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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7회 효고·나라·와카야마①
완승을 향해 출범하는 진원지 효고.
사명의 천지를 달리는 동지는
지금, 상승(常勝) 간사이의 신시대를
이끌어갈 사명으로 불타오른다.
그 웅장한 모습을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그 승리를 광포의 스승이 기다리고 있다.
효고는 용감한 투사의 보고(寶庫)다
효고가 승리하면 전국이 완승한다
‘불굴의 투혼’이 불타오르는 천지
효고는 지지 않는 ‘불굴의 투혼’이 불타오르는 사제공전(師弟共戰)의 천지다. 효고는 간난신고(艱難辛苦)까지도 미래를 향한 도약대로 삼는 동경의 무대다. 효고는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 ‘대역전의 드라마’를 펼치는 승리의 항구다.
소설《신·인간혁명》을 펼치면 광포 스승이 효고에 보내는 한없는 기대가 씌어 있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수필 인간세기의 빛>에도 효고의 중요성을 이렇게 적었다.
“효고는 ‘병사의 창고’다. 용감한 투사의 보고(寶庫)다. 효고가 승리하면 간사이가 승리한다. 간사이가 승리하면 일본 전국이 완승한다.”
효고의 동지는 지금, 이러한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결의로 하여 정의의 대화를 크게 확대하고 있다.
박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동지
1961년, 학회는 ‘약진의 해’를 힘차게 달려 6월에 연간 목표인 200만 세대를 일찌감치 달성했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끊임없이 발전하는 학회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회원들에게 가하는 부당한 ‘차별’과 ‘처사’로 표면에 드러난 지역도 있었다.
효고에서는 산다시와 아오가키초(현재 단바시)에서 ‘집단 따돌림’의 박해가 일어났다. 그 실태는《신·인간혁명》제4권 ‘춘람’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아오가키초의 어느 산간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신사(神社)를 위해 봉사하는 관습이 있었다. 학회원은 종교적인 신념에서 참가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말할 것도 없이 신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학회를 탐탁지 않게 여긴 지역사회의 임원은 자치회 규약을 개정해 주민들이 차례로 신사의 행사를 담당할 것을 규약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지역 주민으로서 갖는 권리를 모두 잃게 된다고 명기했다.
학회원의 가정은 수도가 끊기고 유선방송 설비도 제거되었다. 공동소유인 산림에 대한 권리도 박탈당했다.
같은 시기에 산다시의 어느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역의 관례에 따라 사찰의 행사 비용이 각 가정에 할당되었는데 학회원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자치회 이장은 임시총회를 열어 ‘자치회 주민이 결정한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자치회 주민이 갖는 모든 권리와 자격이 없어진다.’고 규약을 정했다.
지역의 60여 세대 중 유일한 학회원인 후쿠다 다미토의 집안은 온갖 압박을 받았다.
후쿠다는 이장을 고소했지만 현지 경찰은 자치회 임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탓인지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이장이 자치회 규약을 파기하고 화해하기까지 2년여의 세월이 걸렸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집단 따돌림 사건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일 이상으로 괴로웠다. 신이치는 격려의 글을 보내는 등 여러 가지로 격려의 손길을 보냈다.”
“동지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신심으로 일어서는 것이다. 거기에 비로소 영원한 영광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의 혼신의 힘을 다한 격려를 받은 동지들은 더욱더 지역광포를 위한 불꽃을 불태웠다. 사랑하는 고향의 번영을 기원하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거듭 대화하면서 지역공헌을 위한 활동에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뒤, 아오가키초와 산다시의 지역광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오가키초에서는 박해를 받아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동지의 모습에 지역의 벗이 마음을 열어 홍교가 진척되었다.
2004년에 여섯 개 자치회를 합병하여 단바시가 되었다. 단바시에는 간사이이케다기념묘지공원이 있고 학회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이해도 넓혀지고 있다.
산다시에서는 각 신문이 집단 따돌림 사건을 보도하여 시내의 어느 회원이 ‘자신도 신심하고 있다.’며 박해받는 회원에게 편지를 보내 연대가 생겨나 광포가 진척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신도시 개발로 전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중에는 학회원도 많아 지역공헌을 위해 힘쓰는 벗의 모습에 신뢰를 보냈다. 일찍이 집단 따돌림이 있던 지역에서는 학회가 주최한 전시회에 나흘간 현지의 권위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5천명 이상이 관람했다.
어떠한 박해에도 사제(師弟)의 길을 꿋꿋이 걸으며 신심을 관철하면 반드시 마지막에는 승리한다. 이 방정식대로 효고의 벗은 생기발랄하게 거듭 분투하고 있다.
<기고> 창가의 사제야말로 불굴의 유대
히로사키 다카시 총효고장
1995년 1월 17일,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6400여명, 부상자가 4만 4000여명에 이르는 큰 재해였다.
저는 지역의 회원들을 찾아가 안부를 확인한 다음 효고이케다문화회관으로 갔다. 회관까지 가는 길의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바뀌었다.
바로 재해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그런 속에서 많은 회원이 무너진 자신의 집을 복구하는 일도 제쳐놓고 구호활동을 위해 달려오셨다. 지진의 잔해 속에서 속속 떨치고 일어선 동지들의 용장한 모습이 지금도 가슴 깊이 새겨져 잊히지 않는다.
그 뒤 간사이 각지는 물론 주고쿠 지방과 시코쿠 나아가 일본 전국에서 많은 구호물품이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물품을 구하려고 관공서에 갔지만 행정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창가학회 회관에 가면 물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회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훗날 학회의 신속한 대응을 ‘휴먼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창가의 ‘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낳은 신속한 격려였다.
당시 저는 효고의 남자부장으로 각지에서 효고이케다문화회관에 보낸 구호물품을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마다 구호물품을 나눠주면서 ‘어째서 효고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세요.’라는 이케다 선생님의 전언을 받고 깜짝 놀랐다. ‘선생님이 계신다! 져서야 되겠는가!’ 하며 분기할 수 있었다.
그때 창가의 사제야말로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유대이자 희망의 원천이라고 실감했다.
《신·인간혁명》제30권(하) ‘서원’에서 야마모토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들의 몫까지 밝은 모습으로, 희망을 안고 낭랑하게 묘법(妙法)을 부르면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것이 즉(卽) 생사불이(生死不二)이고, 효고현의 국토에 그리고 간사이의 대지에 지금 다시 한번 대복운의 위광세력을 더해가기 때문입니다.”
내년은 재해가 발생한 지 25년이 된다. 피해가 가장 크던 나가타문화회관을 선생님이 방문하신 지 20주년의 가절을 맞는다.
지금이 바로 효고가 새로운 시대를 열 때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할 때다!
저부터 앞장서서 투쟁하여 반드시 일본 제일 그리고 세계 제일의 ‘인재의 효고성(城)’ ‘대복운의 효고성’을 구축하겠다.
고베는 새로운 문화의 도읍
제4권 ‘청엽’에는 1961년 5월 11일, 고베와 효고 두 개 지부의 합동 결성대회에 관해 씌어 있다.
이 자리에서 야마모토 신이치는 학회의 주요행사와 활동 모습을 영화로 기록해 시청하자는 계획을 발표했다.
“신이치가 그 이야기를 고베의 땅에서 하려고 한 것은, 예부터 해외로 연결된 무역 기지 역할을 해 온 고베가 새로운 문화의 도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도쿄, 오사카, 교토, 나고야, 고베, 요코하마의 일본 6대 도시 중에서 이제까지 지부가 없는 곳은 고베뿐이었다. 거기에 드디어 지부가 탄생한 만큼 신이치는 희망에 찬 발표를 하여 그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이치가 말한 대로 고베는 예부터 중국 대륙 그리고 한반도와 교류하는 배가 오가는 ‘국제무역’의 거점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오사카, 효고, 에도의 항로가 개설되어 일본 국내에서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8년에 고베항이 개항하면서 외국인 거류지가 생겨 ‘유럽풍’의 상업지역으로 번성했다.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고베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도시로 발전했다.
선생님은 이러한 배경이 있는 고베가 신시대의 선진(先陣)이 되기를 기대했다. 고베의 동지는 ‘광포의 미래를 여는 모항(母港)’이라는 긍지와 사명을 안고 승리의 파동을 넓히는 대화에 힘쓰고 있다.
아마가사키에 사자후가 울려 퍼지다
1962년 1월 25일, 신이치는 4년 반에 달하는 ‘오사카사건’의 법정투쟁에서 무죄 판결을 쟁취했다.
《신·인간혁명》제5권 ‘사자’에는 하루 전인 24일, 아마가사키시체육회관에서 연 간사이 남자부간부회에서 신이치가 사자후(師子吼)한 내용이 씌어 있다.
“나는 어떠한 박해를 받아도 일어섭니다. 만약 유죄가 되어 다시 투옥된다 해도 대성인의 대난을 생각하면 사소한 일입니다. 또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나는, 자신의 목숨을 아낄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량한 시민을, 사람들을 위해 착실하게 진력해가는 민중을 괴롭히는 권력과는 생애, 결단코 끝까지 싸울 결의입니다. 이것은 나의 선언입니다.
불법은 승부입니다. 잔혹한 취조를 한 검사들, 또 그렇게 시킨 권력과 우리 중 어느 쪽이 올바른지 영원히 지켜보고자 합니다!”
스승의 이러한 외침은 젊은 간사이 용자들의 생명에 울려 퍼졌다. 그 중에서도 간부회를 개최한 아마가사키는 회합을 개최한 ‘1ㆍ24’를 ‘아마가사키의 날’로 정해 지금도 ‘광포의 진원지’ ‘학회의 심장부’라는 긍지를 가슴에 품고 파죽지세로 달린다.
<기고> 당당하게 신념을 관철하는 불법자로
오노기 아야코 총효고부인부장
1978년 11월 13일, 제1차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속에 이케다 선생님은 완공까지 얼마 남지 않은 가코가와문화회관을 방문해 갑작스럽게 근행회를 열어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가코가와! 가코가와!’라고 제 생명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라며 애정을 담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왔으니 안심하세요.” 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말을 건네시는 모습에 그곳에 모인 많은 참석자의 눈에서도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튿날, 선생님은 히메지문화회관에도 와주셨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저도 여자부 선배를 따라 회합장소로 달려갔습니다. 당시는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아 큰 불안과 슬픔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저 히메지성(城)처럼 당당하게 신념을 관철하는 불법자(佛法者)가 되기 바랍니다!” 하고 외치는 용장한 스승의 모습을 직접 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가 솟았습니다.
그 뒤, 저는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소카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커다란 전환기가 된 스승과의 원점을 가슴에 품고 지금 사랑하는 효고현을 달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가코가와, 히메지 지도에서 “효고현을 강화하려면 지금까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가코가와 등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상승(常勝)의 왕자(王者) 간사이를 구축하는 핵심입니다.”(제29권 ‘상락’)라고 기대를 보내셨습니다.
선생님의 효고 지도는 75차례를 헤아리며 ‘진취적인 항구 고베’ ‘상승의 심장부 아마가사키’ ‘간사이 혼(魂)이 불타오르는 니시노미야’ ‘바다에 빛나는 아와지섬’ ‘녹음이 짙은 단바, 다지마’라며 각지를 칭찬하고, 모든 지역에서 사제의 유대를 맺으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뛰어난 인재들이 만들어 낸 멋지게 ‘단결하는 효고’의 저력으로 상승불굴(常勝不屈)의 새로운 금자탑을 세우겠습니다.
그리고 “효고는/ 일본의 심장부다/ 광선유포의 원동력이다./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는/ 부처인 병사로 가득한 보고(寶庫)다.”라는 스승의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후계의 서원을 완수하겠습니다.
상승이란 역경에 맞서 계속해서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관이다
고시엔에서 개최한 ‘비의 문화제’
1966년 9월 18일, 니시노미야시에 있는 한신고시엔구장에서 ‘간사이문화제’를 개최했다.
《신·인간혁명》제11권 ‘상승’에는 출연자와 행사진행요원이 엮는 음지의 드라마와 스승을 구도하여 온 힘을 다하는 제자의 빛 그리고 제자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며 끊임없는 격려를 보내는 광포 스승의 진심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이 문화제는 ‘비의 문화제’로 불리며 불멸의 광채를 발하는 역사적인 모임이 되었다.
제11권 ‘상승’은 당시 문화제에 참여한 멤버들은 물론, 모든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진지함’이라는 인간의 강인함, ‘불굴’이라는 승리의 토대, ‘사제’라는 유대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었다. 학회정신과 간사이 혼이 응축된 연재이기도 하다.
음악대와 고적대의 퍼레이드, 남자 고등부의 맨손체조, 여자부의 리듬댄스, 부인부의 민속춤, 여자부의 발레, 남자부의 매스게임 등 식순 하나하나에 드라마가 있고, 출연자 한 사람 한사람에게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외야석에서 현란한 그림을 선보이는 카드섹션도 간사이의 단결을 상징했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모습들을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듯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에도 지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연기하는 동지들의 열렬한 기개와 모습이 멋지게 그려져 있다.
‘상승’에서는 단순히 ‘감동적인 문화제’를 그린 것이 아니다. 문화제를 통해 인생의 승리를 여는 확고한 철학이, 불요불굴의 정신이 그리고 사제의 길이 엄연히 나타나 있다.
간사이문화제가 끝난 뒤, 신이치는 간사이의 리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간사이는 비가 내리는 최악의 조건에서 대성공을 이루어냈습니다. 모든 것을 도약대로 삼았으며, 드라마로 바꾸고 감동으로 바꾸어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간사이 혼이지요.
‘상승’이란 역경에 맞서 계속해서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관(榮冠)입니다. 오늘을 ‘상승 간사이’가 새롭게 출발하는 날로 정합시다.”
가코가와 그리고 아시야로
《신·인간혁명》제29권 ‘상락’에서는 1978년 11월, 신이치가 효고 지도를 위해 나섰다. 13일에는 가코가와문화회관을 방문해 가코가와지부의 결성 17주년을 축하하는 기념근행회에 참석했다.
“어떠한 병법(兵法)보다도 법화경의 병법을 쓰실지어다.”(어서 1192쪽)라는 성훈을 배독하고 생활, 일, 장사 등 인생은 신심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고 “대확신이 넘치는 신심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하리마권 대표 간부와 간담하고 거듭 격려했다.
가코가와 방문에 즈음해 신이치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효고현이 중요합니다. 효고가 강해지면 자극을 받아 오사카도 강해집니다. 효고와 오사카가 서로 절차탁마한다면, 그것이 간사이를 이끄는 힘이 되고 나아가 일본과 세계를 이끄는 굉장한 힘이 될 것입니다.
또 효고현을 강화하려면 지금까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가코가와 등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상승(常勝)의 왕자(王者) 간사이를 구축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가겠습니다. 간부가 솔선해서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이튿날 14일에는 효고현 아시야시에서 회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히메지문화회관에서 실시한 히메지지부 결성 18주년 기념근행회에 참석해 지도하고 히메지권 대표와 대화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15일에도 고베와 니시노미야 방면의 지부장, 지부부인부장과 간담하고 인근에 사는 멤버와 기념촬영을 했다. 광포의 스승이 보내는 격려는 매우 바쁜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당시는 제1차 종문사건으로 회원들이 고통 받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선생님은 다기진 동지를 지키고자 사자분신(獅子奮迅)의 기세로 벗의 곁으로 달려가 따뜻한 말과 확신에 찬 목소리, 자애 넘치는 격려를 보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
《신·인간혁명》제30권(하) ‘서원’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에 관해 써서 남겼다.
1995년 1월 17일, 대지진이 긴키 지방을 덮쳤다. 보고를 받은 신이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구호활동을 추진하도록 손을 썼다. 그리고 하와이 동서센터에 강연할 예정이었지만 출발을 연기하고 직전까지 재해 대응에 힘썼다.
신이치는 하와이에서 여러 행사에 참석해 온 힘을 쏟은 뒤 2월 2일, 곧바로 간사이를 방문해 참석한 추선근행법요에서 이렇게 외쳤다.
“간사이가 하루빨리 복구되기를 기원합니다. 전 세계가 여러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계 모범’인 간사이로서 씩씩하게 일어서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분들도 곧바로 상승(常勝)의 진열로 되돌아옵니다.
어서에는 ‘막힘없이 상상품(上上品)의 적광(寂光)의 왕생(往生)을 이루어 수유간(須臾間)에 구계생사(九界生死)의 꿈속에 돌아와서’(어서 574쪽)라고 씌어 있습니다.
최고의 적광세계(寂光世界, 불계)로 왕생을 이루고, 사후에도 곧바로 구계(九界)인 이 세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광선유포를 위해 활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들의 몫까지 밝은 모습으로, 희망을 안고 낭랑하게 묘법(妙法)을 부르면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것이 즉(卽) 생사불이(生死不二)이고, 효고현의 국토에 그리고 간사이의 대지에 지금 다시 한번 대복운의 위광세력을 더해가기 때문입니다.”
고베시 히가시나다구에서 지역부인부장이던 마쓰하라 요코 씨(총효고총합부인부장)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회원님들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한 분 한분을 찾아갔습니다. 가족을 잃은 분을 만났을 때는 함께 울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케다 선생님이 거듭 격려를 보내주셔서 ‘마지막 한 사람이 일어설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곁으로 다가가자’며 용기를 냈습니다.”
마쓰하라 씨가 담당한 지역에서는 22명의 존귀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던 마쓰하라 씨의 마음에 빛을 비춘 것은 2월 4일에 개최한 추선근행법요에서 이케다 선생님이 지도한 내용이었다.
“경문에는 ‘악상(惡象)에게 살해당한 경우에는 지옥 등에 떨어지지 않는다. 악지식에게 살해당한 경우에는 지옥 등에 떨어진다고 씌어 있습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도 어서에 몇 번이나 인용하셨습니다.
재해로 돌아가신 경우도 악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여 생명에 쌓은 복덕은 사고 등으로는 절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사불이(生死不二)이므로 다시 우리의 광포 진열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 선생님의 제안으로 효고에서 SGI총회를 개최했다.
“SGI총회를 겸해 ‘21세기 효고총회’를 개최했습니다. 선생님은 회합 명칭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붙이자고 제안하셔서 ‘21세기 효고희망총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없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마쓰하라 씨)
절망밖에 없는 때라도 스스로 희망을 만들자!
지지 않는 불굴의 투혼을 자신부터 증명하자!
신심으로는 절대 지지 않는다!
혼신의 힘을 다한 스승의 격려로 효고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재해를 딛고 불사조처럼 되살아난 효고의 사명 깊은 동지는 지금 사랑하는 천지에서 일본 전국 나아가 전 세계로 ‘희망’의 두 글자를 보내고자 거듭 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광포의 스승은 효고에 영광스러운 개가가 울려 퍼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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