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수 시집
주소
자주 주소를 두고 올 때가 있다
삶의 번지수를 우산처럼 잊고 나와
생각 없이 비를 흠뻑 맞을 때가 있다
주소를 허물 벗듯 살다 보면
초록草綠도 그늘도 없는 나무가 된다
소속 없이 걷는 일은
이념 없이 사는 것과 같다
무연고의 계절을 나던 날들
어느 열대 바닷가에 있어도
냉담冷淡의 해풍에 녹슬어 갔다
내 삶의 궤적은 뜬풀이 떠다닌 길
때론 집을 두고 온 것 같아
골목으로 급히 들어서 보지만
고장 난 초인종을 누르듯 헛헛했다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집을 찾은 적 있었다
주소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내게 열정熱情의 우체부가 다녀간 것 같은 날
가슴 한편의 우편함을 뒤적이다가
열없이 빈손으로 돌아서는 일처럼
내 기척만 확인하는 일은 슬펐다
사냥감을 놓친 짐승처럼
어두운 집에 터벅터벅 돌아온 날 많아도
허허 웃으며 불을 켠 날이 있다
어쩌면 산다는 건 나를 도드라지게 하는 일
가끔은 내가 주소라는 게 행복할 때가 있다
사고 현장
누구의 소리가 쓰러진 자리일까
불볕이 점거한 도로 한가운데에
흰색 스프레이가
새된 소리 뭉텅이를 붙들고 있다
아픔의 정황情況인데
소리는 삐쩍 말랐다
전갈처럼 독을 번쩍 치켜들고
횡단보도 건너는 길
익숙한 독침끼리 닿아도
우리는 스프레이에 잡힐 것 같다
무단無斷의 소리여서인지
도로 위의 정황은 외면받는다
한길에서 물러난 쪽방같이
몸 하나 간신히 쪼그릴 자리
시간의 바퀴를 되돌리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 있을까
길을 다 건너 돌아보도록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사고 현장
소리는 곧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리라
스프레이가 염습한 소리더라도
새의 첫 비행처럼 푸드덕거리며
감정 노동자
언제든지 전화하셔도 됩니다 나는 전화기를 떠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의 목소리는 뾰족했고 나는 그 날에 수없이 찔렸지만 이젠 아픔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통점이 살아나면 이를 악물며 웃겠습니다 나는 날마다 친절을 쓸고 닦습니다 목소리가 가팔라지면 친절은 먼지 하나까지 평가되니까요 나는 친절을 자동으로 만들어 내고 당신은 즉석에서 입맛대로 소비합니다 나는 칸막이 안의 배우 연기演技는 오로지 칸 안에서 이뤄집니다 때로는 무언극 배우보다 외롭지만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은 내 연기를 즐기니까요 나는 연기 연습이 신이 납니다 나는 꿋꿋한 감정 노동자 친절이 소모품같이 바닥난다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끝없이 봉사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감정들은 알지 못합니다 화를 낼 줄도 모르니 내일은 색다른 친절을 기대해 주세요
상봉相逢
이게 얼마 만이냐
함께 숨 느껴 본 지가
우리 헤어진 길은
동해와 서해 같아
네 이름만 부여잡은 채
꿈꾸듯 살아왔다
내 꿈엔 굳은살이 박였다
울음이 말을 삼켜
얼싸안고 만져 보는 얼굴
이제 손 놓치지 않으리니
이 눈물바다에서
동상銅像이 되어도 좋으리라
브라질에 내린 눈
브라질에 폭설이 내렸다
삼바 축제의 육감적인 무희를 상상하고
새벽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 지를 때
한파는 벌거벗은 채 열대의 골문을 두드렸다
눈은 한파가 펑펑 모는 공
차가운 드리블은 태풍의 진로보다 현란絢爛하다
무희가 흔들어 대는 엉덩이처럼 뜨겁던 날들이
자책골을 넣은 수비수 얼굴같이 식었다
겨울의 민얼굴이 잊혔다면
남미 축구의 다혈질을 떠올려 보자
겨울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가졌다
관중이 쏘아 올린 소리처럼
싸늘한 기운으로 달궈진 브라질
겨울엔 더 이상 공정한 경기를 치를 수 없다
이상 기후를 둘러싼 구경꾼들처럼
브라질 겨울의 심판은 편파적이다
김 서린 응원가를 부르는 심판이 있고
이국異國의 골 세리머니를 따라 하는 심판이 있다
웃음이 둥글게 만들어지고
심판들은 열대의 골문 안으로 차 넣는다
심판들은 한 무더기 폭설이 된다
이변의 구경꾼들은 훌리건이 되기 쉽지
경기장 밖으로 나온 겨울을 조심해야 한다
남미의 기상 캐스터들은 산타 복장을 하고
아마존 원주민들은 겨울옷을 사냥할 것이다
브라질에 내린 눈의 결정結晶은 사납다
사람들이 온실의 제단을 서성거릴 때
하품은 겨울과 통정해 한파를 낳았다
지구地球에 걱정이 쌓였다
[김완수 프로필]
201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가, 2014년 제10회 5.18문학상 신인상에 시가, 2015년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다. 시집 『꿈꾸는 드러머』. 동화집 『웃음 자판기』. 시조집 『테레제를 위하여』 2024 시집 『브라질에 내린 눈』
이게 다 날씨 탓인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우울함, 불안과 권태 등 감정에 있어 사람들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누군가는 비 오는 날을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누군가는 반대이기도 하고,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엔 더 숨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김완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브라질에 내린 눈(나무향·1만원)’은 그러한 감성을 충분히 담아낸 책이다. 우선 ‘대체로 맑음’, ‘대체로 흐림’, ‘구름 많음’, ‘주의보’라는 소제목으로 갈래를 타 총 4부로 구성된 목록부터 호기심을 끈다. 날씨를 느끼는 사람들의 감각과 감수성에 초점을 맞춘 듯, 일상의 관성과 무료에서 벗어난 시인의 발걸음이 시집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김 시인은 광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성장했다. 두 도시가 생장의 거점이었고, 농민신문에 시조로 먼저 등단했지만, 이 지역의 여러 매체에서 시, 소설로 등단해 문학 활동도 주로 남도에서 했으니 각별한 지역 연고가 담긴 작품도 여럿 읽힌다.
남도의 밥상은 따뜻한 인심을 전하고, 하멜등대에서도 끈끈한 인심의 풍향계가 돌아간다. 시인에게 저 바다는 방랑을 부추기며 그의 발걸음을 이끌고, 그렇게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시인은 소재를 한가득 안고서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시를 쓰고 있다.
충만하게 감성이 채워진 후에 시인은 다시금 자아와 타자, 사람과 자연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물을 통해 이웃간 공동체의식을 떠올리고, 어머니가 서랍 속에서 꺼내 준 족보를 펼쳐보면서 사회적 연결고리에 대한 끈끈함을 챙겨보기도 한다. 세상 모든 부조리를 넘기지 못하고, 울컥한 마음을 붙잡아 시인의 언어로 토해낸다.
김규성 시인은 “김완수에게 전통적 시간이 지시하는 내면세계의 보편적 가치관/구심력이 본질이라면 외향적 망향의 공간을 바탕으로 한 방랑/원심력은 차이(변화)로 볼 수 있다”며 “그는 본질과 차이를 동시에 아우른 시인으로, 어느덧 시의 혼과 육질을 결 따라 흔적 없이 주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201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2014년 제10회 5.18문학상 신인상에 시, 2015년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됐고, 2016년 푸른 동시 놀이터에 동시가 추천 완료됐다.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2022년 선수필 봄호 신인상에 수필이 당선됐다. 지은책으로 시집 ‘꿈꾸는 드러머’, 단편동화집 ‘웃음 자판기’, 시조집 ‘테레제를 위하여’가 있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http://www.domin.co.kr)
길을 가다 보면 도로에 스프레이로 표시된 부분이 있다. 사람의 모습으로 혹은 오토바이의 모습으로 혹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사고 현장. 절박한 가장의 마지막 그림자이거나 미처 피어나지 못한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거나, 해맑은 아이의 안타까운 흔적일 수 있는 사고 현장. 하지만 당사자 이외 국외자에게는 어쩌면 그 사고 현장은 다만, 사고 현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고의 이유는 스프레이만으로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일이 있다는 것 외에 횡단의 배경과 배후와 이유와 사실은 알 수 없고, 또한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호기심이라는 것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고 현장. 어느 가장의 삶과 아가씨의 무한하게 남은 시간과 아이의 밝은 미소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것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고 현장이기에 사고 현장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슬프다.
누구의 소리가 쓰러진 자리일까
불볕이 점거한 도로 한가운데에
흰색 스프레이가
새된 소리 뭉텅이를 붙들고 있다
아픔의 정황인데
소리는 삐쩍 말랐다/
새된 소리를 뭉텅이를 붙들고 있는 흰색 스프레이라는 표현이 아릿하다. 그 스프레이가 가둬두고 있는 소리의 근원, 도로 한가운데 비쩍 말라가고 있는 소리의 근원은 무엇일지? 좀 더 환유하면 삶의 한 가운데를 점거하고 있는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스프레이 바깥의 우리는 정작 스프레이의 안쪽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무단 無斷의 소리여서인지
도로 위의 정황은 외면받는다
한길에서 물러난 쪽방같이
몸 하나 간신히 쪼그릴 자리
시간의 바퀴를 되돌리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 소외라는 단어를 겹겹이 두르고 사는 사람들, ‘오타쿠’의 문을 걸어 잠그고 사는 사람들, 도로 위의 정황은 내 일이 아닌 듯 내 일인데, 시간의 바퀴를 아무리 돌려도 일어나지 못하는 스프레이 속 어떤 그림자는 거대한 스프레이 속 우리와 겹쳐있는 것은 아닌지? 결국 우리는 모두 스프레이 바깥의 스프레이 속에 살면서 스프레이 속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현대사회의 도로는 아래의 표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 다 건너 돌아보도록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사고 현장
소리는 곧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리라
우리는 길을 건너는 사람이며 동시에 스프레이 속의 사람이며 가두어진 소리는 좀 더 가두어져 인식하지 못하는 ‘가두어짐’ 속의 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현대사회는 사고라는 개연성을 매 순간 안고 사는 우리들의 사회라는 생각이 드는 좋은 작품이다.
[김부회 평론집 시는 물이다 중 김완수 사고현장]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