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詠而齋公(文德) 遺稿[영이재공(문덕) 유고]
영이재공 휘 문덕(文德․1704~1784)의 자는 의여(懿汝)며 호는 영이재(詠而齋) 또는 춘곡(春谷)이다. 그는 4살 때 아버지 삼족당(三足堂)을 여의었다. 어려서 매우 영민(英敏)해 1734년 생원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1747년에는 동당 식년시(東堂式年試)에 논(論)으로 합격했으나 복시에는 떨어져 출사를 접고, 아들 존재공(存齋公)의 뒷바라지와 문사에 전념했다.
공은 장흥 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己卯譜)를 발행했다. 뭐든 최초의 일은 어렵기 마련이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세계(世系) 등을 세우는 일에서부터 당시까지 찾지 못한 충렬공의 묘소를 찾아내서 묘비를 세웠다. 현재 세워진 비의 비문도 공이 직접 찬(撰)한 것이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문중사를 위해 여생을 바쳤다.(지장록 p. 1111, 영이재유고집)
■ 家戒十二訓 (가계12훈)
1. 嚴內外之辨 = 내외의 분별을 엄하게 하라
2. 無蓄妾媵 = 축첩을 하지 말라
3. 無耽岐樂 = 기락을 하지 말라
4. 無耽酒 = 술에 빠지지 말라
5. 無博奕 = 바둑이나 장기에 빠지지 말라
6. 無揚人釁累 = 사람의 결점을 들추지 말라
7. 無爭戞敎院 = 교원에서 다투지 말라
8. 無侮慢官長 = 관리들을 건들지 말라
9. 無交謫客 = 귀양 온 사람과 사귀지 말라
10. 無推久遠奴婢 = 오래되고 멀어진 노비를 찾지 말라
11. 無交通雜客 = 잡객과 어울리지 말라
12. 無賭厚利 = 내기를 하지 말라
■ 送咸興宗人挺振還鄕 (時新遭叔父喪故末聯云)
(함흥종인정진의 환향) 숙부상을 당해 끝 구절에 이름
「壯元峯下舊簪纓南北分張問幾庚徑訪古閭談遠祖共承香火上先塋江山嶺外千重路骨肉懷州百世情嗟我餞筵無限痛啓春亭上獨送行」
〈해설〉장원봉 아래 옛날 벼슬한 집안이 남북으로 갈린 지가 몇 년인고 묻노라. 옛 마을 찾아다니며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하며 함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산에 오르는구나. 강산은 영외에 천 겹의 깊이요, 골육은 회주(장흥)의 백세 정이로다. 슬프다 내가 전송하는 자리 한없는 아픔을 계춘정 위에 홀로 떠나는 구나.
■ 送咸興宗人挺振還鄕 (2)[송함흥종인정진환향 2]
德川關外獨歸程 덕천관 밖에 혼자서 돌아가는 길
烏次山頭萬古情 오차(천관)산 멀리 만고의 정이로다
還鄕若問天南族 고향에 돌아가 일가를 묻거든
三百年前卽兄弟 3백 년 전에는 바로 형제간이라고 하소서
■ 與圖詩(여도시)
泰仁可旌義 크게 어짊은 가히 의를 표장할 만하고
興德宜求禮 덕을 흥케 함은 마땅히 예를 구할 일이다
樂安長興平 안분을 즐거워하면 길이 흥하고 평화로울 것이며
淳昌咸悅豫 순후하고 창성하면 다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上下咸悅泰仁義 상하가 모두 기뻐하니 인의가 큼이요
老少同福永昌平 노소가 함께 복되니 길이 창평하도다
金溝沃土其萬頃 금빛 도랑물 기름진 땅 만경을 이루었고
禾穀茂長爲沃溝 나락곡식 무성히 자라 옥구가 되었구나
※ 첫 수는 영의재의「난정시」의 일부로 태인-정의-흥덕-구례- 낙안-장흥-순창-함열을 엮어 짠 것이고, 뒷 수는 악부의 소재 전라도 일부인 함열-태인-동복-창평-금구-만경-무장-옥구를 엮어 짠 대목이다. (金碩會 '조선후기 地名詩의 전개와 위백규의 輿圖詩' p.5)
(144-061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60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60일차에는 '영이재공(위문덕)의 유고'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 61일차에는 '행와공(사급) 계자서'가 계속 이어집니다.
[본문내용- 영이재공(문덕) 유고]
/ 무곡
장흥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를 발행(1759년)하는 등 크고 작은 문중사의 토대 및 청사진을 마련함과 아울러 문사일의 모범을 보여주신 큰 어른(대인) 영이재공(문덕)의 유고가 60일차분에 실려있습니다./ 무곡
영이재공,
족보편찬, 충렬공 묘소,
도문회 전신인 문회 창설 등 굵직한 업적이 많네요./ 벽천
충렬공 비문도 직접 작성하는(撰)등 문중사에 깊게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40세 이후에는 아들 존재공의 뒷바라지와 문사에 오롯이 전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가계12훈 중
"8번 관리들을 건들지 말라"가 이색적입니다./ 벽천
문중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처세와 방편으로 사료됩니다. 예전에 귀양온 분(어부사시사의 윤선도)에게 일종의 편의를 제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어려움에 처한 선조님(취수헌공)도 계셨지요? 이런저런 사건들을 접하고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일종의 생존법이자 처세술로 사료됩니다.
또 한분의 선조(월산거사)께서 "귀양온 분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유계를 남겼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자구입니다. 그 의미를 따지자면 '카네기'의 처세술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생생한 처세학 개론으로 봐도 될 것입니다./ 무곡
영이재공(문덕, 1704~1784)은 문중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 문중조직인 문회(門會)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일가 중심의 작은 모임만 있었다.
문회를 발족시키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둘째, 충렬공 묘소를 찾아 1741년부터 묘전에서 시제를 지냈다.
그리고 묘전에 비석을 건수했다.
셋째, 1759년에 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를 장천재에서 발행했다. 당시에는 족보의 유무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는 후손으로 하여금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장흥위씨요람"에서 발췌)/ 무곡
어쩌면 '장흥위씨'의 경우,
족보와 관련해 시대를 크게 구분한다면
영이재공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을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고, 당시 선조님들의 의식은 물론 사고의 폭과 깊이도 변방 또는 일부 지역에서 전방위적으로 한없이 넓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