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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씨족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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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원산 위정철 □ 詠而齋公(文德) 遺稿[영이재공(문덕) 유고]
야운처사 위이환 추천 0 조회 9 23.08.11 09:21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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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8.11 09:22

    첫댓글 (144-060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60일차에는 '영이재공(위문덕)의 유고'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 61일차에는 '행와공(사급) 계자서'가 계속 이어집니다.



    [본문내용- 영이재공(문덕) 유고]
    / 무곡

  • 작성자 23.08.11 09:23

    장흥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를 발행(1759년)하는 등 크고 작은 문중사의 토대 및 청사진을 마련함과 아울러 문사일의 모범을 보여주신 큰 어른(대인) 영이재공(문덕)의 유고가 60일차분에 실려있습니다./ 무곡

  • 작성자 23.08.11 09:23

    영이재공,
    족보편찬, 충렬공 묘소,
    도문회 전신인 문회 창설 등 굵직한 업적이 많네요./ 벽천

  • 작성자 23.08.11 09:24

    충렬공 비문도 직접 작성하는(撰)등 문중사에 깊게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40세 이후에는 아들 존재공의 뒷바라지와 문사에 오롯이 전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 작성자 23.08.11 09:24

    가계12훈 중
    "8번 관리들을 건들지 말라"가 이색적입니다./ 벽천

  • 작성자 23.08.11 09:24

    문중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처세와 방편으로 사료됩니다. 예전에 귀양온 분(어부사시사의 윤선도)에게 일종의 편의를 제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어려움에 처한 선조님(취수헌공)도 계셨지요? 이런저런 사건들을 접하고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일종의 생존법이자 처세술로 사료됩니다.
    또 한분의 선조(월산거사)께서 "귀양온 분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유계를 남겼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자구입니다. 그 의미를 따지자면 '카네기'의 처세술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생생한 처세학 개론으로 봐도 될 것입니다./ 무곡

  • 작성자 23.08.11 09:24

    영이재공(문덕, 1704~1784)은 문중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 문중조직인 문회(門會)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일가 중심의 작은 모임만 있었다.
    문회를 발족시키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둘째, 충렬공 묘소를 찾아 1741년부터 묘전에서 시제를 지냈다.
    그리고 묘전에 비석을 건수했다.
    셋째, 1759년에 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를 장천재에서 발행했다. 당시에는 족보의 유무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는 후손으로 하여금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장흥위씨요람"에서 발췌)/ 무곡

  • 작성자 23.08.11 09:25

    어쩌면 '장흥위씨'의 경우,
    족보와 관련해 시대를 크게 구분한다면
    영이재공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을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고, 당시 선조님들의 의식은 물론 사고의 폭과 깊이도 변방 또는 일부 지역에서 전방위적으로 한없이 넓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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