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 스님
탐진치(貪瞋痴: 욕심, 성냄, 어리석음)를 제거하는 첫 번째 기준은 계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불교의 첫째입니다. 계(戒)를 지키면 안정이 옵니다. 파도가 가라앉듯 잠잠해 지지요.
탐심(貪心)의 예를 봅시다. 다람쥐는 숲속을 오가며 평생 도토리를 모으며 사는데 혹 다른 누가 그것을 가져가기라도 하면 파르르 떨다 죽어버립니다. 그것이 없다고 금방 죽는 것도 아닌데 자기 것을 빼앗겼다 싶으니까 욕심에 떨다 죽는 겁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돈을 탐하다가 그 돈이 날아가 버리면 기가 막혀서 ‘어휴, 내 돈’하면서 죽어버리지요. 그게 바로 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심(嗔心)은 코나 발가락 손가락이 내는 것이 아니지요. 빛도 모양도 냄새도 없는 것이 진심을 내는데 벌써 육체가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성을 내면 가슴이 후다닥 뛰고 열이 치받고 눈이 캄캄해지고 입맛도 떨어지고 그러다 괴로워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치심(痴心)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 그것 안 되나 죽는다.’해서 자살하는 게 전부 어리석어서 죽는 겁니다.
그러나 탐진치가 삼독이라는 말이 그것이지요. 생각이 일어나서 육체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니 참 큰 힘을 가지고 있지요. 이 탐심, 진심, 치심에 따라 파도가 이니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겁니다.
생각이 파도를 치면 좋은 것이나 괴로운 것이나 똑같아요. 불구덩이에 들어가 불에 타 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 듯이 탐심에 빠져 죽으나 진심에 빠져 죽으나 치심에 빠져 죽으나 죽은 것이 매 마찬가지입니다.
이 탐진치 삼독이 항상 모든 오욕락을 구사하니 항상 마음에 파도를 일으킵니다. 그러니 계를 지키지 않으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파도를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계행을 지키면 마음이 가라앉아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안정이 되지요. 계행을 지키면 피가 맑아집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면 과거 현재가 다 보입니다. 팔식(八識)경계를 지나 구식(九識) 경계가 나타나 앉아서도 산 너머 저쪽에서 오는 사람이 환히 보이고 천리만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보입니다. 계행을 지키면 그만큼 마음에 광명이 비춘다는 애기지요. 그러므로 안정을 취해 지혜가 생긴다는 말은 모든 것에 밝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말합니다. 참선을 비롯한 모든 수행이 계정혜 삼학의 원리에 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가 안 돼요. 계(戒)가 바로 정(定)이고 정이 바로 혜(慧)지요.
육조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지무비(心地無非) 자성계(自性戒)요, 심지무치(心地無痴) 자성혜(自性慧)요, 심지무란(心地無亂) 자성정(自性定)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 자금강(自金剛)이요, 신거신래(身去身來) 본삼매(本三昧)니라. 즉 마음자리에 잘못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혜요, 마음자리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정이요, 더하고 덜하지 않음이 자금강이요, 몸이 가고 옴이 본래 삼매니라.
일체는 전부 마음이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관하는 것입니다. 마음 정진하는 법은 첫째가 계행을 지키는 것이고, 그 안정을 통해 화두를 하든가 염불을 하든가 주력을 할 때 지혜가 견교해집니다.
인간의 오욕락이 그 가치가 몇 푼어치나 되겠습니까. 세락후고(世樂後苦)라, 세상의 오욕락 뒤에는 괴로움이 따릅니다. 인간의 욕락은 순간에 좋은 것 같지만 그 자리가 독토(毒土)입니다. 욕락에 취해 자기 인생이 허무하게 영원히 떠내려간다면 그것은 정말로 참혹한 일입니다.
수행을 하는 뜻은 자기 생명을 발굴해 내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그저 욕망에 끌리는 대로 살면 헛된 인생살이가 되어 삶에 보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인간으로 태어나 인생이라는 학교에 다닙니다. 졸업할 때 가져가려고 열심히 살지만 결국 무슨 감투를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보배를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 하나 가지고 가는 게 없습니다.
바른 정신세계를 항상 시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의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고, 진리를 구하는 것이 내 인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보리심을 구하고 모든 중생을 측은히 여겨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내 개인 수행을 통해 이 사회를 정화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