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이란 적의 습격에 대비해 쌓는 방어시설이다. 처음엔 주변의 적이나 짐승의 침입을 막는 초보적 방어수단이었겠지만,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계급사회가 형성되고 지배층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방어시설도 더욱 견고해져야 했다. 중요한 인물과 시설을 높은 벽으로 둘러쌓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성의 바깥쪽에는 일종의 내민 성벽이라 할 수 있는 치성(雉城)을 쌓아 적이 성벽에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향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고, 문루 밖에도 옹성(甕城)을 둘러 성문을 부수는 공성기(攻城機)를 무용지물로 만들고자 했다. 무엇보다 아예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차단하는 해자(垓子)라는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들어 방어력의 극대화를 꾀했다. 글. 서동철(문화유산 저널리스트)
자연지형을 이용한 방어시설, 환호(環濠)
그림1, 2 : 2014년 레고랜드를 건설하는 공사가 예정된 강원도 춘천 의암호의 중도에서 둘레 403.7m의 청동기시대 환호가 발견됐다. - 문화재청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고자 성 밖을 둘러 판 물길이다. 2014년 레고랜드를 건설하는 공사가 예정된 강원도 춘천 의암호의 중도에서 둘레 403.7m의 청동기시대 사각형 환호(環濠)가 발견됐다. 해자의 일종인 환호는 영역을 구분하고 배수에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방어였다. 알파벳 U자 모양으로 파인 구덩이는 지금 깊이가 70~90cm에 너비가 1~2.4m 규모로 남아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에 따라 크게 훼손됐음을 감안하면 마을이 번성하던 시기 환호는깊이가 1.4m 이상에 너비는 2~3m는 되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그런데 중도 유적의 사각형 환호 바깥쪽에서는 더 큰 규모의 환호가 드러났다. 이 대(大)환호는 현재 섬의 동쪽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당초에는 사각형 환호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해자엔 일반적으로 물을 채우는데, 고저가 일정치 않은 산성의 해자는 그게 불가능하다. 중도의 환호 역시 모래질 토양으로 물을 채울 수 없다. 이렇듯 마른 해자를 옛사람들은 황(隍)이라 불렀다. 그런데 중도는 환호만 갖춘 것이 아니다. 중도는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중도 유적을 두 쌍의 환호와 목책을 가진 일종의 평지 성(城)이라고 본다면 북한강과 소양강을 거대한 자연 해자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지형을 극복한 방어시설, 인공 해자
선사시대에 이런 지혜를 발휘했으니 삼국시대에 접어들어 해자가 더욱 발전했음은 불문가지다. 선조들은 자연 지형을 방어에 이용하는 데 탁월했지만, 벌판에 세운 평지성처럼 자연조건을 활용하기 어려울 때는 매우 튼튼하고 정교한 인공 해자를 파기도 했다.
평양의 대성산 기슭에 터만 남은 고구려의 안학궁이 대표적이다. 안학궁은 한 변의 길이가 622m인 정사각형으로 넓이는 38만㎡에 이르렀는데, 발굴 조사에서는 사방 성벽 밖에 두른 해자가 확인됐다. 한성백제는 왕성인 풍납토성을 북쪽 고구려에 맞서 한강 남쪽에 지었다. 한강을 자연 해자로 삼는 동시에 성 밖에는 또 다른 인공 해자를 팠다. 이후 백제의 수도 웅진도성과 사비도성, 곧 공주와 부여의 왕성 역시 금강을 자연 해자로 삼은 것은 다르지 않다. 신라의 도성 월성(月城)은 동서 900m, 남북 250m의 만곡진 초승달 모양이다. 월성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월성 동쪽으로 흐르는 남천에 자연 해자의 역할을 맡겼다. 반면 월성 서쪽에는 인공 해자를 팠다.
그림 3.<수선전도>는 19세기 말에 제작된 서울의 고지도이다. 한성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다. - 문화재청
외사산(外四山)으로 해자를 삼은 한성
한성, 곧 오늘날의 서울은 천험(天險)의 요새에 자리 잡았다. 한성은 내사산(內四山)을 성벽으로 이어 조성한 성곽도시다. 북쪽의 북악산(342m), 동쪽의 낙산(125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의 남산(265m)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다. 그 외곽으로는 다시 북쪽의 북한산(836m), 동쪽의 용마산(348m), 서쪽의 덕양산(행주산·125m), 남쪽의 관악산(829m) 등 외사산이 에워 싸고 있다. 풍수지리적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막 출범한 나라의 수도라면 당연히 방어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춰 입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한성이 해자 없는 도시라는 시각은 지나치게 미시적인 관점이다. 내사산을 수도를 이루는 성벽의 거대한 하부구조로 활용하고 외사산을 외곽 방어망으로 활용한 그들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그들의 의도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북쪽으로는 임진강, 남쪽으로는 한강을 한성의 해자로 삼은 것이다. 자연적인 조건이 충분히 구비되어 있는데 해자와 같은 인공 장애물을 설치할 이유는 없다. 이성계를 옹립한 혁명 주체 세력의 한 사람인 양촌 권근(1352~1409)이 한성을 두고 “하늘이 만들어 준 견고한 성지(城地)”라 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림4. 인왕산 백운동 계곡(백운동천). 해자는 한성 바깥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는데 경복궁 서쪽의 백운동천이 그것이다. - 문화재청
그림 5. 신라 사람들은 월성 서쪽에는 인공 해자를 파놓아 적의 습격을 막고 동쪽은 남천에 자연 해자의 역할을 맡겼다. -문화재청
자연 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해자는 한성 바깥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다. 경복궁 동쪽의 중학천과 서쪽의 백운동천이 그것이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사람들은 궁궐의 입지 또한 효율적인 방어에 초점을 맞췄다. 북쪽은 북악산이 가로막고, 동쪽과 서쪽은 중학천과 백운동천이 감싸며 흐르다 남쪽에서 합류해 세 방향에서 자연 해자 역할을 하는 자리에 경복궁을 앉혔다. 궁궐 남쪽에는 정부기관을 한데 모은 육조 거리도 조성했다. 자연 해자의 보호를 받는 곳에 국가의 중추기관을 집중시킨 것이다. 중학천과 백운동천이라는 자연 해자에 1960년대 우리 손으로 콘크리트 뚜껑을 씌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복개 이전의 중학천 사진을 보면 바닥은 깊고, 호안은 적이 오르기 어렵도록 돌로 쌓은 수직벽이다. 해자의 역할이라는 인식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 초기에 중학천과 백운동천에 놓인 다리 역시 궁궐을 향해 몰려오는 적에 맞서 유사시에는 접어서 거둬들일 수 있는 구조였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해자를 쉽게 보기 어렵다는 인식이 없지 않은 것은 외국 여행길에서 마주친 인공 해자의 강렬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평지 성곽이 많은 일본의 옛 성들은 대부분 깊고 넓은 해자를 갖추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 수도 교토의 외항에 지은 오사카 성이 대표적이다. 유럽에도 해자가 인상적인 옛 성이 적지 않다. 스위스 레만호의 동쪽 끝에 있는 시옹성은 물 위에 성채를 짓고 하나의 좁은 다리로만 육지와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영국 켄트주의 리즈성은 아예 인공 호수를 파고 그 가운데 성을 들어앉혔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공 해자를 좀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연 해자를 활용할 수 없는 평지성에는 대부분 예외없이 인공 해자를 둘렀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하삼도(下三道), 곧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충청·전라·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읍성(邑城)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해자의 존재가 확인된 곳은 진도·고현·하동·웅천·언양·김해·동래·고성읍과 울산병영성, 그리고 제주 대정읍성 등이다. 이미 고려 후기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충남 서산 해미읍성은 해자를 복원해 놓았다. 정유재란의 격전지였던 전북 남원의 남원성에서도 일부분이지만 해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남 강진의 전라병영성은 성벽에 이어 해자도 완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그림 6. 삼한시대의 환호와 구덩이가 조사된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6호 울주교동리생활유적 -문화재청
그림 7. 청동기시대 집 자리인 부산 온천동 유적의 이중 환호 - 향토문화전자대전
문화재청 - 월간문화재사랑 10월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