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유 선생이 태어난 청도군 매전면 호화리 호방 마을 전경
지고지순의 교육자 이승유(李承有) 선생
며칠 전에 청도읍에 있는 청도도서관에 가서 향토사 자료를 열람하다가 우연히 서가에 꽂힌 ‘望鄕誌’(김영진 편저) 한 권을 발견했다. 이 책은 44년 전인 1974년 부산의 구명출판사에서 발행한 한정판 비매품으로 내용은 당시 청도군 출신 유명 인사들의 행적과 근황을 간단 간단히 토막글로 수록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내가 사는 마을 출신으로 당시 군위군교육청 교육장으로 있던 故 이승유(李承有, 사진) 선생이 ‘至高至純한 敎育 行政官’이라는 제목으로 사진과 함께 한 페이지 소개된 것을 보고, 마을로 돌아와 고인의 친척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망향지’ 내용을 토대로 선생의 생애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이승유(1925~1990) 선생은 일제강점기 청도군 매전면 호화리 호방 마을의 고성이씨 문중에서 태어나 1938년 매전공립보통학교(매전초등학교 10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선생은 학교 성적뿐만 아니라 품행 또한 반듯하여 ‘망향지’는 선생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名門의 後裔로서 天性이 溫柔하고 高潔한 人格은 그 崇高한 血統의 化身인가 하며 禮義之處遇가 出衆하니… ”
선생의 학교 성적은 단연 출중하여 그해 졸업생 50명 중 유일하게 명문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5년제)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대구고보는 대구사범과 함께 조선인이 갈 수 있는 최고의 명문으로 영남 일대의 수재들이 몰려들어 입시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신문이 ‘難攻의 關門突破’(1938년 3월 19일 자 동아일보)라는 제목을 달고 합격자 100여 명의 명단을 하나하나 실을 정도로 대단한 경쟁을 물리치고 합격한 것이다.
선생은 1942년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운문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해방된 조국의 2세 교육을 위해 ‘그 젊음의 정력을 쏟고 몸 바쳐’ 오로지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풍각초등학교 교감, 유천초등학교 교감을 거쳐 마침내 중남초등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다시 청도교육청 장학사, 성주 대가초등학교 교장, 영양교육청 장학사, 경산교육청 장학사를 거쳐 영천교육청과 금능교육청, 다시 경산교육청의 학무과장을 역임하는 가운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1972년 포항시교육청의 교육장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에도 군위교육청 교육장과 청도교육청 교육장을 두루 거치는 동안 ‘교육행정가로서 손색없는 관록을 쌓으며 허다한 애로를 무릅쓰고 일선 교육행정 면에 평생을’ ‘천직에 순응’하여 진정 ‘지고지순한 교육 행정가’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확고한 교육관과 타고난 순박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교사들을 이끌면서 국민교육이념을 교육 현장에 실현하여 지역 교육계의 존경을 받았다.
선생은 노년에 인재 육성을 위해 교육 일선으로 복귀하여 대구 중앙초등학교 외 여러 초등학교 학교장을 역임하시고 마지막으로 대구 동도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 뜻하지 않은 지병을 얻어 65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문중 선영에 잠들었다.
선생은 재임 중 1960년과 1963년, 1981년 대통령으로부터 교육공로 표창을 받았고, 1984년에는 국민교육헌장 선포 16돌을 맞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정두(李貞斗) 여사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동백(東白), 차남 동일(東日), 3남 동하(東河), 4남 동수(東壽), 딸 동현(東賢)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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