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별산대 놀이>
1.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성행한 ‘양주별산대 놀이’는 도시의 발달과 상업의 성장이라는 조선후기사회의 변화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가면극의 하나이다. 양주 별산대 놀이가 공연된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는 과거 양주의 관청이 있던 지역으로 행정, 상업, 교통의 중심지였다. 기록에 따르면 한성 지역의 산대놀이패를 초청해서 공연을 했지만 자주 약속을 어기자 이 지역 사람들이 직접 산대놀이를 흉내내어 공연을 시작한 것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양주별산대 놀이가 산대놀이의 직접적인 영향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상업적인 필요성과 민중들의 요구에 의해서 성립되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2. 양주별산대 놀이에 참여한 놀이패들은 대부분 관청의 역을 담당했던 하층민으로서 변화하는 사회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수용했던 집단이었다. 양주별산대 놀이는 관청의 도움과 지원을 속에서 ‘향사청’이라는 관청 음악기관의 악사들을 공연에 출연시킬 수 있음으로 해서 더욱 높은 수준의 극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삼현육각’ 중심의 음악은 낙동강 주변의 오광대나 야류에서 볼 수 있는 타악기 중심의 음악과는 차별되는 세련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놀이꾼들은 ‘都中’이라는 일종의 조합을 구성하여 각각의 기능에 따른 배역을 배정하고 그것을 위계질서의 중심으로 삼는 나름 근대적인 방식의 운영을 시행했다고 한다.
3. 양주별산대놀이는 출연 인물 모두가 대사를 하지 않으며 대표적인 인물 특히 종교적 권위와 유교적 질서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사를 하였고, 대사보다는 다양한 춤과 음악을 더 부각시키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등장인물들은 관용적인 말을 하면서 악사들에게 음악을 요청하고 거기에 따라 다양한 형식의 춤을 선보였다. 이런 특징이 가면극을 민속극이라는 연극적 특징보다는 ‘춤과 음악’을 중시하는 ‘탈춤’이라는 방식으로 수용하는데 어떤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4. 양주별산대놀이에는 전통적인 굿에서 연유한 특징과 새로운 사회적 변화의 특징이 고루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을 통해 중세적 신분사회와 관습적인 종교의례에서 전환하려는 새로운 사회의식의 성장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윤리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현실적 욕망을 중시하게 하는 것이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전통적인 종교적 성격은 먼저 ‘연잎과 눈끔적이’라는 신적인 등장인물로 통해 표현된다. 놀이 앞부분에 상좌, 옴중, 목중 등이 등장하면서 세속적으로 타락한 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종교적 영역에도 침범한 상업적 욕망의 힘을 재현한다. 그때 등장한 ‘연잎과 눈끔적이’는 하늘과 땅의 신성한 힘을 상징하는 존재들인데, 이들의 등장으로 타락한 중들이 쫓겨나는 장면은 나쁜 것들을 제거하는 ‘벽사적 기능’과 순수함을 보존하려는 ‘종교적 기능’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이 마지막 장면의 미얄할미 장례에서 펼쳐지는 ‘진오귀굿’ 또한 현실적 욕망에서 패배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종교적 위안의 장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굿’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던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애도의 의례가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행됨으로써 현실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위로하는 것이다.
5. 하지만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전통적인 특징보다는 사회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의식과 욕구가 더 많이 표현되고 있다. 먼저 상업적 성장에 따라 변화된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배금주의, 고리대금업의 폐해, 성의 상품화 등이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표현된다. 옴중의 “이놈아 쓰기는 무엇을 써 월수를 써 일수를 써 네가 빚쟁이로구나 저 놈이 평생 가난하여 남의 빚만 써 본 놈이로구나” 같은 대사를 통해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들이 겪는 고리대금업의 폐해를 알 수 있으며, 돈이 적다고 매음행위를 거부하는 애사당의 모습 속에서 배금주의와 성의 상품화 현상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장면에서 행동의 결정근거는 돈인 경우가 많으며 돈에 따라 변화하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6. 상업화는 세속적인 경향을 더욱 심화시킨다. 세속과는 거리를 두어야 할 중들마저 자신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현실 속으로 들어와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중들은 “우리들은 중이라도, 오입쟁이 중이다.”라고 외치며, 소무에 유혹된 고승인 노장은 “도는 다 무어냐, 나는 도를 버리고 이제부터는 속인이 되었다. 속인의 계집과 살겠다.”라고 선언하며 여성들을 유혹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박판에 뛰어들기도 한다.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은 결국 돈과 성에 대한 집착으로 심화된다. 나이든 노장과 샌님은 젊은 여성들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지만, 이들은 젊은 사내의 도전에 직면한다. 결국 노장은 취발이에게, 샌님은 포도대장에게 여성을 빼앗기는 처지로 전락한다. 이런 장면을 ‘겨울과 여름’의 투쟁이라는 주술적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과거의 권위와 명예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풍자로도 이해될 수 있다.
7. 전통적인 권위의 몰락은 가족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는 우연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지만, 할아비의 독설 때문에 할미는 죽음을 맞는다. 이런 죽음에 대해 자식들은 아버지의 암상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며 아버지를 경멸한다. 할아비와 할미의 갈등을 ‘처첩간의 싸움’으로 표현한 다른 가면극과는 달리 양주별산대놀이는 남편과 아내 뿐 아니라 자식과의 관계로 확장시켜 가족제도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비난이며 권위만을 세워 가족 구성원에게 해를 끼치는 아버지의 위상에 대한 분노이다. 이러한 갈등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통해 극복된다. 할미의 죽음을 통해 자식들이 모였고 그녀를 위해 ‘진오귀굿’을 거행한다. 갈등과 분열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해결과 화합은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8. 『탈춤의 역사와 원리』에서 조동일은 미얄할미의 죽음을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하여 다시 구성한다.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삶’과 ‘욕망’을 긍정하며 그것을 추구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미얄할미 장례에서는 ‘삶’과 ‘욕망’에 대한 한계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삶 속에서 이어진 갈등이 죽음을 통해 봉합되는 장면에서, 그리고 그러한 봉합 속에서도 미얄할미의 자식들이 현실에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통해 ‘삶에 대한 예찬’은 아직 극복해야 할 많은 장애를 안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본다. “삶의 부정인 죽음이 갈등을 해결하는 데 비해서 삶의 창조인 성은 갈등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격심해지면서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새로운 생활을 구가할 수 있는 조건이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고민을 암시적으로 반영한다.”
9. ‘양주별산대놀이’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부정 및 민중들을 수탈했던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고 있으며, 가부장적 질서를 통해 지배하는 남성적 사회에 대한 거부감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상업적 발전과 도시의 성장에 따른 시대적 변화가 작용된 결과이며 그 속에서 변하고 있는 민중들의 사회적 의식이 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면극의 핵심을 민중적 저항으로 산정하는 주장에 대해 경계하는 견해도 있다. “조선조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 속에서 놀이꾼들이 일부 지배층을 비판하거나 현실 지향적인 의식을 짙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하여도, 그러한 의식이나 비판이 일관된 태도나 사고체계(극적구조)로 나타나지 않는 취약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부의 내용이 민중적인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서 그 실체 전부를 의식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는 아직 의문이 남아있다.” 나름 의미있는 지적이며, 가면극에 대한 균형잡힌 해석을 요구하는 견해라고 보여 진다. 가면극에 담긴 가능성과 한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 이것은 가면극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데도 중요하지만 현재 내가 연구하려는 ‘가면극과 민중극·마당극’과의 연관에 대한 핵심을 찾는 데도 중요한 고려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 가면극에 담긴 가능성과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