 아래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물길이 뚫려 있어 용의 출입이 자유롭게 해 두었다. 연못 가운데는 화강암의 너럭바위가 있는데 그 구체적 용처는 알 수가 없다. >
감은사는 축대를 쌓은 부분에 선착장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십 년 전쯤 왔을 때, 즉 지금처럼 보수하기 전에 지금의 논자리가 마치 늪지처럼 보였다. 이 절은 대종천의 강물과 동해의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물이 흔한 곳으로 보였다, 감은사는 과거 문무왕이 왜구를 막고자 건립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신문왕 2년에 완성한 절로 바로 흙 위에 절을 세운 것이 아니라 돌로 된 유구(遺構)를 볼 때 법당이 돌로 된 구조물 위에 들려진 형상으로 그 돌 구조물 아래 물길을 통해 문무왕의 호국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특별한 구상을 한 사람은 이 절을 완성한 아들 신문왕이 아니라 건립을 시작한 그 부친 문무왕이니 그는 생전에 죽은 후 해중용이 되고 그래서 이 감은사 법당을 출입하겠다는 목적을 두고 이 절을 지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부친의 호국에 대한 열정에 감사한다는 마음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감은사이니 해중왕릉과 감은사와 이견대 이 세 가지 중심에는 문무왕이 있는 것이다.
< 감은사지에 흩어진 유구를 모아 두었다. 기둥 돌에 대들보를 건 모양으로 볼 때, 지금은 흙에 채워진 부분이 과거는 빈 공간이어서 본존불 아래는 바닷물이 출렁이지 않았을까?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왕은 본존불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리도 기이한 구조의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
감은사지는 동탑과 서탑이 유명한데 탑신이 통돌이 아니라 석판을 맞춘 후 그 속에 잡석을 채운 형태라 가까이서 석판을 보면 많은 파손 흔적이 있어 안타까우나 멀리서 전체를 보면 장엄미라고나 할까, 위엄을 갖추되 고압적이지 않은, 그러면서 절제된 단정함으로 우리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두 탑의 크기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현재 동탑은 그 전체 높이가 13.289m에 가운데 꽂힌 쇠로 된 찰주(擦柱 :불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중심 기둥. 꼭대기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다.)의 길이는 5.281m로 찰주는 2층 탑신 가운데까지 박혀있다. 서탑은 14,032m에 찰주 길이는 5.883m로 실제로는 서탑이 동탑보다 74㎝ 크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문득 과거부터 그곳에 존재하고 있어 존재 자체를 당연시하고 있는 쇠 찰주에 관심이 갔다. 저 쇠로 된 찰주는 언제부터 저기 꽂혀 있었던 것일까?
< 찰주에 꽂혀 탑의 상륜부를 장식하던 석물이 없어 섭섭하여 아래 그 모양이 가장 유사한 석가탑을 가져와 상상이라도 하도록 해 두었다. >
< 석가탑은 1966년 해체·보수하고 복원하면서 탑의 상륜부를 알 수 없어 남아 있던 노반, 복발, 양화 위에 실상사의 상륜부를 그대로 본떠서 복원했는데, 너무 장식이 많아 머리가 무겁게 보인다. >
흔히 절의 지붕 측면부에 삼각형으로 점 3개를 찍어두고 원으로 감싼 모양을 보는데 그 상징을 모르는 이가 많아 내 나름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다보탑과 석가탑을 잰 길이에서 다보탑과 석가탑을 각각 컴퍼스의 축으로 삼아 정삼각형을 그리면 나머지 한 점이 불국사 대웅전 본존불의 자리가 된다. 여기서 다보탑의 다보불은 과거의 부처이고, 석가탑의 석가불은 현생의 부처이니 그럼 대웅전 본존불의 자리에는 미래불인 미륵불이 앉아 있어야 정상인데 대웅전에는 석가불을 모시고 있다. 불교도가 아니고 천주교도인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 세 분의 부처를 상징한 것이 정삼각형을 이루는 점 세 개인 것이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갔으나 이 쇠 찰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이어 가려 한다. 난 이 쇠 찰주를 보고 문득 봉덕사신종,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최고의 종을 지금 자리인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길 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선 이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기본적 이야기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종을 주조하게 된 동기는 범종에 양각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이 33대 부왕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 12만 근으로 종을 만들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34대는 효공왕인데 후사가 없어 그 후 아들 혜공왕이 경덕왕의 유지를 받들어 즉위 7년 후 이 범종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성덕왕을 위하여 지은 봉덕사에 이 신종을 헌납하였으나, 봉덕사가 대홍수로 없어지고 종은 방치되었다고 한다. 봉덕사는 지금의 경주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사찰로 추정되는데 어떤 이는 봉덕사의 위치가 경주의 북천 근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래 김시습의 시를 보면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봉덕사는 자갈밭에 파묻히고
종은 풀 속에 버려졌으니
아이들이 돌로 차고 소는 뿔을 갈고 있구나.
주나라의 돌 북이 그랬다던가.“
이 시는 봉덕사 폐허와 성덕대왕신종이 방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이다. 여기서 ‘자갈밭’이란 단어에서 강변을, ‘소 먹이는 아이들’에서 접근이 쉬운 풀밭이라고 생각해 큰 강 옆에 봉덕사가 있었고 홍수로 절이 소실되었으나 종은 워낙 무거워 떠내려가지 않고 방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이 신종을 영모사로 옮겨왔지만, 중종 원년 영모사 마저 화재를 당해 다시 종이 방치되었다. 방치된 신종을 경주 부윤인 예춘년이 경주 읍성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다가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아침저녁으로 성덕대왕신종을 쳤다고 한다. 봉황대 밑에서 성덕대왕신종은 성문 종이 되어 500여 년 내려오다가 1915년 8월 본래 경주 관아 터인 구 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겨갔다.
지금의 박물관이 신축되면서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와 성덕대왕신종의 보금자리가 마련되었다. 성덕대왕신종을 새 박물관으로 옮길 당시 이를 주관한 경주 박물관장 소불선생이 1985년 ‘한국인’이라는 월간지 11호에 10년 지나서야 당시 재미난 사실을 발표했다.
그는 이 위대한 신종을 어떻게 하면 손상 없이 새 박물관으로 옮길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공사는 공영토건이, 수송은 대한통운에 작업을 맡겼다고 한다. 이 신종의 높이 3.77m, 둘레 7m, 입지름 2.27m, 두께는 아래쪽이 22cm, 위쪽이 10cm며, 전체 부피는 약 3평방미터, 무게가 20t ~ 22t이다. 일단 종을 신관 박물관 종각 앞에 옮겨다 놓았지만, 이제는 종을 안전하게 거는 것이 문제였다. 여러 가지 걱정 중에서도 종 고리(종뉴 - 鐘紐)가 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고 한다.
< 성덕대왕신종의 용뉴(龍鈕)와 대나무 무늬의 음관. 그 사이에 종을 지탱하고 있는 지름 8cm의 엄청난 쇠막대 >
이 종을 걸으려면 신종의 머리 부분에 용트림하는 형상의 용뉴에 쇠막대기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문제는 이 구멍의 직경이 9cm라는 점이다. 게다가 종을 치는 경우 종 무게의 2배 정도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니 그 정도의 무게를 견디려면 종 고리 구멍이 최소 15cm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항제철에 유례없는 특수 주문으로 60t을 견딜 수 있는 지름 9cm의 쇠막대기를 주문하였다. 그 막대에 60t 무게의 납덩어리를 걸어 실험해본 결과, 견디지 못하고 휘어지고 말았으니 결국 종을 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서 실패로 끝났다.
이에 종고리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그럼 옛날에는 이 종을 어떻게 걸었나 하는 근본적 질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랬더니 창고에 옛날 걸던 쇠막대가 있다고 해서 그 가는 쇠막대에 60t의 무게를 걸어 보았더니 전혀 문제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국립경주 박물관 종각에 지름 8센티의 옛날 쇠막대기를 가로질러 종을 달았다. 성덕왕신종을 안심하고 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각종의 장식들은 사라졌지만, 쇠 찰주는 신라인의 호국정신인 양 꼿꼿이 서서 버티고 있다. >
내가 국립경주 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을 볼 때마다 종뉴 부분을 유심히 보는 것은 이러한 사연 때문이다. 즉, 종도 종이지만 그 종을 걸어둔 쇠막대의 제작기술에 감탄한 것이다. 그러다가 감은사의 이 쇠 찰주를 보니 어느 누가 쇠락한 절터의 쇠 찰주를 다시 만들어 꼽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고 그렇다면 이 쇠 찰주 역시 신라 때의 것이 아직 그대로 남아 1,300년의 풍상을 견디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녹이 그대로 보이는 저 감은사 쇠 찰주야말로 위대한 신라인의 야금술의 정수가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다하지 못한 한 가지 이야기가 남았으니 이는 일단 신라의 역사 구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신라 상대(上代)는 통일신라 이전이고, 중대(中代)는 29대 태종 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까지의 황금기를 의미하고 하대(下代)는 패망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해중왕릉, 감은사, 이견대, 성덕대왕신종,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할 석굴암과 불국사까지 모두 신라 중대와 관계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먼저 신라 중대의 임금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29대 무열왕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켰고, 30대 문무왕(661-681)은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 후 동해용이 되고자 유골이 해중왕릉에 뿌려졌다. 31대 신문왕(681-691)은 감은사를 세우고 이견대에서 만파식적을 얻었으며, 32대 효소왕(692-702) 때에 설총이 이두를 정리했다. 33대 성덕왕(702-737)은 신종 제작을 시작했으며, 34대 효성왕(737-742)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태자였던 형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6년 정도 왕위에 있다가 죽었다. 35대 경덕왕(742-765) 때는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751년에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그해 석굴암을 만들기 시작하여 김대성 사망 후 혜공왕 10년 토함산 석불사(석굴암)가 창건(774년)되었다. 또한, 경덕왕은 왕권 강화 정책의 하나로 신라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버지 성덕왕의 공을 기리고자 신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종이 완성되기 이전에 경덕왕은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이자, 성덕왕의 손자인 36대 혜공왕(765-780)이 재위하던 771년에야 주조가 완료되어 봉덕사에 종을 걸었다.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해 여자처럼 행동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다고 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토함산의 석굴암 부처가 어디를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 방향은 태양이 죽는 동지(음 12월 22일) 다음날 즉, 12월 23일 동해의 일출이 정면으로 보이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 방향은 감은사가 있는 방향이고 왜구들이 서라벌을 침략할 때 주로 사용하는 평지로 된 루트에 해당하는 방향인 것이다. 물론 그 방향을 계속 이어나가면 일본의 ‘신라사’라는 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왜구가 침략하면 동해 용왕이 감은사 법당에 와(그래서 굳이 이상한 구조의 법당을 만들지 않았던가) 부처에게 왜구의 침략 사실을 고하고 그럼 감은사 부처는 법력으로 이를 토함산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석굴암 부처에게 알리고 석굴암의 부처는 이를 다시 토함산 아래 불국사 부처에게 알린다는 식이다. 그럼 비상연락망이 거기에서 끝이 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추측하건대, 불국사 부처는 이를 봉덕사의 부처에게 알려 성덕대왕신종의 법력으로 왜구를 물리치려 하였던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성덕대왕 신종의 음관의 형태가 대나무, 즉 만파식적의 모양(이 글 10쪽의 그림을 다시 보자. 무슨 무늬인지 모르겠으나 마디진 대나무의 형상이 분명하다)이라는 데 근거한다. 종을 유지하고 있는 용뉴(龍鈕)은 호국용이며 그 종에서 퍼져나가는 소리는 만파식적의 소리이니 이 이상 더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 말이다. 물론 혹자는 이런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막고자 제작된 팔만대장경의 경우를 보라. 이건 더욱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성덕대왕신종이야말로 신라 호국불교사상의 정수(精髓)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신들이 이룩한 비상연락망의 결과를 살피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야기의 중심인물 중 신문왕과 성덕왕의 능(陵)은 모두 토함산 아래 낭산 자락에 있다. 첫 장의 지도를 다시 살펴보기 바란다. 또한 사천왕사지도 그 옆에 있는데 사천왕사를 창건한 이가 바로 문무왕이고 이 사천왕사에는 다음과 같은 호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674년 당(唐)이 신라를 침공하려 하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군을 막을 계책을 구했다. 이에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침략이 임박하여 절을 완성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자 우선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든 후 유가명승(瑜伽明僧) 12명으로 하여금 비법을 쓰게 했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일어 당군의 배는 모두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고 이름하고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고 한다. "(다음 백과 인용)
사족(蛇足)으로,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큰 종은 2008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평화의 댐에 위치한 세계평화의 종 공원에 있는 '세계평화의 종‘(10,000관 - 37.5t)으로 높이 4.67m 지름 2.76m이다. 하지만 여전히 성덕대왕신종이 한국을 대표하는 범종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물론 북한의 수공(水攻)에 대비한다고 세운 ’평화의 댐‘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건축물이란 평가를 받고 있거니와 그런 비상식적 장소에 세계에서 가장 큰 세계평화의 종을 만들어 건 사실은 더 웃기는 일이다. 그런 큰 종을 칠 수는 있는지 궁금도 하거니와 그런 발상을 해내는 우리는 정말 웃기는 민족이다.
하긴 엄청나게 큰 가마솥을 만들어 세계 제일 큰 솥이라 자랑하고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고자 한 일도 있지 않은가? 2003년 11월, 괴산 군수 김문배는 세금 2억과 군민성금 3억을 모아 주철 43.5t을 들여 둘레 17.8m, 높이 2.2m, 쌀 4,000kg을 넣어 밥을 지을 수 있는 가마솥을 만들기로 했다. 2005년 7월 완성된 가마솥에 밥을 지어 4만 군민 모두가 한꺼번에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했으나 위는 설익고 아래는 탄 밥이 되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가마솥에 처음으로 밥을 지은 그날, 밥 대신 욕을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큼 처먹었으니, 추진한 놈들 중 집구석에서 밥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해본 놈이 있었다면 진작 밥이 안 될 것임을 알았을 테고 그러면 그런 일은 해서 안 된다고 말렸을 것이다. 마누라 해준 밥만 축내는 딸랑이들만 모여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떼로 모여서 한 것이다. 그 돈이 자기 돈 5억이었다면 과연 그런 짓을 했을까?
< 정신이 있다면 생각해 보라, 이 깊이 2.2m의 가마솥에 밥이 정상적으로 되겠는가? 그러나 이들도 호국정신은 투철하여 호국용인지 이무기인지 몰라도 용무늬를 둘레에 둘렀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Plan B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가마솥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를 시도했지만 우리만큼이나 미친놈이 호주에 또 있었든지 이미 지름 24m짜리 프라이팬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닌가!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가마솥의 처리 방안에 대한 주민투표 결과 전시홍보용으로 유지하자고 결정이 나서 솥 위에 기와를 씌우기로 해 2007년 이후 매년 녹슨 부분을 보수하는 등의 비용이 500만 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해괴망측한 자들이 생각 외로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 엉겁결에라도 당황하지 않는다.
< 괴산 군민의 허황된 꿈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호주의 미친 프라이팬. >
대명콘도에 들어와 저녁밥을 밥솥에 짓고 참가자미회를 안주해 소주잔을 기울이니 천년 신라의 영욕이 저 서녘에 지는 해와 같이 허망하다. 우럭 맑은탕은 대가리와 뼈만 넣어야 했는데 고기까지 넣었으니 기대했던 맑은 맛이 아니라 진하고 비린 맛이 진동한다. 그러나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니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논어선진편<浴沂章>에 실린 공자의 제자이자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曾點)의 포부는 우리가 왜 여행을 다니는가에 대해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공자가 평소의 품은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다른 제자는 현실의 문제와 직접 연관된 정치적 포부를 밝혔으나 증점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였다.
(공자께서) “점아! 너는 어떠하냐?”라고 하자, 증점은 비파 타던 속도를 늦추다가 뎅그렁하는 소리를 내면서 타는 것을 멈추고는, 비파를 밀어놓고 일어나서 “세 사람이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무슨 상관이 있느냐? 또한 각기 자기의 뜻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늦은 봄날에 봄옷이 마련되면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며 읊조리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하니, 공자께서 크게 감탄하시며 “나는 증점을 허여하노라”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어울려 다니며 목욕하고 바람 쐬며 읊조리기 위해 오늘도 ‘기수’를 찾아 헤매고 ‘무우’를 찾아 방황한 것이다. 유한한 인생에 즐길 일은 많으나 짧은 해가 안타까울 뿐이다.
< 2018년 3월 23일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