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진 스포츠 칼럼]
No need for speed
제프 갤러웨이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눈가의 선한 주름을 지었다. 그리고 조근 조근 과거를 회상했다.
“내게 가장 소중한 마라톤은 가장 천천히 달렸던 때라네. 1996년 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아버지와 함께 달렸지. 그 때 내 기록이 얼마인지 아는가? 그래…...무려 5시간 59분 48초였다네. 그 때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시곤 했지. ‘내 아들이 그토록 천천히 달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훨씬 빨리 달렸을 거야.’라고.”
천천히 달려라. 속력을 낸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이 말처럼 나 같은 펭귄 형 런너들에게 반가운 얘기도 드물 것이다. 국내외 세계적인 마라토너들이란 태생학적으로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의 탁월한 선수들이라면 황영조 선수라든가 이봉주 선수 등을 들 수 있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명실상부한 케냐의 기라성 같은 선수 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나와는 소원한 존재들이고 내 내면의 침잠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루는 대상들은 아니다. 가령 피셔 씨라든지 존 빙햄, 혹은 하루키 같은 말하자면 이웃 아저씨 같은 존재들이 나의 작은 우상들이다. 그들처럼 달리기를 통해 일상의 변화된 삶 속에서 생활 속의 작은 혁명을 일으켜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로드를 달릴 때 가끔씩 빠르게 걷는 워킹맨들 보다 늦을 때가 부지기수이고, 그럴 때마다 원초적인 회의감과 분노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저들 보다 느리게 달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음 수순은 나의 감정을 파괴하고 오버페이스를 저지르게 된다.
달린다(run)는 단어에는 속도(speed)라는 이면의 속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만을 신봉한 채 감정을 폭발시켜갈 때 자신의 내면에는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이 일고, 즐거움의 도파민은 파괴되었으며 심지어 상대방과의 비교감이 주는 괴로움을 맛보곤 했다.
상당히 오래 전 일이다. 나는 그 어느 해 봄 날 모 제약회사 영업부 소장의 완장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부서 내의 직원 한 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침 마땅한 후임자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퇴직하는 직원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거래처를 동행 방문하여 임시 인계인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동행 방문처의 로비에는 온통 마라톤 완주 장면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본인이 완주했음을 무언으로 과시하는 자기 표시였다.
나는 그 이튿날부터 그가 소속한 마라톤 클럽의 당당한 신입회원이 되었다. 말하자면 고객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일종의 동조적인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주말의 훈련 첫 날 대모산 크로스컨트리가 시작되었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참가자 전원이 대모산 입구에서부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때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마침 내 앞에는 가냘픈 몸매에 얼굴이 예쁘기도 하지만 상냥한 태도로 우호적인 여인이 사뿐사뿐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남성이라는 체력적 정신적 우월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멈출 수 없는 가속력의 충동을 작동시켰다. 뭔가를 보여주리라!
산세는 완만함에서 차츰 오름세로 가파라졌다. 그때 나는 갑작스러운 신체 상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순간은 잠깐이고 이내 비탈에 쌓인 낙엽 위에 아침에 먹은 에너지원들을 고스란히 토해버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된 나의 눈동자에 아련히 보이는 것은 그 몸맵시 날렵한 청조한 여인의 엉덩이 뿐이었다. 그 여인의 엉덩이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보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바보야, 문제는 속도가 아니야. 천천히 꾸준히 한발 두발 네 페이스를 지키는 거야. 그래야 목표점까지 도달할 수가 있지.”
Slow & Steady wins the RACE!
일상 속의 런너들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달리 뛰어난 황영조가 몇시간을 달렸던 봉달이가 어떻게 달리던 그들의 기록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의 정화와 그에 따른 신체의 긍정적인 변화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적어도 걷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주어진 거리, 주어진 과제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각오.
우리의 삶도 달리는 길이다.
Slow & Steady
느린 마라톤맨 김이진
- 수필가🐧동화작가
- 계간 자유문학 추천
첫댓글 천천히 달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