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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 둘레길
① 백련산 불광천길(5코스)
옛말에 “ 궁하면 변하고(窮則變) 변하면 통한다(變則通)고 하였는데 작금의 현실은 고난이 겹쳐오는 것 같다. 얼마만큼 더 많은 고난의 짐을 짊어져야 오늘의 난국을 헤치고 망망대해에 조그마한 배라도 띄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괴로움만 밀려오고 있다.
하지만 술잔을 기울이며 괴로워하고 있을 수 없어 때 마침 휴일이 되어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복잡한 머릿속을 맑게 하고자 논어 경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학이편 제1장인 “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로부터 팔일편 子曰 居上不寬하며 爲禮不敬하며 臨喪不哀면 吾何以觀之哉리오 ” 까지 조그마한 소리로 읊조리니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이겨낼 것이다. 어떠한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오늘 걷는 은평 둘레길 또한 5구간으로 나누어 놓았지만 전 구간 24km를 하루에 완주하고자 집을 나서지 않았는가 !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도전하는 것을 흥미로운 일로 여기는 열정이면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생각이 한 곳에 이르니 정신이 맑아지며 전철은 어느새 은평둘레길의 들머리에 해당하는 녹번역에 이르렀다.
녹번역 3번 출구로 나와 통일로의 보도블록을 따라 산골고개를 향하여 걸어간다. 조선시대 6대 도로의 하나였던 관서대로이다. 조선의 고고한 정신과 드높은 문화가 세 세계로 뻗어 나갔던 조선인들의 웅지가 서린 길이었는데 분단된 오늘날에는 통일로가 되어 우리를 맞는다. 달려가는 저 자동차들은 잠시라도 통일을 기원하며 달리고 있을까 ?
산골고개에 이르러 생태 다리의 계단을 따라 오르니 전망대이다. 불과 10여분 밖에 오르지 않았는데 녹번동, 불광동, 연신내, 구산동, 신사동 등 은평구 일대의 활력에 넘치는 모습과 북한산의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등의 연릉에서 강렬한 기운을 분출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자연의 기운을 흡입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는데 햇살이 비치고 바람도 불지 않아 걸어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둘레길에는 아침운동을 나선 주민들이 오고가는데 반갑다고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서 동네의 뒷동산임을 여실히 느끼며 은평정에 이르렀다.
은평정은 백련산의 상징이다. “ 삼각산과 서해바다. 그리고 민족의 젖줄인 한강이 굽어보이는 곳에 우뚝 섰으니 그 정기가 뿌리가 되어 이 지역민의 기상과 번영을 가리는 영원한 표상이 되기를 기원하여 은평정을 창건하였다”고 創亭記는 말하고 있다.
은평정은 생태다리 위의 소재한 전망대보다 더 넓게 은평구 전 지역을 조망할 수 있었다. 은평정에서 백련산의 명소이자 응암동을 상징하는 메바위를 둘러보고 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약수터가 있었다.
예전 응암동에 살면서 백련산에 오를 때 이곳에서 약수를 마시고 올랐는데 오늘은 수질검사에서 A형 간염 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되어 음용금지가 되었다. 약수를 마시고 증산역으로 갈까 했는데 눈물만을 머금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려서니 영락 중학교를 가리키는 표지판과 서울시립 병원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불과 500m되지 않는 거리에서 젊은 시절 전세를 살았다. 그래서인지 응암동은 마치 고향 동네처럼 느껴진다.
은평 둘레길은 젊은 시절 살던 집과 반대방향으로 이어지면서 백련사 4길에서 응암로 22길로 진입하여야 했다. 처음 와 보는 도로에서 둘레길을 찾아가는 데는 표지기가 핵심인데 이 곳에는 은평둘레길를 알리는 표지기와 표지목등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띠지 않아 길 찾기에 매우 주의를 요하는 곳이었다.
불광천 가는 길인 응암로 22길에서 사거리 교차로에 이르러 횡단보도를 건너 응암로 21길로 진입하여 구름다리(은평 레인보우교)를 건너니 불광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도심 생태 하천인 불광천은 처음 복원하였을 때 찾았고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다시 만났고 오늘 또다시 이르렀다. 처음 복원하였을 때와는 달리 자전거, 보행자 도로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고 각종 체육시설이 놓여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원으로 완전히 자리 매김하였다.
“ 불광천은 한강으로 직접 흘러가던 물줄기로서 한강의 제 1지류였고, 하류가 심한 굴곡이지면서 흘렀는데 천변의 개축공사와 증산로 개통 등으로 직선화되었고, 한강의 제방공사로 인해 난지도가 육지화 되면서 유로가 변하여 홍제천의 지류가 되었다.
북한산 비봉이 발원지이며 옛 이름은 연서내, 연신내, 까치네라고 불렀는데 인조반정 당시에 능양군이 이곳에서 합류하기로한 장단부사 이서(李曙)가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하여 연서천(延署川), 이서를 맞이하였다 하여 영서천(迎署川)이라도 불렀다“ <서울의 하천. 서울 시사 편찬 위원회>고 전해지고 있다.
② 봉산 해맞이 길(1코스)
불광천 흐르는 물 따라 발길 또한 박자를 맞추고 싶었지만 은평 둘레길은 봉수대가 있는 봉산으로 길을 유도하고 있었다. 봉수대까지 4.32km이다. 불광천에서 시내로 진입하면 증산동이다.
증산甑山은 산모양이 떡이나 쌀 따위를 찧는데 쓰는 둥근 질그릇인 시루처럼 생겼기 때문에 순수 우리말인 시루 뫼를 한자로 표기하여 증산甑山이라 하였는데 시루는 밑이 항상 뚫려 있어 재물이 모이지 않아 항상 가난하게 살게 된다 하여, 고종에게 땅 이름을 ‘시루’ 증 대신 ‘비단’ 증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쳐달라고 상소하여 갑오개혁 때 ‘비단’ 증甑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산 가운데 시루를 상징하는 시루뫼란 이름을 지닌 산봉우리를 찾아보니 대략 86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81개가 시루뫼로 표기하였고 5개가 한자어인 증산으로 부르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루 뫼를 거부 반응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밑이 뚫려 있어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고 생각에 비단 증繒로 바꾸어 고착화한 것은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순수 우리말 지명을 한자어로 고쳐 사용하고 부르는 것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한자를 1천년이상 사용하였고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아름다운 말이 있는데 굳이 한자어로 바꾸어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
한자화된 우리 지명, 예를 들면 큰 밭을 의미하는 내 고향 한밭은 대전, 거주하고 있는 한뫼는 一山, 고리산 → 環山, 서리산 → 霜山, 칼봉 → 劍鋒, 새재 → 鳥嶺, 솜산 →綿山, 며느리산→ 婦山, 달뜨기재 → 月出재, 솔재 → 松峙, 감나무재 → 柿木峙.... 등 듣기만 하여도 정감이 서린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여 오히려 그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고 그 아름다움이 반감되기에 한자화된 우리의 지명은 반드시 본래의 이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증산동의 골목길을 따라 진행하여 증산체육공원에 이르니 서울 둘레길의 상징물의 하나인 빨간 우체통이 있다. 빨간 우체통은 서울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둘레길을 걸었다는 증거를 삼기위해 확인 도장을 받는 곳이다.
길을 걷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걷는 것인데 걸었다는 증표를 받는 것은 걷기의 참뜻은 아닐 것이다. 길에는 선인들의 얼, 사상 문화, 민속, 설화 등이 숨 쉬고 있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며 종합도서관이며 작게는 종합대백과 사전이다.
그러기에 우리 땅 걷기는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하루를 유희거나 건강을 위한 여가활동을 뛰어넘어 자연의 커다란 기운을 호흡하면서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으로 새로운 지혜를 창출하는 정신운동이다.
따라서 본질을 외면하고 그저 오늘 하루 10시간을 걸었다, 50km를 걸었다.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하루에 종주하였다는 등 지엽적인 일에 급급한 우리땅 걷기를 새롭게 발전시키지 못하면 중단하던지 아니면 일상의 취미활동으로 자리매김할 때가 온 것 같아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무력해 하고 있는 자신을 반성해 본다.
오늘의 당면한 문제점을 새기면서 봉수대를 향하여 걸어갈 때 팥알같이 달리는 열매가 마치 배를 닮았다는 뜻을 지닌 팥배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은평둘레길에서는 데크를 설치하여 자연 속에 파묻혀 걸어갈 수 있었다.
팥배나무 군락지를 지나서 봉수대로 향하는데 봄의 날씨를 선사한다.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숲속의 나무들은 아직 옷을 갈아입을 조짐을 보이지 않지만 따사로운 햇빛으로 얼었던 땅이 녹아 질펀하고 등줄기에는 땀이 베인다.
산도 높지 않고 경사도 완만하여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라도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 그리하여 서울둘레길이 되고 은평둘레길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봉산에 오르니 봉산정이 세워져 있고 봉수대가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가 마치 봉황인 날개를 편 형상과 비슷하다 하여 봉령산 鳳嶺山이었으나 무악봉수로 이어지는 봉수대가 있어 봉산으로 부르는데 3,1운동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이 모두가 이곳에 모여 횃불을 밝히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던 곳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는 봉산 근린공원으로 조성하여 해가 바뀔 때 마다 해맞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여 들어 해맞이 공원으로 더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팔각 정자인 봉산정에 오르니 동북쪽으로 북한산의 우뚝 솟았고 서북쪽으로는 한강이 흘러간다.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북한산. 한강은 우리의 자랑이요 멋이다. 그리하여 이 땅의 어디에서 북한산과 한강을 볼 수 있는 곳은 맑은 기운 넘쳐나는 백두산의 푸른 정기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안산으로 뻗어간 북한산의 산줄기 그리고 남산. 청계산. 관악산과 듬성듬성 솟아 있는 계양산, 개화산, 덕양산 ... 등은 볼 때마다 새롭다. 가슴에 간직하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집으로 가져가고자 사진에 담아보지만 그 모습이 담기지 않는다.
봉산을 내려서니 벌 고개이다. 서울과 고양시의 경계이며, 봉산과 앵봉산을 이어주는 벌 고개는 의경세자<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무덤을 만들 때 땅속에서 벌이 나와 무덤의 자리를 잡아준 지관을 쏘아 죽였다는 전설에서 벌 고개라고 하였는데 인근에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이 있어 서오릉 고개라고도 하였다.
③ 앵봉산 생태길(2코스)
봉산과 앵봉산을 이어주는 서오릉고개일까 ? 봉산과 서오릉을 나뉘는 고개일까 ? 아니면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 덕양구를 오가는 고개일까 ? 은평구와 고양시를 구획하는 고개일까 ? 분명한 것은 봉산과 앵봉산으로 막힌 은평구와 덕양구를 오고가는데 벌 고개를 넘어 가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분리와 만남의 고개, 그리하여 예전 사람들에게 고개는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가 되어 아리랑 고개라고도 불렀던 우리의 고개에는 사연도 많아 수많은 설화를 남겼지만 교통의 발달과 함께 자연으로서의 재는 사라지고 자동차 길이 되어 단지 등산을 위해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고개의 파괴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이자 우리의 정서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오릉 고개에서 설치되었던 방호벽을 철거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백두대간, 낙동정맥등 우리의 산줄기를 종주하면서 자동차 도로를 개설하면서 훼손된 고갯길과 아파트, 공장지대를 건설하면서 여지없이 파괴된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국토의 창조적 개발을 꾸준히 외쳤다.
그 후 공교롭게도 우리의 고갯길에는 동물의 이동통로를 개설하여 끊어진 생태계를 복원하고 고개에 서린 유래비를 세웠고 대규모 택지를 개발하면서 환경문제를 최우선시 하는 현상을 매우 의미 깊게 받아들이며 마치 내가 이룬 것인 양 기뻐하였다.
이곳 서오릉 고개도 뒤늦게 방호벽을 철거하고 개발 중에 있으니 준공이 되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친환경적인 벌고개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밭길로 진입하여 앵봉산을 오른다.
앵봉산은 북한산 “ 비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줄기가 향로봉과 불광사 뒷봉우리를 거쳐 박석고개를 넘어 235.7m의 봉우리를 이룬다. 이 봉우리는 대동여지도에 효경봉孝敬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오릉의 주산이 된다”<서울의 산.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간>고 하였다.
산기슭의 갈현동 일대에 거주하던 박씨 문중에서 대대로 효자가 많이 태어났다 해서 효경산이라 하였는데 꾀꼬리가 많이 서식하여 꾀꼬리봉으로도 부르다가 한자화하여 앵봉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외 응봉, 서달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
고요한 숲길의 앵봉산,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이 자리 잡고 있기에 앵봉산에 오를때면 항시 서오릉에 가보지 못하고 지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쉽다. 산등성이에는 담장이 쳐 있고 담장으로 진입하면 바로 서오릉이지만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서오릉이 앵봉산에 있고 앵봉산이 서울둘레길. 은평둘레길 이라면 서오릉도 답사하고 둘레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재정비하면 얼마나 좋을까 ?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앵봉산에서 이러한 한가한 생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곳이 바로 북한산 족두리 봉이 일구어 놓은 효경봉孝敬峰이 아닌가 ! 孝, 소리만 들어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고 땅을 굽어 볼수 없는 죄인이 된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효경봉 孝敬峰
孝子의 덕이 쌓여 이룬 봉우리
孝敬峰 !
발걸음이 두렵다
어리석은 사람은
십대에 아버님을 잃고
사십대에 어머님을 여의고서야
親不待를 외쳤다.
사모곡은 눈물이 되고
눈물은 한이 되어
맺힌 가슴 부여안고
효경 봉에 오르려니
꾀꼬리마저 자취를 감췄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음을
어버이 살아계실 때
왜 깨닫지 못하였을까 !
앵봉산에서 내려서니 탑골생태공원이다. 환경의 중요성을 깨달아서인지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면 산기슭은 예외 없이 자연과 함께 호흡을 할 수 있는 생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자연학습도장이 되고 청춘남녀에게는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지만 길을 걷는 나그네에게는 항시 자연에 젖어 있기 때문인지 인위적인 공간으로 느껴지어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탑골 생태공원에서 아스팔트 도로변의 보도블록을 따라 걸어가는 곳은 조선 중기부터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역참이 있었던 곳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이 일대를 예전의 의미를 살려 구파발동으로 지정하였다. 3호선 전철 구파발역 4번 출구에 이르니 인공폭포를 조성하여 놓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 말산의 들머리이다.
④ 이말산 묘역길(3코스)
해발고도 132.7m의 야트마한 동산과도 같은 이말산은 매장문화의 보고라고 하는데 그 유래는 매장문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리茉莉또는 재스민이라 불리는 식물을 뜻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이 성묘를 다녔던 곳으로 오늘날에는 진관 근린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이말산과의 첫 인연은 버스를 타고 삼각산 진관사를 가면서 차창 밖으로 스치는 산마루를 바라보면서 저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면 버스를 타지 않고 진관사에 이를 수 있다고 막연한 생각을 하였던 곳이다.
그후 북한산 응봉능선을 가고자 구파발역에 이르렀을 때 인공폭포 옆에 계단이 설치된 것을 보고 무작정 진입하여 이 산이 이말산임을 알게 되었고 손쉽게 진관사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말산이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식물인 말리를 뜻한다는 그 유래와 달리 조선시대 내시, 상궁, 평민들이 잠들고 있는 곳이었다. 산등성이에 세워놓은 안내문에는 이 말산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말산은 매장 문화재의 보고
여기저기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 조상의 흔적
등산로에서 발견되는 돌무더기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조선 초기와 중기와 장묘 문화가 집중된 구파발 일대의 진관 근린공원과 기자촌 갈현 근린공원에는 그 직책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왕의 특별한 신임과 사랑을 받았던 상궁들을 비롯한 내시들이 묘지가 즐비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저기 문인석의 잘린 목, 산사태로 절반의 흔적만 남아 아들 낳게다고 갈아간 흔적이 선연한 동자상의 코, 어느 집 앞에 단체로 수집 전시된 석물들을 보면 마음의 서글퍼집니다.
늘 접해 왔음에도 전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던 주변의 소중한 유물과 유산들, 우리 모두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그러기에 이말산은 왕의 남자, 임금님의 여인이 된 얄궂은 운명속에 살다가 이승을 하직하여 이 산에 어디에 묻혔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봉분은 파헤치고 무덤을 지켰던 석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뒹굴다가 땅에 박히어 계단이 아닌 계단이 되었고 때로는 미끄럼움의 방지턱이 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앉아 휴식하는 펀펀한 돌이 되어 등산객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이말산.
표고 132.7m
이말산의 말리는
자스민차, 香片으로
이말즉 말리라는 식물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지만
누군가는
왕의 남자, 임금님의 여인이란
이름으로
이승을 하직하여
일가친척 찾아와
장지를 물으면
이 마을 어느 곳에
매장하였다 하여
이말산이라 하였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아서인지
언제나
이곳에 오면
가슴이 찡한다.
⑤ 은평 북한산 둘레길(4 코스)
이말산을 내려서면 삼각산 진관사<북한산 진관사라고 부르고 싶지만 사찰에서는 무슨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삼각산 000사로 표기한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삼각산 진관사로 기록한다.>의 입구로 북한산 비봉능선이 장쾌하게 뻗어있고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우뚝 솟아있는 경관에 모든 사람들의 탄성을 지르게 하는 곳이다.
횡당보도를 건너니 은평 한옥마을을 조성 중에 있다. 이곳은 하늘이 복을 내린 터<天福之地>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중에 있다고 선전을 하고 있었지만 속칭 명당이라는 곳은 집안이나 자손이 잘되게 되는 좋은 땅을 의미하는데 그 좋은 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덕성을 함양하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될 수 있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결점을 고치면 참다운 사람이 되는 것처럼 아무리 나쁜 땅도 그 허한 기운을 보완하는 부족한 것을 도와 버려졌던 땅을 생활의 공간으로 탈바꿈된 곳이 진정한 명당으로 여기며 그러한 곳을 보고 싶은 것이다.
다만 이곳에 운평 뉴타운을 건설하면서 현대식 건물인 아파트 단지가 아닌 한옥으로 주택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길 뿐이다. 아파트 또는 서양식 건물은 화려하게 보이는데 주변의 자연 경관을 헤치고 있지만 우리의 전통 가옥인 한옥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있어 그 자연을 더 한층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한옥, 그 신비의 마술은 무엇일까 ? 라는 생각을 해 보며 선림사로 향하였다. 북한산의 기자촌 연신내 지구의 북한산의 바위로 뭉쳐진 능선을 바라보니 여인의 속살같이 광채를 띠어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산마루에 오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쉬움 속에 은평 둘레길 기자촌 지역을 벗어나니 고요한 숲속의 사찰 선림사였다. 둘레길 어디인들 숲속이 아닌 곳이 있으랴마는 선림사는 고요함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었다. 다만 고요한 숲속과 달리 절의 건물은 다소 위압적인 듯하다.
<大雄寶殿 柱聯>
法身普遍十方中 법신은 시방 세계 속에 널리 계신데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의 부처님은 모두가 똑같구나
廣大願雲恒不盡 넓고 크신 원은 항상 다함이 없는데
汪洋覺解渺難窮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 알기 어렵구나
常照金光般若月 어느때 어느 곳에서도 금빛 지혜의 달을 비추니
山河大地現眞光 산하대지에 참다운 빛이 밝구나
중국의 소식 선생은 ‘ 개울물 흐르는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이고溪聲便是廣長舌, 산이 솟아 있는 모양 그대로가 어찌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아니랴 ?山色豈非淸淨身“ 라고 하였다.
장님은 부처님을 만나고도 알아 보지 못하여 절에 오면 항시 작아지는 모습을 발견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오늘도 고요한 숲속의 선림사를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긴 채 바쁜 걸음으로 장미공원으로 향할 뿐이었다.
장미 공원 2.2km를 알리는 이정표에서 종착지가 임박하였음을 느낀다. 서울 둘레길을 걸을 때에는 더위에 지쳤는지 장거리 도보로 지쳤는지 이를 깨물고 진행한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오늘은 도시속의 숲길이 무엇인지 확연히 깨달으며 정적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어 그 이름데로 구름속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탁 트인 하늘과 도시 풍경을 조망하면서 아래로는 나무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널리 이름난 구름정원길의 스카이 워크길을 걸으며 넘치는 기쁨이 샘솟을 때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중년 부부들의 주고받는 이야기 들린다.
‘ 북한산에 둘레길이 생기고나서 멀리 여행가기가 싫어졌어. 가까운 거리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힘들게 멀리 지방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 같아 ’ 물론 전적으로 동의할 수 는 없지만 은평 둘레길의 북한산 구간은 모두에게 걸으면 걸을수록 신명나는 길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길이다.
구름 전망대에 이르러 은평구 일대를 조망하였다. 오전에는 반대방향의 백련산, 봉산에서 이곳을 향해 조망하였고 오후에는 오전에 올랐던 백련사 기슭을 향하여 조망하고 있으니 오늘 하루를 은평구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장미공원에 이르니 많은 등산객들이 서성이고 있다. 이곳의 주봉은 족두리 봉이다.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족두리봉은 작은 인수봉으로 불리고 있는 것처럼 암벽 전문가의 요람이며 그 작은 높이<△367m>에 비하여 그 아름다움은 우리의 산악 가운데 첫 번째라고 하여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는 곳이다.
은평 둘레길은 장미공원에서 족두리봉과 반대방향인 무명봉으로 오르야 한다. 지금은 북한산 둘레길의 옛성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길이되었지만 예전에 이 길은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지 않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했던 곳이다.
응암동에 살 때 이곳의 풍광에 반하여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올라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랬던 이 길이 이제는 북한산 둘레길이 되었고 은평 둘레길이 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길이 되었다.
‘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下自成蹊’는 옛말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항시 이곳에오면 설레는 마음 감출 수없다. 서울시 우수 조망 명소의 하나인 전망대 바위에 이르러 다시금 은평구와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고 마음을 씻어내며 생태연결다리에 이르렀다.
산골고개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끊어졌던 북한산과 백련산이 다시금 하나가 되는 생태연결다리의 복원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마을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 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바랬던가 ! 생태연결다리. 이제 북한산 보현봉에서 흘러내린 홍제천에서 백련산에 올라 북한산까지 오로지 하나뿐일 길을 따라 올라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북한산과 백련산이 본래가 하나의 산임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은평 둘레길
가깝고도 먼 젊은시절
보금자리를 폈던
은평구에 길이 열렸다.
1코스,2코스,3코스 ,,,
여기는 봉산.
저곳은 앵봉산, 이말산
이곳은 북한산
저곳은 불광천, 백련산
모두 5코스 24.2km
한 두 번
가보지 않은 곳이 없고
거짓말 조금 보태
수없이 걸었지만
둘레길로
마주하니
두근거린다.
떠난 사람 다시 찾고
은평구민 하나 되는
다시
걷고 싶은 길
● 일시 : 2017년2월25일 토요일 맑음
● 구간
- 09시10분 : 산골고개
- 09시40분 : 은평정
- 10시17분 : 불광천
- 10시34분 : 서울둘레길 합류지점<불광천상>
- 11시00분 : 팥배나무 군락지
- 11시35분 : 봉산.
- 11시54분 : 서오릉 고개
- 12시46분 : 탑골 생태 공원
- 12시57분 : 구파발역 2번 출구
- 13시37분 ; 한옥마을<진관사 입구>
- 14시27분 : 선림사
- 15시21분 : 구름전망대
- 15시39분 : 장미공원
- 16시35분 : 생태 연결다리
● 총소요시간 : 7시간 2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