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탄고도 설경과 백운산 마천봉 오디세이
1. 일자: 2025. 1. 30 (목)
2. 장소: 운탄고도, 백운산 마천봉
3. 행로와 시간
[만항재 밑 도로(09:55) ~ 만항재(10:05) ~ 약수터(11:17) ~ 하이원리조트 갈림(13:33) ~ 마천봉 갈림(13:59, 마천봉 1.5km) ~ 마천봉(15:33, 마운틴 탑 1.8km) ~ 마운틴 탑(17:23) / 14.9km]
< 운탄고도와 백운산 마천봉 길에 나서며 >
오래 전 기억을 되살리며 길을 나선다. 2011년 그때는 운탄고도란 길을 몰랐다. 산행지도를 보니 만항재, 하이원리조트, 백운산 마천봉이 스쳐간 기억의 편린을 만든다. 조금 멀리는 두위봉, 함백산, 정암사 등도 익숙한 지명이다.
운탄고도는 '석탄을 나르던 옛길'이다.
1330m,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인 만항재에서 출발하여 하이원리조트를 둘러싼 백운산 지능선을 걷는 운탄고도 하늘길은 해발 1,100미터가 넘는 고지에 위치하면서도 평평하게 난 임도라 걷기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더욱이 설 연휴를 앞둔 주중에 큰 눈이 내려 설경이 매우 멋질 것 같다.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져 있는 고원의 길', 겨울 이 길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백두대간의 능선은 한 폭의 수묵화이다. 꽃피는 계절에는 길을 걸으며 수백 여종의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 한다. 사계절 볼거리가 많은 산이란 말이다.
고한 백운산(1,426m)은 10년도 넘는 오래 전 찾았던 곳이다. 당시는 고한역에서 출발하여 정상 마천봉에 오른 후 화절령으로 길게 하산했던 기억이 있다. 3월초 인데도 설경은 매우 좋았으나 산행거리가 길어 고생한 기억이 난다.
오늘 만항재에서 시작하는 운탄고도길의 정점도 마천봉이다. 백운산 정상에 오르면 크고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다시 볼 수 있을 게다. 큰 눈이 내린 뒤라 설경도 원없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기대가 커진다.
하산은 마운틴 탑에서 곤도라를 타고 콘도 지역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그러면 산행거리는 13km 남짓으로 걷는 시간은 네 시간 반을 예상한다. 산악회에서 주어지는 총 산행 시간은 6시간이니 여유 시간은 천천히 스키장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많이 달랐다.)
< 만항재 ~ 마천봉 갈림 >
09:55 만항재 인근에 도착했다. 눈이 많이와
도로가 미끄러워 만항재까지는 걸어 올라가야 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20여분을 더 걸었다.
'1330 운탄고도', 앞숫자는 만항재의 해발고도이다. 백운산의 높이가 1426m 이니 액면 고도 차는 채 100m도 되지 않지만, 지도 상으로 내림과 오름을 여러 번 거쳐야 마천봉에 다다른다.
눈이 많이 쌓인 널찍한 임도에서 본격적인 트래킹을 시작한다. 비탈의 선 키 큰 나무의 가지에도 온통 하얀 눈이 붙어 있다. 풍력 발전소를 바라보며 걷는다. 눈썰매용 플라스틱를 갖고 온 이가 여럿 보인다. 트레킹의 초반은 눈 덮인 설원에서의 낭만 그 자체였다. 재설이 된 지역이 끝이 나자 등로는 좁아졌다. 눈이 정강이까지 차는 좁은 길을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걸음이 현저하게 늦어진다. 눈에 반사된 태양의 기세도 거세다. 그렇게 걸어 리본장착소와 약수터 부근을 지난다. 11:17,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비슷한 풍경, 비슷한 눈길을 너무 오래 걷는다. 멀리 굽이치는 산풍경은 나뭇가지에 가려 감질난다. 운탄고도를 알리는 이정과 임도 갈림을 여럿 지난다. 바람과 눈이 만드는 흰 조형물의 신비로운 모습만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러 생각들이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한다.
2시간 넘게 지루하게 걸어 하이원리조트 갈림 전 작은 언덕에 선다. 바라보는 풍경이 기막히게 좋은 곳이다. 탁 트인 풍경의 앞으로는 흰 눈밭이 펼쳐지고, 그 뒤로는 너울지는 산맥들이 줄지어 서 있다. 카메라를 세우고 여러 샷을 찍었다. 뒷 모습을 담은 사진이 마음에 든다.
좌측으로 풍경이 조금씩 열린다. 쉼 없는 걸음에 지쳐간다. 그렇게 다시 40여분을 걸어 백운산 마천봉으로 향하는 갈림에 산다. 만항재 출발 4시간, 거리는 대략 11.5km를 걸었다. 조금 멀고 지루했지만, 운탄고도를 알기에 충분히 의미있는 트레킹이었다.
이때까지는 앞으로 닥쳐올 '마의 시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 마천봉 갈림 ~ 하이원마운틴 탑 >
운탄고도 길을 더 걸을까? 마천봉으로 올라 하이원마운틴 탑까지 걸어 곤도라를 타고 하산할까를 고민한다. 마천봉으로 향하는 길에 선등자의 발자국이 보인다. 마음을 결정한다. 마천봉으로 향한다. 14:00, 마천봉까지 1.5km, 이후 곤도라가 운행되는 마운틴탑까지 1.8km 거리이니 시간 여유는 있다고 판단했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선답자들이 보인다. 다섯분이 러셀을 하며 걷고 있다. 가보기산악회 일행이다. 러셀의 힘겨움을 잘 알기에 거리를 두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노고의 길'을 도둑 마냥 따라 걷는다.
문제가 생겼다. 러셀하며 걷느라 영 속도가 나지 않는다. 0.5km를 전진하는데 30분이 소요된다. 게다가 등로의 흔적은 없어지고 오르막 비탈은 진득이 계속된다. 살짝 걱정이 든다. 이러다 귀경 버스를 제 시간에 타지 못하는 거 아닐까? 산에서의 걱정은 늘 현실이 된다. 아주 힘겹게 마천봉에 오르니 15:30분이 지난다.
평소에는 40분에 올 거리를 1시간 30분 넘게 걸었다. 게다가 리조트에서 올라온 이들이 등로를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 역시 빗나간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꼭 들어 맞는 상황이다.
마음을 비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랴. 마천봉 정상석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었다.
잠시의 불안한 쉼이 끝이난다. 더 깊은 눈밭과 길찾기의 고통이 다시 시작된다.
가보기산악회의 다섯분(남자 넷과 여자 한 분)은 정말 대단하다. 연세가 60대 후반 이상으로 보이는데, 눈길을 러셀에 가며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 감탄스러웠다. 앞장 서서 러셀에 참여하지 못하는 죄송한 마음에 묵묵히 따라 걷는다.
귀경 버스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 없을 거 같아일단 산악회 대장에게 전화를 했다. 늦을 거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하라고 말한다. 눈길에 그쪽도 하산이 늦어지나 보다. 갈림에서 운탄고도를 따라 걸었어도 만만치 않았음을 직감한다. 겨울 눈 산행의 무서움을 다시금 확인한다.
이제 4시 버스 출발 시간이 아니라, 5시 곤도라 막차 시간이 걱정된다. 리조트에 전화를 했다.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오늘은 강풍이 불어 곤도라 운행이 중지되었단다. 난감하다, 어쩌나. 전화 상담원에게 부탁을 하여 구조의 손길을 보낸다. 전화가 어디론가 여러 번 돌려지고 처음에는 어렵다고 하다가, 어두워지고 눈길에서 조난당할 수 있다는 말에 방법을 모색해 보겠다고 한다. 다행이다. 하산 등로 찾기가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게다가 허벅지까지 차는 눈길을 헤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스키장 클럽하우스의 주황색 둥근 돔이 보이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구조의 전화가 온다. 차를 보내주겠단다. 잠시나마 힘이 솟는다.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덕분에 일행 6명이 힘을 합쳐 길을 헤쳐 간다. 서먹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입이 얼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지 길었던 길의 마지막은 스키장 활강장 슬로프였다. 널찍한 눈밭을 걸어 곤도라 탑승장에 도착했다. 시간은 5시 20분이 막 지난다.
고마운 구원에 전화가 다시 오고 궤도가 달린 커다란 붉은색 차량이 등장했다. 포크레인과 정갑차를 반씩 닮은 거대한 구조물이 우리 일행 앞에 선다. 붉은색이 이리 강렬하고 고마울 때가 또 있었는가? 케빈 안에는 10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의자가 말 못할 정도로 안락했다. 안도에 깊은 쉼을 내쉰다. 사선을 함께 넘은 여섯 명은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넨다.
< 에필로그 >
나의 운탄고도 첫 트레킹은 7시간 30분 간 고원의 설경과 사선을 넘는 고난을 함께 경험한 특이한 사건이었다.
설 명절에 찾은 강원도 정선의 설산에서 나는 오디세이아 같은 파란만장한 귀향 이야기를 썼다. 비록 바다 건너 먼 곳으로 떠나 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길지 않은 하루 여행에서 '모험과 귀환'의 짜릿함을 경험했다.
오늘 하루 나는 오디세이아와 다르지 않았다.
오디세이아는 말한다.
"불멸의 삶은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고향 사람들의 기억과 인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의미있고 달콤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불이익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죽는 일입니다."
비록 눈길 러셀은 일행들에게 의지했지만, 리조트에 전화를 해 하산 차량을 마련한 것으로 내 몫을 했고, 그들에게 힘이 되어 다행이다.
정암사 부근에서 국밥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버스의 안락한 의자에 머리를 기대니 안도감과 함께 온갖 생각이 스친다. 모든 게 기억 속으로 흩어지고 흐릿해 진다. 잠시 눈을 감는다.
밥값도 내주시고 커피까지 타 주는 배려에 감사한다. 산 베테랑들이 헤쳐나가는 눈길 러셀의 감동, 길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멀고 목적지에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조난의 두려움, 동지애, 협력할 줄 아는 인간의 위대함 등등 결코 흔지 않은 값진 경험이었다.
비록 20년 산행 역사에서 처음으로 버스에 짐을 두고 내렸지만, 부끄럽지 않다. 더 값진 추
억을 만들었음에,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함께하고 힘이 되어준 여러분들께 감사한다.
시국은 험난해도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내 삶은 아직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그냥 넘사벽 산사나이네 ㅋㅋ
겨울산의 무서움을 다시금 확인한 산행이었습니다.^^
더 겸손하고 준비를 많이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