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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여러 모습 (3)
경계선을 넘어가시는 예수
요한복음 4장 3-26.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경계선을 넘어가시는 예수’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에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말이지요. 경상도 말로 하면 ‘저거 끼리’ 모인다. 전라도 말로 하면 거시기끼리 모인다. 요즘 쓰는 말로는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인다. 영어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무리를 짓는다.’
왜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려고 할까요? 그게 편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나이, 삶의 경험, 취미, 문화 수준이 비슷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기분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각종 동우회가 생깁니다.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은 낚시 동우회로 모이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악 동우회로 모입니다. 언젠가 저희 집에서 가까운 공원을 갔더니 마침 마티즈 차주 동우회가 모이고 있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이 아니라 빨간 마티즈, 파란 마티즈, 울긋불긋한 마티즈 등 하여튼 마티즈가 한 20대 정도 쭉 주차해 있는데 정말 볼만 하였다. 이 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마티즈 소유자. 비슷한 사람끼리 있으면 편안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우리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불편해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피하려 한다. 다른 것에 대해 경계선을 긋습니다. 성에 따라 경계선을 긋고, 인종에 따라 경계선을 긋고, 사회적 지위와 신분 따라 경계선을 긋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킵니다. 선 저 쪽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 가까이 해서는 안될 사람들, 더 나아가 그들을 범죄자, 장애인, 문제아로 만듭니다. 이 선을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들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을 처벌하고, 때로는 전쟁까지 일으킵니다.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보수냐 진보냐로 나누어 싸운다. 실제로 인류 역사는 이런 경계선 긋기의 역사였습니다.
이처럼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여서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끊임없이 줄을 긋는 모습을 우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언젠가 대구를 갔더니 앞산이란 산이 있었다. 산이 바로 눈앞에 있어서 앞산이다. 이 이름 보고 참 대구 사람들이 오랫동안 자기들 끼리 살아왔구나 생각했다. 지금 나에게는 눈앞에 있으니까 앞산이지만 산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뒷산일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옆산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에게는 앞에 있는 산이니까 앞산. 자기중심주의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대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가 지금 김해 내동이란 곳에 산다. 그런데 내동 옆에는 외동이 있다. 내동- 안쪽의 동네, 외동- 바깥쪽의 동네. 그런데 안과 바깥의 기준을 누가 세웠는가? 이쪽에서 보니 순서가 내동 외동, 그런데 저 쪽에서 보면 이제 여기가 내동, 다음이 외동. 기준이 바뀌게 되면 다 바뀐다.
그러나 어쨌든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을 세워놓고 살아왔다. 그리고 이 기준에 안 맞는다 하여 저쪽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공격해왔다. 저 선을 넘어가면 안 돼. 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야. 위험해. 낯설어. 우리를 해칠 수 있어. 그러면서 서로 선을 긋고 지내왔고 그러다가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고 한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하지만 때로 이런 경계선을 넘어가려고 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넘어 섰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상한 사람이 그 쪽에 있는 줄 알았는데 가보니 그냥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 성은 달라도, 피부 빛깔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사회적 신분은 달라도 결국 모두 같은 인간이다. 나와 똑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은 사람.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친구가 된다.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실상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용기를 내어 경계선을 넘어가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임을 보여준 사람들 덕분에 발전해 왔습니다.
존 하워드 그래핀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백인으로 인종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미국 남부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갑자기 눈이 안 보이는 고통을 몇 년 당한 다음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흑인들과 친구가 됩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된 흑인들은 ‘아무리 그래도 너는 백인이다. 너는 흑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하였고 이 말에 그는 백인이란 경계선을 넘어 흑인으로 살아보기로 결심합니다. 1959년의 어느 날 그는 피부과 의사의 도움으로 피부의 색소를 검게 만드는 약을 먹고 또 햇볕에 잔뜩 태웠다. 머리카락도 흑인처럼 만들었다. 마침내 그는 완전히 흑인처럼 되어 50일 동안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를 흑인이 되어 여행하였다. 그런데 그가 단지 피부 빛깔만 바꾸었을 뿐인데 그의 삶은 너무나 달라졌다. 어디를 가도 그는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도, 버스를 타도, 관공서를 들러도 그는 무시와 차별을 받았다. 그것은 무서운 공포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흑인이 된 순간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한 순간에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나를 비웃는 백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는 이 경험을 담아 책으로 내었다. 그 책 제목이 "Black Like Me(나와 같은 흑인)"이다. 그가 당한 차별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 책이 나오자 그는 KKK 같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몇 차례 공격을 받았고 한 번은 거의 목 졸려 죽을 뻔하였다. 그리고 그가 60세 되던 해 죽었을 때 그의 사인 한 가지는 피부암이었다. 곧 과도하게 피부 빛깔을 바꾸려는 시도로 인해 그는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 때문에 사람들이 굳이 숨기고 싶어 하였던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이것이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중심한 흑인 민권 운동을 일으킨 촉발제의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재선까지 하게 한 데는, 미국의 흑인의 인권이 그나마 조금 나아진 것에는 이처럼 경계선을 넘어가 보려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야 말로 경계선을 넘어 가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경계선을 넘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말씀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전도 여행 중에 사마리아 마을의 한 우물가에 앉아 지친 몸을 쉬고 있는데 저 쪽에서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고 곧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신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문화에서 예수님과 이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는 당시 문화에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인종의 경계선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래 같은 민족이었다. 하지만 주전 722년 아시리아가 쳐들어와서 그 땅에 쓸모 있는 사람들을 약 27000 여명 끌고 가고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만 그 땅에 남았습니다. 그 빈자리를 아시리아 사람 3 만 명으로 채웠다. 이들이 어울려 살다보니 결국 피가 섞였다. 그 후예가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이 일 때문에 남쪽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자신들의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취급 했다. 이들 사이의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서로 만나려 하지 않았다.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유대 땅으로 가려면 4 시간만 걸으면 되지만 유대인들은 그 땅에 발을 디뎌 놓기 싫어서 10 시간이 넘는 길을 빙 돌아갔다.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이 그 땅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들어오면 돌팔매질을 하였다. 깊은 원수 사이였습니다.
둘째로 남자와 여자라는 경계선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남녀 사이는 대단히 엄격 했습니다. 남자들은 길거리를 다닐 때 남의 여자를 보거나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여자들 역시 길거리를 남자를 쳐다보아서 안 되었습니다. 아니 아예 남자들이 볼 수 없게 얼굴에 베일을 썼습니다. 집에서도 맨 얼굴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남편과 자식뿐이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깊은 간격, 차별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유대 종교 지도자와 버려진 여인이라는 경계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유대인 랍비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오늘 말씀에 보면 이전에 남편 다섯과 살았고 지금도 어떤 남자와 사는 데 정식으로 혼인한 남자는 아니다.
이 여인이 방탕한 여인, 남자관계가 화려한 바람둥이라고는 생각지 말자. 당시 사회는 철저히 남성 중심사회였다. 여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없다면 결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리고 결혼 생활이 힘들어도 여자들은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고 남자들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자랑 살다가 버림받고, 굶어 죽을 수 없으니까 또 어떤 남자 만나서 살고 그러다가 다시 버림받고... 이렇게 남자 다섯과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정식 혼인도 못한 채 어떤 남자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 그러니 어땠을까? 남자라면 지긋지긋 하다. 남자라면 신물이 난다. 그렇지만 남자를 떠나 살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 낯선 남자가 물을 달라고 하면서 말을 건넨다. 그 때 이 여인은 무얼 생각했을까? “아니 이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사람이며 여자인 나에게 말을 거네? 도대체 나에게 무얼 원하는 것이지? 뭔가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이러는 것 아니야?
그러니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있었습니다. 인종의 벽, 신분의 벽,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에서 오는 깊은 벽.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벽을 뛰어 넘으신다. 예수님은 “나에게 물 좀 주시오”라고 부탁한다. 자신을 낯춘다. 그렇게 함으로서 경계선을 넘어서 찾아오십니다. 낮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물은 생명처럼 소중합니다. 그래서 나누어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물을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더 이상 적이 아니고 이제부터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도와주고 격려하는 친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은 ‘나와 친구가 됩시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인생길을 같이 걷는 친구가 됩시다.’는 초청이었다. 그러니 여인이 놀라고 충격 받는 것은 당연했다. “당신은 유대인이자 남자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인이자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녀의 깊은 외로움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낮 12 시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왜 시원한 아침과 저녁 시간 아닌 햇볕이 가장 뜨거운 이 시간에 왔을까요?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남편 다섯과 살았으나 삶에 만족이 없었던 여인, 지금 있는 남자 역시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사람. 이로 인해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고 있는 여인. 미래가 불안하고 불투명 한 사람. 그래서 사람들 낯을 피해 외로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정오에 살짝 물을 길으러 온 여인입니다.
. . 그러니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이 그저 물 뿐이었을까요? 그녀에게는 다른 물이 필요 했습니다. 삶의 안정이라는 물, 사람들의 존중과 사랑이라는 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라는 물, 무엇보다 인생에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소망의 물이 필요하였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보셨습니다. 이 여인의 처지가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물 좀 주시오”라고 경계를 가로질러 가십니다. 곧 내가 당신이 정말 깊이 원하는 삶의 안정이란 물을 주겠습니다. 자존감이란 물을 주겠습니다. 인생의 소망이란 물을 주겠습니다 하며 먼저 말을 건네신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경계선을 허물어버리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우리에게도 이런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겉보기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우리 역시 비슷하다. 이 여인처럼 우리에게는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가 있지 않습니까? 남이 알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의 고통과 죄책은 없습니까? 지나온 삶을 보면서 잘 살았다는 생각은 별로 없고 돌아보면 삶이 참 허망하고 암담하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안정된 삶이라는 물, 사람들의 존중과 사랑이라는 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라는 물, 무엇보다 인생에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소망의 물이 필요하다.
정호승 시인이 쓴 시에 ‘산산조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순간 접촉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 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이 시를 읽으면서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산산조각 난 인생.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금이 가고 깨어진 인생 숨이 차고 눈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걸어가야 하는 인생.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오신다. 끊임없이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우리를 친구 삼으신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평안은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이 여인도 마찬가지이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에게 생명의 물을 주겠다는 말씀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었다. 그러자 그녀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런 경계 넘어가기를 해야 한다는 것.
28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갑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합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보라. 이 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 왔던 바로 그 그리스도가 아닌가?”
예수께서 먼저 경계를 넘어 가서 만나주시자 이제 그녀 역시 경계선을 넘어간다. 자기가 살아온 삶을 다 아는 마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싫어서 끊임없이 피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 이제 주도적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간다. 진실로 예수를 만나고 나니 이제 경계선을 건너간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보라. 이 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 왔던 바로 그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다.
우리 삶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갈수록 사는 것이 팍팍하다고 한다. 불황이라고 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움추러 든다. 그나마 있는 것이라도 지키려고 한다. 경계선을 치고 넘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아기자기’란 말이 있다. 누군가 그 뜻이 아기랑 자기랑 사는 것이 아기자기란다. 그런데 그렇게 가족끼리만 살 때 행복할까요? 당장은 편하고 좋을지 몰라도 그게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은 못된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요즘 날씨가 추운데 추위를 이기는 방법, 따뜻하게 지내는 길은 혼자 따뜻한 곳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친구 되는 것이다. 서로 만나고 서로 몸을 안아주는 것이다.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번 주 교회 밴드에 감동적인 글이 하나 올라왔다. 한 번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엔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숫집이 있습니다.
달랑 탁자 4개뿐인 집입니다. 주인 할머니는 25년을 한결같이 연탄불로 진하게 멸치 다시국물을 우려내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이 넘게 국수값을 2천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달라는대로 무한리필입니다. 몇 년 전에 이 집이 SBS TV에 소개된 뒤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연을 말했습니다.
“15년전 저는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고 아내까지 저를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용산역 앞을 배회하던 저는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구걸했죠. 그러나 구걸하는 식당마다 저를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잔뜩 독이 올라 식당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국수집에까지 가게 된 저는 분노에 찬 모습으로 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할머니가 갖다 준 국수를 허겁지겁 다 먹어갈 무렵 할머니는 국수 그릇을 나꿔채더니 국물과 국수를 다시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그걸 다 먹고 난 저는 국수 값 낼 돈이 없으니 냅다 도망 치고 말았습니다. 가게문을 뒤따라 나온 할머니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냥 걸어가, 뛰지 말고, 그러다 다쳐, 괜찮아~!”
도망가던 그 남자는 그 배려 깊은 할머니 말에 몇 발치를 더 뛰어가 한적한 곳에 그만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파라과이에서 자리잡은 그는 한 방송사에 전화를 하면서 이 사연을 말함으로 이 할머니의 얘기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할머니가 국수값을 받는 것이 맞지만 사랑으로 그냥 보내었다. 할머니가 먼저 사랑으로 경계선을 넘어간 것이다.
조금 더 사연이 있다. 이 할머니가 국수집을 하게 된 것은 남편을 병으로 먼저 보내고 국수 팔아 아들 딸 4 남매 키웠는데 그 중 국수 가게에서 일하던 아들이 심장 마비로 먼저 세상을 떠났던 것. 할머니는 너무 상심에 빠져서 가게문을 무려 넉 달을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문에 이런 쪽지가 붙었습니다.
* "박중령입니다. 어제 가게에 갔는데 문이 잠겨 있더군요. 댁에도 안계셔서 쪽지 남기고 갑니다. 제발 가게문 열어주십시오. 어머님 국수 맛있게 먹고, 군대 생활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끓여준 국수 계속 먹고 싶습니다. 어머님 힘내세요. 옛날처럼 웃고 살아요. 가게 문 제발 열어주세요".
이런 편지가 어떤 날은 석장, 어떤 날은 넉 장 계속 붙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내시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쪽지로 힘을 얻은 할머니는 그제서야 다시 국수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가게는 이제 국민의 국수집으로 불리워집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배려와 사랑의 다싯물을 밤새 우려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인가? 그 가게 손님들이 경계선을 넘어간 것. 그냥 있어도 되지요. 아 국수집이 문을 닫았나 보다 해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 가슴 아픈 사연 듣고 경계선 넘어선 것. 이렇게 하여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넘어서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먼저 넘어와 주셨으니 우리도 같이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올 한 해 내가 넘어가야 할 경계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어쩌면 가정에서 남편이 내가 넘어가서 만나야 하는 사람일 수 있다. 자식이 내가 넘어가서 만나야 하는 사람일 수 있다. 직장에 있을 수 있다.
교회적으로도 있다. 교인들 가운데 그 동안 별로 대화 못했던 사람들 경계선 넘어가보자. 특히 목장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서 그렇게 해보자. 또한 지난 주 우리 교회에서 하고 있는 두레 공부방, 노인 나눔터, 반찬 나눔 사업 소개했다. 우리 교인들 다들 어렵지만 많이 돕고 있다. 아직 안 하는 분들 오늘 예배 마치고 단돈 5000 원이라도 매달 후원 약정하기 바란다. 그것 역시 경계선 넘어가는 일이다.
이런 힘들이 모일 때 이 힘들다고, 각박하다고 말하는 세상도 바뀐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모습 나타난다. 좁은 세상 이론 이란 것이 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여섯 단계 거치면 다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국 뿐 아니라 저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사람도 여섯 단계만 거치면 다 연결된다고 한다. 원래 이 말은 1929년 헝가리의 소설가인 프리제시 커린터 라는 이가 ‘전부 다른 세상’이란 단편 소설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 뒤 여러 연구들이 이를 입증해 왔다. 가장 최근에는 2007년에 컴퓨터 과학자 두 명이 전세계 1억 8천만명 사이에 오간 메신저 300 억 건을 조사해서 전 세계의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거저 6.6 단계만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 결국 내가 경계선을 넘어서는 삶을 계속 살기만 하면 내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살만한 세상, 좀 더 사랑하는 세상, 좀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세상. 그러기 위해 경계선 넘어가자. 힘써 넘어가자. 우선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넘어가자. 올 한 해 이런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