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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유포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입니다.
정감록(鄭鑑錄)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로 "송하비결"과 "격암유록"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예언서로 꼽히고 있다. 실존 여부를 알 수 없는 이심(李沁)과 정감(鄭鑑)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풍수 사상과 도참 신앙이 합쳐져 이루어진 난해한 책으로, 국가 운명과 생민 존망(生民存亡)에 대한 판단을 담고 있다.
개설
조선의 선조(先祖)인 이심(李沁)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大興者)가 될 정씨(鄭氏)의 조상인 정감(鄭鑑)이란 사람과 금강산(金剛山) 비로대(飛蘆臺)에서 서로 문답(問答)을 기록한 책이라고 하며, 이후의 조선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추수(推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몇 백 년이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趙氏)의 가야산 몇 백 년, 또 그 다음에는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 년과 왕씨의 어디 몇 백 년 등등으로 계승될 것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어떠한 화변이 있어 세태민심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오늘날 세간에 통행되고 있는 《정감록》은 이 양인(兩人)의 문답 외에 도선(道銑)·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서산대사(西山大師)·서계(西溪) ·정북창(鄭北窓) ·두사총(杜師聰)등의 예언서에서 발췌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정감·이심·양인이 실존인물이라 할 증거는 없으며, 문헌상으로는 1785년(정조 9)의 홍복영(洪福榮)의 옥사(獄事)에서 《정감록》이란 책에 대한 언급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사한 이야기로는, 선조(宣祖) 때 정여립의 역모에 대한 설명에서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참설이 이전부터 떠돌았음이 언급되었다.[1], 인조(仁祖) 6년 1월 3일 ‘草溪潮入, 鷄龍建都。朝鮮皆着毛笠、毛衣’허유 역모사건을 진압하여 관련자를 국문하고 처벌하는 내용에서 ‘초계(草溪)에 조수(潮水)가 들어오고 계룡(鷄龍)에 서울을 건립하는데 조선 사람들이 모두 벙거지를 쓰고 털옷을 입는다.’는 《인조실록》18권, 6번째 기사가 있고,
이후 발생한 혁명운동에 정씨와 계룡산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는 미래국토(未來國土)의 희망적 표상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과 임진·병자의 양란(兩亂), 그리고 이에 따르는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에 대한 민중의 신뢰심이 극도로 박약해지고, 장래에 대한 암담한 심정을 이기지 못할 즈음에 당시의 애국자가 민중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기 위하여 이씨가 결딴나도 다음에 정씨도 있고, 조씨·범씨·왕씨도 있어서 우리 민족의 생명은 영원토록 불멸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민중들의 묵시적 상상력
미래의 이상적 주권자(主權者)가 나올 지기(地氣)를 예측하는 점에서 현재 질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에게 폭력으로 눌려사는 민중의 메시아 사상 즉, 세상을 구원할 존재의 강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민중들은 지배계급들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거나 구원자의 도래를 기다리는 종교적 상상력으로 극복하려고 하는데[3], 조선의 민중들은 정감록과 미륵신앙으로 지배계급의 무능과 폭력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는 정감록 신앙이 갖고 있는 현실변혁적인 능력에 두려움을 느껴 정감록을 소지하기만 해도 구속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의의 및 영향
정감록에 암시된 계룡산(鷄龍山)의 신도안(新都內)은 오늘날 신흥종교에 깃든 대망(待望)사상과 결부되어 작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신도(新都)신앙·진인(眞人)신앙·10승지(十勝地)신앙 등이다.
정감록은 ① 기존체제 비판과 새시대 예언의 전거(典據)로 내세워졌고, ② 피압박 민족의 말세적 구원신앙으로 발전하여 많은 신흥종교의 연원이 되었으며, ③ 재난이 있을 때마다 자기들과 관련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비결로 삼았고 신도 천도설이 유언비어로 나돌게 될 때가 있었으며, ④ 조선 왕조를 비판하는 서민 대중의 소박한 혁명 종교로 발전하여 동학 혁명에까지 연결되었고, ⑤ 정치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조선정감록 10승지 소개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 마을
노스트라다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처럼, 우리나라에도 조선
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내려온 대표적인 예언 서로 '정감록'이 있다.
이 예언서는 이(異本)이 40~60권에 이를 정도로 많은 것이 특징인데, 저자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을 뿐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고, 반 왕조적인 내용이 많아 조선시대에는 주로 금서에 속했다.
하지만 이런 예언서는 민간에 은밀히 전승되어 조선시대 민간 사회를 평가하는데 꼭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정감록’에는 '십승지'라고 하는 땅이 기록되어 있는데, 십승지는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열 곳의 피난처를 의미한다.
당시 왜구나 오랑캐의 잦은 침략으로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십승지의 존재는 살고 싶은 명소였고, 실제로 십승지를 찾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근래에는 6. 25 전쟁 때 북쪽에 살던 이들이 십승지를 찾아와
정감록촌을 이루고 살기 시작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들도 있다.
현재 이 십승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로 꼽히고 있다.
이본(異本)마다 조금씩 다른 십승지가 기록되기도 했지만, 남사고가 남긴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 나타난 십승지를 만나보자.
[목차]
1.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금계마을)
2. 경상북도 봉화시 춘양
3.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4. 전라북도 남원 운봉
5. 경상북도 예천 금당실
6. 충천남도 공주시 유구읍, 마곡
7.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
8.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
9.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10.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1.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마을)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길 사이다"
경북 영주의 풍기는 십승지 중 1번지라고 불린다.
그 중에서도 금계(금이 박힌 닭 모습)바위가 있는 금계리는 안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살기(殺氣)가 없어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고 한 소백산의 줄기에 위치한 이 금계마을은 유난히 정감록촌이 잘 형성되어 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장승을 세워 '정감록 십승지 마을'임을 알리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한국전쟁 중에 정감록 책 하나만 믿고 이북에서 피란온 이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이제 노인이 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이 소백산 죽령을 넘지 못해 풍기 주민들은 전쟁통에도 평온하게 지냈다고 한다.
경북 영주 근방에 함께 다녀오면 좋을 곳으로 우선 소백산이 있다.
충북 단양, 강원 영월, 봉화 등에 걸쳐 위치한 소백산 국립공원은 사시사철 언제 찾아도 좋은 산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문화생태탐방로 중에 하나인 소백산 자락길 12자락 코스로 등산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도 있다. 11자락길과 연계하여 찾아가면 좋다.
그 외에도 죽령 옛길, 희방사, 소수서원과 선비촌, 무섬마을 등은 영주 풍기와 함께 다녀가면 좋은 곳이다.
특산물로는 풍기인삼과 영주사과가 유명하며 영주한우도 부드러운 육질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외부에서 정착한 이들이 생업을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 풍기 인견(천연 섬유)도 유명하다.
2. 경상북도 봉화시 춘양면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이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간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일가가 은둔했던 땅으로 유명한 경북 봉화 춘양에 위치한 도심촌은 이순신 장군이 은둔했다는 설도 있는 곳이다.
임란 당시 선조에 의해 극형을 당할 뻔하기도 했던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승리한 후 정치적 역풍을 우려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한 다음 이 곳에 은둔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고, 실제로는 서애 류성용 선생의 친형인 겸암 류운용 선생이 난리 중에 어머님을 모시고 은둔한 곳이라고 한다.
태백산 아래에 자리잡은 도심촌 주위로는 청량산 도립공원, 청옥산 자연휴양림이 자리 잡고 있어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내년(2015년) 동양 최대의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이 준공 예정이다.
또, 전통 한옥 탐방을 할 수 있는 닭실마을, 계서당도 근처에 위치해 있다.
봉화 특산물로는 송이버섯이 있는데 매년 9월이면 봉화 송이 축제가 열린다.
3.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보은 속리산 사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속리산에는 은신처로 숨을만한 자리가 많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도망왔다가 홍건적 소탕 뒤에 연이어 일어난 반란 때문에 환도하지 못하고 보은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속리산 깊이 자리 잡은 법주사에는 고려 공민왕 뿐 아니라 세조도 거쳐간 사찰로 유명하다.
경북 영주가 사람 살기에 좋다고 했던 이중환의 택리지는 속리산 일대도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쓰고 있는데, 실제로 이곳에도 십승지를 찾아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구병산에는 6.25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보은에는 세조가 벼슬을 내린 소나무로 유명한 정이품송이 600년 넘게 살고 있다.
속리산, 구병산, 법주사와 함께 꼭 들려봐야 할 곳이다.
보은은 대추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매년 10월이면 대추 축제가 열린다.
4. 전라북도 남원 운봉
"남원 운봉 동점촌 부근 100여리이다."
남원 운봉 지역은 일대가 고산 분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피신처로 삼기에 적합하다.
한국지명총람에는 한 여인이 이성계를 운봉의 황산으로 안내해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왜적을 물리치게 했다고 한다.
이성계는 그 여인을 산신령이라 생각해 여상(女像)을 새겼고, 그 고개를 산신령이 사는 고개라 하여 '여원치(女院峙)'라 부르고 있다.
이성계가 적장 아지발도를 무찌른 전투가 바로 고려사에 길이 남은 '황산대첩'인데, 이를 기념하여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또, 남원은 판소리의 양대 산맥인 동편제의 태자리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 된 남원시 아영면 성리마을이 있다.
이 곳은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라 한다.
춘향전의 주인공인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광한루원도 남원에 있다.
이러한 판소리 소재의 발원지가 된 것은 십승지로 알려져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살았다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5. 경상북도 예천 금당실
"예천 금당실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병란이 미치지 않지만 임금의 수레가
다다르면 그렇지 못하다."
조선말기 이유인은 명성황후의 단골무당으로 신임을 받았던 신령군의 치맛바람으로 벼락출세를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한제국 법부대신이었던 이유인은 어느날 갑자기 금당실에 찾아와 99칸 행궁을 지었다.
금당실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유인 대감이 명성황후의 도피처로 금당실로 결정하고 행궁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에 의하면 십승지의 조건으로 '임금의 수레가 닿으면 안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 금기가 어겨질 뻔한 것이다.
금당실은 실제로는 별다른 전란의 화를 입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십승지 마을로써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의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금당실 마을이 금당(金塘)인 것은 마을 지형이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택들에 대한 복원공사가 잘 되어 있어서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된 금당실 전통마을은 한옥탐방 여행을 하기에 적격이다.
주위에는 학가산 자연휴양림, 예천 용문사, 예천 온천, 회룡포 등 가볼만한 명소가 많다.
6.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와 마곡의 두 물길 사이 둘레가 200리나 되므로 피란할 만 하다"
마곡사는 주변 산세가 겹겹이 에워싸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로 꼽혔다.
백범 김구 선생과 매월당 김시습이 이 곳에 은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격분하여 일본 장교를 죽이고 이곳 마곡사까지 내려와 은신했다.
약 3년간 숨어지내던 김구는 이후 조국 광복 운동을 하게 된다.
또,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자 이곳에 은신했다.
세조는 김시습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이 곳 마곡사까지 찾아왔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마곡사 영산전의 현판은 이 때 세조가 남긴 것이라고 한다.
다른 십승지처럼 이 곳도 나라의 난리가 있을 때 마다 십승지를 찾아온 사람들로 정감록촌을 이루었다.
1800년대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자손을 보존하려 했다.
한국전쟁 때는 이북 주민들도 많이 모여들었다.
계룡산이 가까이에 있고, 공주산성, 무령왕릉, 공주 한옥마을 등이 가볼만한 곳이다.
공주는 밤으로 유명하다.
7.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
"영월 정동쪽 상류는 난리를 피해 몸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못하다"
영월의 십승지 역시도 한국전쟁 때 이북 주민들이 많이 몰려왔다.
기묘사화 때 중종에게 숙청을 당한 조광조의 후손들도 영월의 미사리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영월은 또 김삿갓면으로 유명하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에 휩쓸리면서 멸문지화를 당한 김삿갓은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이 곳 영월땅으로 숨어들었다.
방랑을 하던 김삿갓은 죽어서 다시 고향 땅에 묻혔다고 한다.
김삿갓의 생가와 김삿갓 묘, 시비, 문학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영월에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어린 단종이 유배왔던 청령포와 단종의 능 장릉이 있고, 한반도면 옹정리의 한반도지형이 있다.
한반도 모양을 닮은 지형을 갖춘 한반도지형은 유명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8.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
"무주 무봉산 북쪽 동방 상동으로 피란 못할 곳이 없다"
오지의 대명사로 불렸던 '무주구천동'
이웃에 있는 무풍은 덕유산 직전에 있는 대덕산이 감싸 안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무풍을 복지(福地)'라고 했다.
또, 택리지에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에 있는 덕유산이 가까이에 있다.
그 중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이던 곳으로 '신라 사람이자 전라도 사람'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전라도 사람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지리적인 요인으로 무풍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피신할 곳으로 99칸짜리 별궁 '명례궁'을 지었었고 지금은 터가 남아있다.
을미사변으로 갑작스럽게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이 곳으로 피신하지는 못했다.
덕유산의 향정봉에 오르면 충청, 전라, 경상 3도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덕유산 자락에 있는 무주리조트는 최고의 휴양지로 꼽힌다.
구천동, 나제통문 등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다.
9.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부안 변산은 허균이 은거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거처한 곳은 부안 변산 우반동 골짜기에 있는 정사암이었다.
이 곳에서 허균은 '홍길동전'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는 조선 최고의 여류문인으로 꼽히는 이매창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시를 통해 정신적인 교감을 하며 각별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매창이 죽은 후 그는 그녀를 위해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매창공원에는 매창의 묘와 매창의 시비 등이 있다.
변산반도에는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볼 수 있는 낙조대, 새만금방조제, 곰소항, 격포항, 채석강 등 둘러볼 곳이 많다.
10.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합찬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00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동북쪽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만하다."
만수봉은 '장수하는 마을'에 붙는 지명이다.
정감록에는 합천 가야 만수동이라고 쓰고 있지만 현재는 없는 지명이다.
유추해서 그 지역을 찾아내야 하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해인사에서 바라보이는 맞은편 돼지골 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가야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있다.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글로써 격퇴한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에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후에 벼슬을 버리고 해인사 근처 홍류동 계곡으로 들어왔다.
해인사는 가야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피신처다.
한국전쟁의 위기도 무사히 넘긴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 있는 빨치산을 몰아낼 때 폭탄을 쓰지 않고 기관총을 사용해 대장경의 파괴를 막았다고 한다.
정감록에서 말하고 있는 십승지는 하나 같이 깊은 산 속에 자리잡아 쉽게 접근할 수 없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들이다.
이제 21세기에 십승지는 더 이상 은신이나 도피처로써의 장소보다는 역사의 장소를 보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