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염색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머리 숲을 뒤적인다. 오늘 아침 들여다보는 머리는 물들인지 열흘 가량 됐다. 엊그제 염색한 것 같은데 머리털 속에는 짧은 은빛 털이 뽀송뽀송 나 있다. 귀 바로 윗부분의 털이 다른 부분보다 더욱 하얗게 변해 있다. 이발소에서 염색을 하고 한 달 가까이 되면 영락없는 반백이다.
사십대 후반부터 거의 한달 간격으로 이발과 염색을 함께 해왔다. 일찍 찾아 든 흰 머리는 조상으로부터의 대물림이다. 머리털 속에서 흰머리가 돋아 있는 것을 보면 털은 두피(頭皮)의 내부 뿌리에서 계속 희게 자라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피를 뚫고 새로 나는 털은 대부분 흰 털이다.
아침 운동 길에서 자주 만나는 한 분은 그의 어머니가 아흔을 넘겼음에도 검은 머리카락이 나는 것을 봤다고 했다. 나이 들수록 흰 머리가 늘어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염색한지 열흘가량 지나 왼쪽으로 가르마를 타면 갈라진 부분의 내 머리 숲 뿌리는 하얗게 속선을 그리고 있다. 가르마로 갈라진 머리 숲의 하얀 뿌리부분을 들여다보면 ‘아흔 넘긴 어머니의 머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돋아났다’는 지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아해진다.
십오 년 넘게 물을 들여왔으니 이제 귀찮아 지기도 한다. 이발과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으면 상쾌한 기분을 느낀다. 내게 염색은 이발만큼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다. ‘염색’이라는 ‘위장술’ 덕분으로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며칠간 좀 더 젊은 인상을 심어 줄 뿐이다. 길어야 보름가량 젊음의 가발을 쓰고 있다 차츰 색이 바래지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한 번씩 검은 칠을 해야 하니 어림잡아 일 년에 열 너 댓 번은 칠하는 셈이다. 까맣게 바뀐 머리카락은 자신으로 하여금 보름가량 오십대 중반의 장년 티를 풍기게 한다. 스무 날 가까이 되면 오 십 대 후반의 장년 티가 나다 한 달 가까이 되면 본 나이 모습으로 돌아온다. 다시 이발소를 찾아 이발을 하고 물을 들인다. 한 달 못되어 한 번 바꾸는 외모지만 두 단계의 변화를 더 체험하는 셈이다.
염색 중 이발사의 염색 솜씨가 서투를 때가 있다. 염색약이 귀밑이나 이마로 흘러내릴 경우다. 머리를 감은 후 세수를 몇 번 해도 그 흔적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까칠한 타월로 몇 번이나 문질러도 그 흔적은 하루쯤 조금 남아 있다. 또 약의 품질에 따라 자고 일어나면 이틀가량 베개에 염색약이 누렇게 묻어나기도 한다. 십 년 전만 해도 시력이 좋았는데 지금은 염색의 영향인지 많이 떨어졌다. 이런 여러 문제로 염색을 않고 그대로 지내고 싶을 적도 있다.
사십대부터 머리 전체가 하얗게 샌 한 초등동기생이 있다. 그는 염색을 않고 지내왔다. 버스를 타면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양보 받은 적이 수차례 있다고 했다. 나이에 비해 흰 머리가 보기 좋지 못하긴 해도 구태여 검은 머리로 바꿀 필요가 뭐 있느냐며 흰 머리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좋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백발이나 다름없는 머리를 지녔다 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라면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겠다니 얼마나 당당한가.
얼마동안 검은 머리로 변했다고 마음이 더 젊어지는 것도 아니다. 흰머리로 지낸다고 해서 마음이 늙어지는 것도 아니다. 검은 머리 숲을 가진 불혹의 늙은이가 있는가 하면 흰 머리를 가진 여든의 젊은이가 있지 않는가. 아흔을 훨씬 넘긴 하얗게 센 머리로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에 열정을 가지는 이는 결코 정신의 늙은이는 아니리라.
아내는 생각이 다르다. 늙어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검은 머리를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에게 어설프거나 추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을 지녀하고 그런 모습이라야 매사에 의욕과 자신감이 생긴다며 외면의 변화가 내면의 변화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발을 한 후 염색하기가 귀찮거나 싫다면 집에서라도 해주겠다고 한다. 아내는 그리 말하지만 이발 후 머리를 감고 집에 와 다시 염색을 한다는 건 귀찮고 번거롭기 이루 말 할 수 없다.
지금 예순 살인 사람의 평균수명은 여든 일곱 살쯤 된다는 신문기사를 일전에 본 적이 있다. 그 나이 가량 산다면 언제까지 염색을 해야 할까. 남은 생이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 없지만 사는 동안 반쪽이어야 할 아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살 동안 아내를 힘들게 하지 않고 뜻을 따르자면 이발소 염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발소 염색이 귀찮다면 집에서라도 해주겠다는 아내! 그리 생각하는 아내들이 얼마나 될까? 육신의 일부를 검게 칠해서라도 마음의 젊음을 간직토록 하겠다는 아내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남은 세월, 오랫동안 아내와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은 아내의 머리에 흰 눈이 떨어지고 있지만 마음을 써 본적이 없었다.
첫댓글 머리염색을 하면 10년 이상 더 젊어 보인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 가짐을 챙기라고 하더군요. 사모님의 뜻에 따르시는걸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늘 부족하기 짝이없는 글을 읽어주시고 훌륭한 코멘트를 주시는 단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