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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춘하추동 계간평(2026겨울호-제16호)
절제와 함축으로 승화된 다채로운 문학성
김 석 철(한국시조협회 고문)
문학은 인간다움과 윤리,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는 사회적 백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문학은 개인과 사회를 잇는 보편적 경험이며, 우리 삶 속의 감정과 기억을 언어로 담아내는 예술이기도 하다. 문학은 지적으로 즐기기 위한 것보다는 삶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하는 장치이며, 인간의 삶과 사회를 깊이 있게 성찰하게 하는 정신적 자산이다. 문학작품은 독자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읽히고 해석되는 순간, 그 문학은 완성된 생명을 갖는다. 따라서 문학의 역할은 사회가 때로는 기술 중심적이고 효율만을 추구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적 연결을 해주며,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과 아름다운 진실을 포착하는 감각을 되살리는 역할을 한다. 이제 우리 문인들은 문학이 독자의 삶에 스며들고 일상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
문학 중에서도 시조와 시는 정서와 지혜와 예지의 꽃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영혼이 담긴 시조와 시는 ‘담금’과 ‘삭힘’ 또는 ‘묵힘’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문학작품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창작되는 문학성과 현대성을 제대로 갖춘 시조와 시는 불후의 예술작품이 될 것이다.
그럼 먼저 지난 가을호 “시조 창작의 멋”란에 실린 시조 중에서 10여 편을 골라 살펴본다.
세상은 요지경 속 가질 것 너무 많아
욕심을 내려놓고 혼자서 걷는 길에
그림자 함께 걸으니 의롭지는 않구나
- 강원산, 「인생길」 전문
강원산 시인이 발표한 네 편의 시조 중에서 고른 「인생길」은 시조의 율격을 제대로 갖춘 정격시조로 세상의 물질적 욕망을 내려놓고 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는 삶의 태도를 담은 단시조다. 짧은 형식 안에 욕심과 자아성찰이라는 주제를 담았으며, 상징적·성찰적·교훈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특히 ‘길’은 인생의 여정, ‘그림자’는 떨쳐낼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초장에서는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는 현실 인식, 중장에서는 욕심을 내려놓고 홀로 걷는 삶의 선택, 종장은 그림자라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결말이 담겨 있다. 가장 돋보이는 표현은 종장의 “그림자 함께 걸으니”이다. 실제 그림자를 의인화하여 자신의 내면, 욕망, 고독, 삶의 흔적 등을 함축하는 좋은 이미지로서 내면의 고독과 인간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시조의 어조는 담담하고 관조적, 자기성찰적이며, 이 시조에 담긴 정서는 세상에 대한 피로감 → 욕망의 절제 → 고독한 자기성찰로 이어진다. 전체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는 노년의 상징적 정서가 잘 살아 있다.
기도로 아침 열고 부부 서로 눈빛 살펴
두 발로 길을 나가 이웃과 담소하며
밥 한 끼 살그래 내곤 푸른 언덕 오르리
뻐꾸기 구애 소리 귓전에 흘려두고
열매를 거둬들여 벗에게 보내고는
오롯이 흙내음 맡고 들숨날숨 쉬리라
꽃노을 번져올 제 시 한 수 빚어내고
일기장 펼쳐 들면 한쪽 가득 차 있으리
십 년 후 그날의 활보 하늘마저 기억하리
- 김유영, 「십 년 후 그날에도」 전문
이 작품은 십 년 뒤에도 변함없이 이어가고 싶은 소박하고 건강한 삶의 모습을 그린 세 수로 짜인 연시조이다. 현대시조는 시적 구성 원리로서 주로 3장을 고수하며 연시조는 단시조를 중첩시켜 시적 의미를 확장하고 강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삶의 하루를 따라가듯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아침 → 낮 → 황혼으로 구성한 점이 안정적이며, 전체적으로 한 사람의 일상적인 하루이자 이상적인 노년의 삶을 보여준다. 기도, 부부애, 이웃과의 정, 나눔, 자연, 시와 기록을 한데 엮어 ‘잘 늙어가는 삶’에 대한 긍정적 소망을 따뜻하게 보여준다. 특히 거창한 미래가 아니라 밥 한 끼, 흙내음, 들숨날숨, 시 한 수 같은 일상의 소재로 행복을 형상화한 점이 좋아 보인다. 주된 표현과 이미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순수 고유어를 주로 취택하고 있음이 인지되며, 시각적 이미지로 “푸른 언덕”, “꽃노을”, “하늘”, 청각적 이미지는 “뻐꾸기 구애 소리”, 후각적 이미지는 “흙내음”, 신체적 이미지는 “들숨날숨”, 문학적 이미지는 “시 한 수”, “일기장” 등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특히 “오롯이 흙내음 맡고 들숨날숨 쉬리라”는 욕심을 덜어낸 삶의 평온함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마지막의 “십 년 후 그날의 활보 하늘마저 기억하리”는 개인의 발걸음을 하늘의 기억으로 확대하는 표현으로, 작품의 스케일을 넓혀준다. 이렇게 삶의 진실을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은 시적 창조의 좋은 발상이라 할 것이다.
적막을 흔들어 깨운 푸른 소리 한 자락
길고 긴 세월의 숨을 적요 속에 뉘어두니
가슴에
고인 생각들
스스로 지워진다
- 노재연, 「산사의 종소리」 전문
노재연 시인의 세 편 중에서 골라본 「산사의 종소리」는 고요한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통해 마음속 번뇌와 생각이 씻겨 나가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종소리’는 단순한 자연음이 아니라 내면을 깨우고 정화하는 정신적 울림으로 기능한다. 이 단시조는 종장을 3행으로 분절하였는데 의도적으로 의미와 운율에 변화를 주어 시조의 순도를 높이고 있음이 인지된다. 특히 청각적 이미지와 내면의 심리 변화를 연결한 점이 돋보이며, 짧은 작품이지만 산사의 정적과 종소리의 울림, 마음의 정화를 비교적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차분하고 절제된 관조적 어조의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공감각적 표현이다. “푸른 소리”에서는 소리를 색채인 ‘푸름’으로 표현하여 산사의 청정하고 맑은 분위기를 시각화했으며, 중장의 “적막을 흔들어 깨운”은 종소리를 의인화하여 정적을 깨뜨리는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 “세월의 숨을 적요 속에 뉘어 두니”에서는 지나온 삶의 무게를 ‘숨’으로 형상화하고 그것을 ‘적요’ 속에 눕힌다는 표현으로 매우 시적이다. 역시 ‘푸른 소리’와 ‘세월의 숨’은 이 작품을 단순한 풍경시에서 내면의 명상시로 끌어올리는 핵심 이미지이다.
나란히 일곱 남매 앞에 다 세워 놓고
엄마가 간곡하게 당부의 하시는 말
아무튼 오늘만큼은 정신 바짝 차려라
동그란 두 눈 크게 엄마 말 집중 하나
온 몸은 떨려오고 인간들 악귀 같네
오늘 꼭 우리의 목을 비틀어야 하는가
- 문병설, 「복날」 전문
「복날」은 복날을 앞둔 ‘개’의 시점에서 인간의 보신 문화를 낯설게 바라본 작품이다. 특히 첫수에서 평범한 가족의 대화처럼 시작했다가, 둘째 수에서 화자가 ‘개’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반전과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인간에게는 보양의 날이지만 개에게는 사망의 날이라는 시각의 전환이 작품의 핵심적인 힘이다. 인간에게는 ‘복날’ → 개에게는 ‘죽음의 날’이라는 핵심적인 소재의 대비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이 시조는 현실 비판적·풍자적·의인화적 성격이 강한 연시조다. 이 작품은 2수로 이루어졌으며, 상황 제시 → 정체와 갈등의 폭로로 전개된다. 제1수는 일곱 남매(암, 수)에게 엄마(어미 개)가 위기 상황을 당부하는 장면이고, 제2수는 그들이 ‘개’라는 게 드러나면서 인간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위기가 표출된다. 특히 제1수에서 화자의 정체를 숨긴 것이 상상을 유발하는 효과적인 서술 장치라고 판단된다.
이 시조의 어조가 제1수는 평범하고 담담하지만, 제2수에서는 급격히 공포와 항변의 어조로 변화한다. 따라서 이 작품 속의 정서는, 불안 → 공포 → 절박함 → 원망의 정서로 고조됨을 느끼게 되는데, 독자는 처음엔 상황을 관찰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개의 절실한 처지에 감정 이입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려야 저리도 청청할까,
비바람 눈보라가 일상의 풍류러니
황야에 몸을 눕힌 채 벽계수를 넘나드네
바늘잎 고추세워 청음을 드리운 채
사시절 지조의 빛 기꺼이 내뿜으며
솔 향기 바람에 풀어 가는 세월 낚는구려
천연에 둥지 틀고 순리를 따랐을 뿐
밤낮이 무엇인지, 계절이 무엇인지
모른다, 늘 푸른 청춘 만고의 철부지니
- 박무성, 「노송의 세월」 전문
「노송의 세월」은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소나무를 통해 지조와 초월적 생명력,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노래한 연시조다. 노송을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세월을 초월한 존재이자 인간이 본받을 정신적 표상으로 형상화한 점이 돋보인다.
이 시조는 자연친화적·교훈적·관조적·상징적인 시조로, 제1수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는 노송의 강인함, 제2수는 푸름과 솔 향기로 세월을 살아가는 노송의 지조, 제3수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승화 등이 요지로 파악되며, 전체의 점층적 구성이 외적 시련 → 내적 지조 → 초월적 생명관으로 확장됨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노송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송의 생태적 특성을 인간의 삶과 정신으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특히 “비바람 눈보라가 일상의 풍류”, “세월 낚는구려”, “만고의 철부지”는 작품의 개성과 문학적 여운을 살리는 표현이다.
아직은 철없는 소 코뚜레 이끌고 간
이리야 저리야로 고삐 당겨 치던 야단
슬슬슬 스스로 끄는 쟁기질 참 그립다
- 이광호, 「슬슬슬 스스로 끄는」 전문
이광호 시인의 단시조 「슬슬슬 스스로 끄는」은 어린 소가 사람의 힘에 이끌리던 모습과 훗날 스스로 쟁기를 끄는 모습을 대비하여, 성장과 자립의 의미를 해학적으로 담아낸 작품으로 우선 제목부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슬슬슬’의 움직임과 ‘스스로’의 자립을 결합하여 작품 전체를 압축하는가 하면, 특히 ‘이끌고 → 끌고 → 스스로 끄는’의 전개와 변화가 작품의 중심축으로, 반복되는 의성·의태어가 농촌의 생동감과 구수한 정서를 잘 살리고 있다. 짧지만 성장·자립·그리움이라는 주제가 선명하다.
이 작품은 ‘소가 스스로 쟁기를 끄는 모습’을 인간의 성장과 자립에 빗대어 읽을 수 있는 생활밀착형 시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제목과 종장의 “스스로”가 작품의 주제를 명확히 잡아주는 힘이 있다.
구성에 있어선 한 마리 소의 성장 과정을 미숙 → 훈련 → 자립의 3단계로 압축했다. 초장은 “철없는 소”를 이끌어 가던 모습, 중장은 고삐를 당기며 훈련시키던 모습, 종장은 스스로 쟁기를 끄는 성숙한 모습과 회상을 담고 있다. 특히 종장에서 “스스로”라는 말이 앞의 상황을 뒤집으며 작품의 핵심 의미를 완성하는 묘미가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반복어와 의성·의태어를 활용한 언어적 재미이다. “이리야 저리야”에서는 소를 몰아가는 농촌의 생생한 호령이 들리는 듯하다. “슬슬슬”은 쟁기가 막힘없이 나아가는 모습을 청각적·동작적 이미지로 표현한다. 또 “코뚜레–고삐–쟁기”로 이어지는 사물의 이미지도 농경 생활의 구체성을 잘 살린다.
또 “이끌고 / 고삐 당겨 / 스스로 끄는”이라는 동작의 변화가 소의 성장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좋은 표현적 장치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참 그립다”에서는 해학적인 분위기가 잔잔한 회고와 향수로 전환되는 여운을 감지하게 된다.
짙푸른 나뭇잎새
데크길 옆 자락에
곱게도 단장한 꽃
길손들 싱글벙글
이렇게
부르고 싶다
네 이름은 웃음 꽃.
- 이성범, 「웃음 꽃」 전문
「웃음 꽃」은 길가에 핀 꽃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피워내는 모습으로 연결한 밝고 따뜻한 작품이다. 7행 시조로 자연의 꽃과 사람의 웃음을 겹쳐 놓은 발상이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서정적·동심적·생활친화적인 성격의 시조로, 초장에서는 짙푸른 나뭇잎과 데크길의 풍경을 제시하며, 중장은 곱게 핀 꽃과 이를 보고 웃는 길손의 모습, 종장은 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는 화자의 정서적 결론이 담겨 있다. 풍경 → 사람의 반응 → 명명(命名)으로 전개되어 이해하기 쉽고 자연스럽다. 특히 ‘꽃’ → ‘웃음꽃’으로 의미가 확장되는 발상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밝고 친근하며 다정한 어조로, 기쁨, 사랑스러움, 순수함, 따뜻함은 이 시조의 중심 정서이다. “싱글벙글”, “웃음 꽃” 등의 표현이 작품 전체에 명랑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의 “네 이름은 웃음 꽃”이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안테나 뽑아 들고 교신을 하고 있다
풀지 못한 은어들이 가슴을 빻고 있다
찢어진 음보를 안고 영육으로 떨고 있다.
베갯잇 뒤척임에 꿈결마저 배회하는
뚝 끊긴 현 몇 줄 다시 조인 아픔으로
달빛도 조율이 되어 뼈속까지 저미는가.
불러도 닿지 않는 천년 부름, 저 부름
만 갈래 엉킨 시름 고를 찾는 물레 되어
수신도 답신도 없는 한 세월을 잦고 있다.
- 장지성, 「귀뚜리 노래」 전문
「귀뚜리 노래」는 애절한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인간의 단절된 소통과 그리움, 고독의 울음으로 확장한 상징적 작품이다. 귀뚜라미가 “교신”하고 “수신·답신”을 기다린다는 설정을 통해 닿지 않는 존재를 향한 오래된 부름을 형상화한 점이 돋보인다. 특히 ‘안테나–교신–수신–답신–조율’이라는 통신과 음악의 어휘를 귀뚜라미의 울음에 결합한 발상이 독창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귀뚜라미의 밤 울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인간의 고독과 그리움의 노래로 확장된다.
상징적·관념적·현대적인 성격의 연시조로, 세 수의 흐름이 비교적 뚜렷하다. 제1수는 교신을 시도하지만 풀리지 않는 말과 상처, 제2수는 밤의 고독과 끊어진 현을 다시 잇는 아픔, 제3수는 천년을 이어온 부름과 끝내 없는 응답이다. 즉 시조의 흐름이 소통의 시도 → 내면의 고통 → 영원한 기다림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 작품은 내면적이고 애상적인 어조로 고독, 그리움, 단절, 기다림, 상처가 중심을 이루며, 마지막에는 허무와 쓸쓸함으로 수렴한다. 서로 다른 의미 영역의 어휘 결합도 보이는데, 특히 “안테나 뽑아 들고 교신을 하고 있다”라는 귀뚜라미의 더듬이를 통신 안테나로 변환한 발상은 참신하다. 또한 “찢어진 음보”, “뚝 끊긴 현”, “달빛도 조율이 되어”는 귀뚜라미의 애절한 울음을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의 음악으로 바꾸어 놓는다. 마지막의 “수신도 답신도 없는”은 앞의 통신 이미지들을 회수하면서 작품 전체의 의미를 응축하는 효과적인 표현이다.
물비늘 갈바람에 일렁이며 반짝이고
햇살 비켜 하얀 윤기 갈대꽃 바람 일어
물총새 먹이 사냥에 물비늘이 흩어진다.
- 정순량, 「물비늘」 전문
정순량 시인이 발표한 네 편의 단시조 중에서 뽑은 「물비늘」은 갈바람과 햇살, 갈대, 물총새가 어우러진 강가의 한순간을 물비늘의 반짝임으로 포착한 자연 서정시조다. 이 작품은 물 위에 부서지는 햇살을 ‘비늘’로 보고, 갈대와 물총새까지 한 화면에 담아낸 수채화 같은 작품이다.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하고, 마지막에 물총새의 사냥 장면을 배치하여 정적인 풍경에 생동감과 순간적인 긴장을 부여한 점이 특출하며, 대상의 움직임을 관조하는 정신적 깊이(세밀함)가 느껴진다.
자연 서정적·감각적·관조적인 현대시조로, 하나의 풍경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포착한다. 초장은 갈바람에 일렁이는 물비늘, 중장은 햇살과 갈대꽃이 어우러지는 풍경, 종장에서는 물총새의 사냥으로 물비늘이 흩어지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즉, 정적인 풍경 → 생명의 움직임 → 순간의 변화로 전개되어 구성이 자연스럽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에 ‘물비늘’을 배치한 수미상관적 표현의 효과가 있다. 처음에는 반짝이던 물비늘이 마지막에는 흩어지면서 하나의 작은 풍경이 완성된다.
시리고 아름답던
그 세월 영嶺을 넘고
별들은 반짝이다
내 가슴에 떨어지니
내 영역 비켜서는 건
삶이라고 말해본다
운명에 속은 세월
어느덧 노을 지고
걸어온 인생 고비
더께만 살 깊은데
많은 것 놓쳐버리고
허공에다 마음 연다.
- 최규협, 「삶」 전문
「삶」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인생의 아름다움과 상실, 그리고 내려놓음의 의미를 성찰한 연시조다. 이 작품은 인생의 황혼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무엇을 얻었는가’보다 ‘무엇을 놓아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철학적, 회고적, 관조적 성격이 강하며, 구별 배행의 두 수가 명확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제1수는 지나온 세월과 삶에 대한 깨달음, 제2수에서는 인생의 황혼에서 상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여는 삶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과거의 회상 → 인생에 대한 성찰 → 내려놓음과 초월로 전개된다.
주된 표현 및 이미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제1수 초장 “시리고 아름답던 / 그 세월 영을 넘고”에서는 인생을 산을 넘는 여정으로 형상화했다. 이어서 중장 “별들은 반짝이다 / 내 가슴에 떨어지니”는 별을 내면에 떨어뜨려 삶의 추억과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제2수에서 “노을 지고”는 인생의 황혼을 자연스럽게 상징하고 있으며, “인생 고비 / 더께만 살 깊은데”는 삶의 굴곡이 켜켜이 쌓인 모습을 ‘더께’라는 촉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또 ‘영嶺을 넘고’, ‘별’, ‘노을’, ‘고비’, ‘더께’, ‘허공’ 등의 이미지가 삶의 여정을 자연의 풍경으로 치환하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의 “허공에다 마음 연다.”는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는 초월적 태도로 읽혀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연못의 물고기도 벗 불러 노니는 곳
자연에 묻혀 사는 벗님이 날 오라네
모처럼
찾아온 여유
해 지는 줄 모르고
뛰놀던 물고기가 달빛에 잠이 드니
휘영청 달빛 올라 주흥이 즐겁구나
세월을
잊는 여유로
우정 쌓는 고운 밤.
- 현광락, 「노년의 여유」 전문
「노년의 여유」는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가”보다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가 중요해지는 노년의 삶을 소박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자연 속에서 벗과 함께 시간을 잊고 우정을 나누는 노년의 소박한 행복을 따뜻하게 그린 연시조로서, 두 수 모두 초, 중장은 장별 배행을 취했고, 종장만은 특성을 살려 3행으로 분행하고 있다. 제1수는 벗을 찾아 자연 속에서 여유를 누리는 낮의 풍경, 제2수는 달빛 아래 술 마시며 우정을 다지는 밤을 노래하고 있다. 낮 → 밤, 물고기의 놀이 → 벗과의 흥취로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구성이 바람직하다. 일상을 초월한 높이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분위기이다. 연못, 물고기, 달빛, 벗이라는 친근한 소재를 통해 ‘바쁘게 살아온 뒤 찾아온 여유의 가치’를 보여준다. 특히 물고기의 움직임에서 달빛 아래의 정적인 밤으로 전환되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이상으로 시조 부문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시조는 정해진 형식이 지켜져야 함은 물론, 시인의 내적 체험과 상상력으로 의도하는 주제를 이미지화 시켜야만 한다. 간결한 언어의 정제미, 회화성과 음악성의 절묘한 배합과 함축미는 시조의 특성이기도 하다. 사실 정형의 한정된 규칙 속에 시인의 복잡한 감흥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은 시 부문으로 “시 창작의 기쁨”란에 50여 편의 시 작품이 실려있다.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에드가 알랜 포(Edgar Allan Poe, 1809~1849)는 “단시(短詩)만이 시라고 말하면서, 시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라고 시를 정의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과 연습이 필요하다. 첫째 많은 시를 읽어보아야 하고, 다음으론 감각에 집중하여 독자가 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이미지화하기, 그리고 주제와 감정의 연결, 언어의 간결성, 함축성, 음악성 갖추기, 일상에서 영감 찾기, 자신만의 목소리 찾기, 퇴고 작업 및 피드백 받기 등 갖추어야 할 사항들이 많다.
깊은 골 물소리는 옛사람을 부르고
천 년 바위는 구름을 벗 삼았네
세상 공명 한순간 꿈결과 같거늘
설악의 푸른 뜻은 날로 더욱 깊어라
암자 앞 솔바람은 경전을 읊고
계곡의 흰 물결은 선시(禪詩)를 적는데
나그네 잠시 와서 발길을 멈추니
산은 말이 없어도 도(道)를 일러 주네.
- 강병철, 「영시암에 기대어」 전문
시 「영시암에 기대어」는 설악산 ‘영시암’이라는 구체적 공간을 세속의 번잡함을 벗어나 도를 깨닫는 정신적 공간으로 승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영시암’의 자연 풍경을 통해 세속의 덧없음과 산중의 정신적 깊이, 무언의 가르침을 노래한 한시풍 자유시로 볼 수 있다. 특히 “솔바람은 경전을 읊고”, “계곡의 흰 물결은 선시를 적는데”에서는 자연을 곧 하나의 경전이자 시편으로 바라보는 발상이 돋보이며, 마지막의 “산은 말이 없어도 도(道)를 일러 주네”에서는 작품의 의미를 깔끔하게 수렴시키는 좋은 종결이라고 느껴진다.
4연 8행 구성의 이 시는 자연 풍경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 → 명상 → 깨달음으로 의미를 확장한 구조다.
주된 표현은 의인법으로 “물소리는 옛사람을 부르고”, “바위는 구름을 벗 삼았네”, “솔바람은 경전을 읊고”, “물결은 선시를 적는데”처럼 자연물에 인간의 행위를 부여했으며, 은유와 상징의 수법으로는 “솔바람”은 경전, “흰 물결”은 선시, “산”은 도(道)의 스승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특히 결미의 “산은 말이 없어도 도(道)를 일러 주네”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는 핵심 구절이다.
이 시의 어조는 차분하고 관조적이며 경건하고, 느껴지는 정서는 고요함, 초월감, 경외감, 무욕의 평온함이 중심을 이룬다. 격앙된 감정보다는 자연 속에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불교적, 선적 정서가 두드러진다.
행여나 빗물에서
무슨 맛이 날까만
가뭄 끝에 오는 비를
단비라 부른다.
사람들은 가끔씩
요행수를 바라는데
때로는 단비처럼
돈비를 고대한다.
돈비가 정녕 단비 되려나
설마 그렇더라도
삶에 가뭄 든 이들에게나
때맞춰 적당히 내려야 옳다.
기우지만 돈비가
폭탄비 아니기를 빈다
쩐폭탄 맞으면 백발백중
실성 아니면 장님 된다.
- 강성효, 「감우(甘雨)」 전문
이 작품은 풍자적·해학적·교훈적 성격이 강하며, 돈에 대한 욕망과 요행을 경계하고, 삶에 필요한 만큼의 재물과 행운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형상화한 시로, ‘비’와 ‘돈’을 연결한 발상이 기발하다. 어쩌면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돈과 욕망’이라는 주제를 ‘비’의 이미지와 해학으로 풀어낸 위트 있는 풍자시이다.
시상은 4연 구성으로, ① 단비의 의미 → ② 돈비에 대한 인간의 욕망 → ③ 적당한 재물의 필요성 → ④ 지나친 돈의 위험성이 점층적으로 전개되어, ‘단비 → 돈비 → 폭탄비’로 이어지는 어휘의 변주와 의미의 확장이 돋보인다.
어조는 익살스럽고 풍자적이며 다소 해학적인 바, “쩐폭탄 맞으면 백발백중 / 실성 아니면 장님 된다”에서는 과장법 표현과 해학을 통해 돈에 대한 인간의 맹목적 욕망을 강하게 꼬집는가 하면 ‘돈비’와 ‘쩐폭탄’ 같은 구어적 표현이 작품에 친근함과 익살을 더한다. 특히 마지막의 “실성 아니면 장님 된다”라는 표현은 다소 직설적이지만, 작품 전체의 해학적 분위기를 살리는 강한 마무리라고 생각된다.
부끄러울 것 없어
당당하게 드러냈지만
눈에 뜨이는 모습은
울퉁불퉁 보잘것없이
거칠어진 것들뿐입니다
파란 꿈이 노랗게 물들고
팽팽한 긴장이
후줄근한 늘어짐이 되어버린
그사이에 머물렀던 계절이
녹녹하지 않았겠지요
자신을 다 내어놓은 후
가치는
손아귀 안에서
깊은 향과 따뜻함으로 남겠지요
꿀과 어우러지는 섞임
모과 닮은 어머니의 손등
차 한잔 끓여 내시고
기뻐하시던 웃는 표정
가슴이 만나는 겨울 아침입니다
- 고정현, 「모과」 전문
이 작품은 울퉁불퉁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모과의 삶을 통해, 모진 세월을 견딘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 내면의 가치를 발견하는 작품이다. 모과와 어머니를 겹쳐 놓은 발상이 작품의 핵심이다. 특히 모과의 향기와 어머니의 손등을 연결한 발상이 이 시의 가장 아름답고도 참신한 이미지다.
1연은 모과의 외형, 2연은 성장과 쇠락의 시간, 3연은 겉모습을 넘어선 내면의 가치, 4연은 모과에서 어머니의 모습으로 의미 확장, 즉, 외형 → 시간 → 가치 → 어머니로 그 의미가 점층적으로 깊어지는 짜임이다.
주된 표현 및 이미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파란 꿈 ↔ 노랗게 물들고”, “팽팽한 긴장 ↔ 후줄근한 늘어짐” 등은 젊음에서 노년으로 가는 시간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대조적 이미지이며, “울퉁불퉁”, “거칠어진”, “손등”은 촉각적 이미지, “깊은 향”은 후각적 이미지, “꿀”, “차 한잔”, “따뜻함” 등은 미각과 온감의 이미지이다.
이 작품은 비유와 상징으로 시적 묘미를 잘 살리고 있으며, 탄탄한 구성과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개성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어쩜 떠날 줄 알면서도
단풍잎은 곱게 물든
그리움을 놓지 못합니다
색은 다 바랬어도
마음 사랑은 붉게 불탄다면서.....
파랗고 노랗고 그리고 붉게
태깔 고운 옷을 갈아입고 싶었던
가을꿈이었습니다
텅 빈 하늘을 맨발로 걸어
가을 모서리 한쪽 끌고 가는 나뭇잎들,
바람결에 미끄러지는 눈빛과
가을빛, 감성의 문장 되어
들녘을 흔들고 섰습니다
가을 출구를 감추고 나갈 수 없게
그 속에서만 살고 싶은 소망이었습니다
- 박고은, 「가을 꿈」 전문
이 「가을 꿈」은 가을의 단풍을 매개로 ‘떠남과 머묾’, ‘소멸과 사랑의 지속’이라는 삶의 보편적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다. 구어체(경어체)로 시상의 전개와 작품의 구조(통찰력, 긴장감, 영감)가 참신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색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을의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점이 독특하다. 단풍잎을 인간의 그리움과 사랑에 투영한 것이 중심적인 발상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가을 모서리 한쪽 끌고 가는 나뭇잎들”로, 나뭇잎의 낙하와 가을의 끝자락을 독창적인 공간 이미지로 바꾸어 놓은 점이다.
가을의 정취가 짙은 이 작품은 ① 떠남과 그리움 → ② 사랑의 지속 → ③ 가을의 꿈 → ④ 가을에 머물고 싶은 소망으로 전개되며, 후반으로 갈수록 단풍의 풍경이 화자의 내면적 소망으로 확장됨을 알 수 있다. 높고 맑은 시적 성취를 획득(비유와 상징, 성실성)하고 있다. 또 색채 이미지가 매우 두드러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파랗고 노랗고 그리고 붉게”, “태깔 고운 옷”에선 가을을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만들며, “단풍잎은 곱게 물든 / 그리움을 놓지 못합니다”, “가을 모서리 한쪽 끌고 가는 나뭇잎들”에서는 의인법 표현으로 자연물에 인간의 감정을 부여하기도 한다. 특히 “가을 모서리 한쪽 끌고 가는 나뭇잎들”은 추상적인 ‘가을’을 구체적인 공간적 이미지로 바꾼 참신한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연의 “바람결에 미끄러지는 눈빛과 / 가을빛, 감성의 문장”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언어적 이미지가 결합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꽃은 이유 없이 피고
바람은 갈 곳을 묻지 않는다.
구름도 머물다 흩어지고
강물은 말없이 바다로 간다.
사람은 자꾸
삶에 이름을 붙인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지나고 보면 모두
잠시 머문 바람뿐이었는데
잡으면 내 것인 줄 알았고
채우면 행복한 줄 알았다.
놓고 나서야 자유를 알고
비우고 나서야 나를 만났다.
삶이란 어쩌면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오늘답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나도 어느새 내 삶이 되어 있으리
그냥.
- 배원식, 「그냥」 전문
배 시인의 「그냥」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거창한 목적과 이유를 찾으려 애쓰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자연의 무위(無爲)와 인간의 집착을 대비시키면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노래한 철학적·관조적 서정시이다. 제목 「그냥」이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복잡한 삶의 진리를 쉬운 언어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자연의 흐름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집착과 깨달음, 그리고 ‘그냥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가는 구조가 자연스럽다. “잡으면 내 것인 줄 알았고 / 채우면 행복한 줄 알았다. / 놓고 나서야 자유를 알고 / 비우고 나서야 나를 만났다.”는 전반부의 자연 이미지가 인간의 내면적 깨달음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대목으로, 시적 메시지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흐름’과 ‘비움’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이다.
특히 「그냥」이라는 제목은 매우 적절하다. 이 한 단어가 작품의 무위·비움·수용·달관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의 “그냥.”과 제목이 서로 호응하면서, 긴 설명을 모두 내려놓는 듯한 여운을 만들어 작품의 정서를 매우 효과적으로 마무리한다. 이 시는 모색과 발견의 순발력으로 “붙잡으려 했던 삶을 놓아주면서 비로소 자기 삶을 발견하는, 담담한 달관의 시”라고 명명하고 싶다.
동그라미 그리다가
점 두 개 찍으니
그대의 눈이 되었어요
어쩌죠?
코 하나
입 하나만 그리면
영락없는 그대의 얼굴이
될 터인데
그래요
되었어요
별 하나둘 새어가던 중에
정말
그대를
그리었어요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했나
징표로 여기려니
보고 싶어요
그대가
정말.
- 안효만, 「그립습니다」 전문
시 「그립습니다」는 언어유희를 활용한 섬세한 표현과 시적 대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는 '그리다(Picture)'와 '그리다(Longing)'라는 단어의 유사성을 시적 모티브로 삼아, 직관적이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하는 순수한 서정시다.
얼굴을 그려나가다가 너무나 닮아가는 형상에 차마 완성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1연의 모습은 화자의 진실한 사랑을 매우 순박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별을 세는 적막한 밤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대를 그렸다'는 진술은 그림을 그린 행위인 동시에 그대를 간절히 사모했음을 뜻하는 이중적 표출로 승화된다. 화려한 기교나 과장된 수식 없이, 쉬운 언어와 조심스러운 어조만으로 그리움의 무게를 담백하게 담아낸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시는 서정적, 고백적, 감상적, 서사적(그림을 그리는 동작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감) 성격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림을 그리며 그대를 떠올리는 행위에서 시작하여, '그리다'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간절한 고백으로 마무리를 짓는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시각적·감각적 이미지인 동그라미, 점 두 개, 코, 입으로 이어지는 '얼굴 그리기'의 시각적 묘사와 '별을 세는 밤'의 정물적이고 아늑한 이미지가 대비되어 시적 분위기를 형상화한다. 시상 전환 및 연쇄법으로 1연의 "어쩌죠?"라는 의문형 어조에서 2연의 "그래요 / 되었어요"로 이어지는 혼잣말 형태의 구어체 구성이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내면 대화를 가깝게 느끼게 한다. 부드럽고 솔직하며 풋풋한 존댓말(경어체) 어조로 "어쩌죠?", "되었어요", "보고 싶어요"를 사용하고 있으며, 안타까움, 아련함, 등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한 순정이 발현되고 있다.
유월에
푸른 내음이 창을 넘나들고
하늘이 들려주는
고운 빗소리
그것이
그리움이던가
짙어가는
유월의 색으로
파랗게
피어나는 고운날이
빗물처럼 내린다
찻잔에
그리움을 그려넣는다
삶은
아름다운 풍경화이다
그 그림
내 인생 시간 위로
또 한 세월이 지나간다
- 유점순, 「그리움이던가」 전문
우선 「그리움이던가」라는 제목이 상상과 호기심을 유발한다. 유월이라는 계절적 배경과 '비'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일상의 작은 순간(창밖 풍경, 찻잔)을 한 편의 아름다운 인생 스케치로 담아낸 감성적인 서정시이다. 이 작품에서 일상을 예리한 직관과 통찰력으로 함축적 의미를 부여하는 순도 높은 서정을 만나게 된다. 1연에서 감각적인 자연의 기운을 통해 그리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2연에서 찻잔을 매개로 삶을 '풍경화'에 비유하며 시상을 한층 깊게 발전시킨다. 마지막 3연에서는 "인생 시간 위로 또 한세월이 지나간다"라는 담담한 수용을 통해 그리움을 단순한 슬픔이나 그리움에 그치지 않고, 삶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관조적 시선으로 마무리 짓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단정하고 고운 시어들이 모여 독자로 하여금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비를 바라보는 듯한 평온함과 잔잔한 여운을 전해준다. 전체 세 연 구성의 자유시가 자연 풍경(1연)에서 마음의 서정(2연), 그리고 삶과 세월에 대한 성찰(3연)로 시상이 확장되는 추상화·관조의 짜임이다.
"푸른 내음", "유월의 색", "파랗게 피어나는"을 통해 여름의 싱그러움과 시각적·후각적 청량감을 환기하며, "고운 빗소리"를 통해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삶은 아름다운 풍경화이다"라는 은유를 통해 자연과 일상의 서정을 시인의 인생관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공감각적·추상적 수사법으로 '그리움'이라는 추상적 감정을 찻잔에 그려 넣거나 빗물처럼 내리는 '고운 날'로 형상화하여 시각화하는 묘미를 맛보게 한다.
갈잎에 맺힌 이슬은
사랑을 말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새벽 햇살 머금은 눈망울이네.
아니 내 생애를 에이는 영롱한 그리움이네.
세월 아리도록 그리워
바스락거리는 갈바람이 나는 아파라.
아파라
- 정순영, 「갈잎에 맺힌 그리움」 전문
이 시는 가을철 흔히 볼 수 있는 '갈잎의 이슬'이라는 직관적인 소재를 활용하여, 언어로 다 전하지 못한 차마 마른 눈물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뛰어난 서정시이다.
특히 맑고 투명한 '이슬'을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사랑을 말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눈망울'로 승화시킨 대목은 시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청각적 자극(바스락거리는 소리)이 화자의 신체적·정신적 통증('나는 아파라')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우며, 마지막 "아파라"의 영탄적 마무리를 통해 가슴 깊은 곳의 그리움을 울림 있게 전달하고 있다.
6행의 짧은 시로, 외부 경물 관찰에서 출발하여 화자의 내면적 고통으로 시선이 이동되는 선경 후정(先景後情)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1~3행에서는 갈잎에 맺힌 이슬을 관찰하며 느껴지는 감정적 비유 (경물 및 비유)가 나타나 있고, 4~6행에선 세월의 흐름과 갈바람 소리 속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고통의 고조(내면 정서)를 인지할 수 있다.
'이슬'을 '사랑을 말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눈망울'과 '생애를 에이는 영롱한 그리움'으로 다층 비유하여, 이슬이 가진 맑으면서도 슬픈 특성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새벽 햇살 머금은 눈망울'의 시각적 이미지와 갈바람이 '바스락거리는' 청각적 이미지가 결합하여 가을 특유의 쓸쓸함을 효과적으로 자극하는 경지이다. 마지막 행에서 반복과 변주로 '아파라'를 독립시켜 단독 행으로 배치함으로써 체념과 애절한 고통의 여운을 극대화하고 있다. 자탄적이고 애절한 독백조의 어조로, 이별로 인한 상실감, 세월의 무상함, 가슴을 비벼 파고드는 깊은 고독과 그리움을 담고 있는 가편이다.
내 하늘에서
별빛이
창가에
내려와
잠든 추억
깨워놓고
말없이 웃고 간다
- 조영두, 「별빛과 그리움」 전문
「별빛과 그리움」은 짧은 분량으로 서정 시학의 미덕인 '절제'와 '여운'을 훌륭하게 살려낸 시이다. 읽고 또 읽어도 자꾸만 읽고 싶은 단시(短詩)이다. 밤하늘의 별빛이 창가로 내려와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고 다시 떠나가는 순간을 조용하고 아름다운 정경으로 포착했다.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고 의인화된 별빛의 조용한 미소로 마무리 지어,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아련한 추억을 반추해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이다. 특히 '별빛'이라는 천상적 소재와 '창가'라는 지상·개인적 공간을 결합하여, 아련한 기억의 환기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는 점에 방점을 찍는다.
단형시로, 매우 긴밀하고 절제된 연쇄 구조를 취하며, 1연~2연은 공간적 배경 제시 및 별빛의 하강 (내 하늘 → 창가), 3연~4연에서는 추억의 환기와 별빛의 의인화된 행위(잠든 추억 → 웃고 간다)를 그려주고 있다. 별빛을 단순히 빛나는 현상이 아니라 창가로 찾아와 추억을 깨우고 미소 짓는 인격체로 의인화하여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는가 하면, 멀리 있는 '내 하늘'에서 개인의 공간인 '창가'로 시선이 축소되며, 고요한 밤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잘 구현했다. 뿐만 아니라 절제된 시어로 불필요한 수식어를 배제하고 핵심적인 체언과 동사 위주로 배치하여 여운을 극대화하면서, 특히 추억을 깨우고 떠나는 상황임에도 슬픔이나 격정으로 치닫지 않고, “말없이 웃고 간다”처럼 담담하고 여운이 남는 정조를 유지하는 특징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상으로 시조와 시 부문에서 20여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절제와 함축으로 승화된 다채로운 문학성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작자의 최고 기량이 발휘된 대부분의 작품들엔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담고 있었고, 감정의 절제와 질서화를 기하면서 고도의 상징과 은유의 묘미를 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에 만족할 수는 없다. 우리는 보다 발전적, 진취적으로 전진을 꾀하는 문화강국의 문인로서 명작을 탄생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 독자들의 흉금을 울리는 작품은 세상의 사랑을 받으며 오래오래 빛으로 남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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