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촌은 회령에서 북으로 40리,
용정에서 남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을 지나 오랑캐령 넘어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지금은 오랑캐령 아래 길이 닦여서 편안히 통행할 수 있지만 1900년대 전반까지만해도 산의 능선을 타고 걸어야 했으니
지게를 지고 아기를 업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야반도주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고개였다. 오죽이나 힘들었으면
오랑캐령이라고 불렀을까!
명동촌은 1899년 종성의 김씨, 남씨, 문씨 그리고 또 다른 김씨 일가의 대대적인 이주로 시작되었다.
(명동촌 일대에는 이미 중국인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김항덕을 통해서 중국인 동한의 땅을 구매한 후에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자동촌을 거쳐 명동으로 이주했다.
윤씨 가족은 한 해 늦은 1900년에 명동촌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는 이주한지 17년이 지난 1917년에 오늘날 생가로 알려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삼합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명동촌 마을 입구에 있는 윤동주 생가 표시판
1917년 윤동주가 태어난 생가, 그는 여기서 명동소학교와 달라자에 있는 중국인 학교에 (1년간 )다녔다. 1931년 용정으로 이주하기까지 명동촌에서 대략 14년을 살았다.
윤동주의 생가, 과거에는 명동촌 마을 사람들이 생가를 관리하였는데 지금은 용정시 문화국이 관리한다고 한다. 미리 신청하지 않으면 관람이 허락되지 않는다
윤동주 생가에서 육도하 쪽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
명동촌 육도하에서 바라본 선바위, 당시에는 용정가는 길이 육도하 건너 편에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 반복되는 홍수로 길이 물에 자주 잠기어서 도로를 현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윤동주 생가 안에 지은 윤동주 박물관 후면(폐쇄되어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다)
명동학교에서 윤동주 생가로 오는 길에 있는 송몽주 생가, 송몽규는 윤동주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후꾸오까 감옥에서 1945년 3월 10일 옥사. (윤동주는 2월 16일 옥사)
명동촌의 일반 가옥들(2010년 까지만해도 순전한 조선족 마을, 한국 바람으로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한족들이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육도하 (백리 육도하라고 부려지는 하천은 용정에서 해란강과 합수한다), 가뭄으로 물이 없다. 멀리 선바위가 보인다
육도하는 윤동주 생가에서 3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