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득윤 (李得胤)
1553년(명종 8) ∼ 1630년(인조 8), 조선 중기의 유일(遺逸)로서 역학(易學)의 대가, 음악 이론가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거주지는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수락리(壽樂里)이다.
처음의 이름은 덕윤(德胤) 이었으나, 기휘(忌諱 : 임금 이름과 같은 것을 피하는 것)하여 득윤(得胤)으로 고쳤다. 고려말 문신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부친은 진사(進士) 잠(潛)이고, 모친 강씨(姜氏)는 장사랑(將仕郞) 응청(應淸)의 딸이다. 조부는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을 지낸 곤(鯤)이며, 증조부는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인 공린(公麟)이다. 이지함(李之菡)의 제자인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웠다.
1575년(선조 8) 23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른 후 묘소(墓所) 아래 추원당(追遠堂)을 지었다. 유학자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워 성리학에 정통하고 『역학(易學)』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를 좋아하여 역대의 금보(琴譜:거문고 악보)를 집대성하였다.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스승인 서기(徐起)를 곡하였다. 1597년(선조 30) 1월 학행(學行)으로 추천(推薦)되어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였다. 1600년(선조 33)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임기를 마친 1602년(선조 35) 형조 좌랑(刑曹佐郎)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 1월에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주역(周易)』을 강론하려고 『주역』의 주석(註釋)을 교정케 했는데, 당시 조정(朝廷) 경연관(經筵官)들이 이득윤을 추천하므로, 선조가 이득윤을 다시 불러 『주역(周易)』을 교정(校正)하게 하였다. 『주역』 교정을 끝마치자, 그 공으로 선조는 공조 정랑(工曹正郞)과 형조 정랑(刑曹正郎),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등을 연달아 제수(除授)했으나, 이득윤은 모두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였다
1604년(선조 37) 2월 29일에 의성현령으로 제수(除授)되어 여러 차례 은명(恩命)을 어긴 것을 미안하게 여겨 부임(赴任)하였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자, 선조가 의복 한 벌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또한, 의성의 백성들이 유임하기를 원하여 3년 동안 현령으로 재임하다가,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 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書翰)을 교환하며 역학(易學)과 음악(音樂)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 거문고에 관련된 명(銘)·부(賦)·기(記)·시(詩)·서(書)·악보·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라는 귀한 거문고 악보를 후세에 남겼다.
1606년(선조 39) 제자인 청주 군수(淸州郡守) 한백겸(韓百謙)이 주목괘변도(周穆卦變圖)를 간행하자 발문을 짓고, 1607년(선조 40) 청주 서계로 낙향하여 옥화동에 옥화구곡(玉華九曲)을 설정하여 제오곡(第五曲)에 춘풍당(春風堂)과 추월헌(秋月軒)을 짓고 학문에 전심(全心)하고, 1608년(선조 41) 유정서원 [有定書院, 일명 신항서원(莘巷書院)] 원장에 추대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삼남 지방(三南地方)에 통문(通文)을 보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무고(誣告)한 정인홍(鄭仁弘)을 성토(聲討)하고 1620년(광해군 12) 『현금동문류기(玄琴東文類記)』를 편술(編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유일(遺逸)로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공조 정랑(工曹正郎),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을 지내고, 1624년(인조 2)괴산 군수(槐山郡守)로 제수(除授)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고 같은 해 12월 귀향(歸鄕)하였다.
1630년(인조 8) 5월 28일 졸(卒)하여 8월에 청주(淸州)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 외에 저서로는 『서계집(西溪集)』, 『서계가장결(西溪家藏訣)』이 있다. 특히, 정두원과 나눈 서한의 내용을 담은 『현금동문유기』는 『안상금보(安常琴譜)』, 『조성금보(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