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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해세(海稅)
정의
1750년(영조 26) 균역법 성립 이후 국고로 돌려 균역청 수입으로 삼게 한 왕족 및 궁방의 어전세·염분세·선세.
개설
균역법은 양역(良役)의 군포(軍布)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반감해 균일화한 조치였다. 그 결과로 생긴 국가 재정의 부족을 다른 방법으로 보충해야 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이전까지 왕실에게 징수권이 부여되었던 어전세(漁箭稅)·염분세(鹽盆稅)·선세(船稅)를 국가 재원으로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해세의 설정에는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황해도에는 본래 어장세가 없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일괄적으로 어세를 할당하기는 어려웠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선세에는 어망세(魚網稅)가 별도로 부과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어 지역에 따라 사정이 서로 달랐다. 또한 선세 부과 대상에서 진상선(進上船)은 구별해서 제외시켜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영조실록』 27년 2월 21일]. 어염세를 부과할 때 기준이 되는 어전(漁箭), 즉 물고기를 잡기 위해 꽂아 두는 장대 등의 장치와 염전(鹽田)을 측정하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따라서 연안 지역 주민들은 균역법이 현실에서 의도하였던 균세를 실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이미 1699년(숙종 25)에 어전세와 염분세를 더 이상 왕실에서 거두는 것[折受]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어명이 내려진 바 있었다. 그러나 왕실과 기타 국가기관들은 계속해서 연안 지역의 어염선세(魚鹽船稅) 징수권을 유지하였다. 1734년(영조 10)에는 호조 판서가 어염선세는 호조에서 관리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므로 왕실이나 다른 관서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10년 1월 5일].
균역법에서 국가 재정의 결손을 보충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해세 이외에도 결포(結布)·결작미(結作米)·결전(結錢)이라는 이름으로 토지에 세금을 부가하여 징수하였다. 병사의 상위 직급으로는 선무군관(選武軍官)과 같은 군관직을 설정하여 그들에게 군관포(軍官布)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등재되지 않고 숨겨져 사실상 향리들의 수입과 지방 재원으로 사용되던 은결(隱結)을 찾아내어 국가 재정으로 전환하였다. 해세를 비롯한 이들 재원은 각 도(道)를 통하여 중앙 재무 기관인 호조 산하의 선혜청과 균역청에서 일률적으로 납부 받아 국고에 넣었다. 그 후 다시 각종 국가기관으로 배분되었다. 균역법은 부세의 토지세화, 중앙 재무 기관을 통한 재원의 지배라는 점에서 재정의 중앙집권화를 한층 진행시킨 정책이었다.
참고문헌
박성준, 「1894~1910년 해세(海稅) 제도의 변화와 세제 정비의 방향」, 『한국사연구』 128, 2005.
이욱, 「균역법을 통해 본 18세기 조선의 상업 과세 정책」, 『국사관논총』 86, 1999.
향도군(香徒軍)
정의
장례 의식에서 상여를 메는 일꾼.
개설
향도는 본래 삼국 시기 불교 수용 이후 종교적 결사체로 조직되었다. 고려전기에는 불상·종·석탑·사찰을 조성하거나 법회·보시·매향 등의 행사에서 대규모 노동력과 경제력을 제공하는 등 불교 신앙 활동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고려후기에 이르면 향촌 공동체적 기능이 강화된 조직으로 변모하였다. 재회(齋會)·매향·염불뿐 아니라 상호 부조 행위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 16세기 이후 지방 사회에 향약이 보급되자, 향도는 그 하부구조로 편입되었다. 향약 중 상사(喪事)에 관한 규정이 포함된 것은 종래 향도의 기능을 대신한 것이었다.
17세기 이후 이앙법의 보급 등 농업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향도의 조직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때부터 농업에서의 공동 노동과 관련된 향도의 기능은 상당 부분 두레로 넘어갔다. 향도는 상장(喪葬)의 일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상여를 메는 향도군(香徒軍), 곧 상여꾼을 내는 일이 그것이었다.
담당 직무
장례 시 상여 메는 일을 비롯한 부조의 일을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후기 도시 및 주변에서 향도군은 임노동자의 한 유형이 되었다[『영조실록』 4년 5월 9일]. 이들은 장례 시 상여꾼으로 고용되었으며, 공사(公私)의 각종 역사에서 운송 노동을 담당하는 담군(擔軍)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산릉역에서는 석재를 나르는 일에 도성 및 인근에 거주하는 향도군이 고용되었다. 이들은 도시 빈민층으로 임노동에 종사하였는데, 일정한 소속이나 작업이 없는 무뢰배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간행준비위원회 편,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3.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요역제 부역노동의 해체, 모립제 고용노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한국사회사연구회 편, 『한국 전통사회의 구조와 변동』, 문학과 지성사, 1986.
이태진, 「17·18세기 향도조직의 분화와 두레 발생」, 『진단학보』 67, 1989.
채웅석, 「고려시대 향도의 사회적 성격과 변화」, 『국사관논총』 제2집, 1989.
호내잡역(戶內雜役)
정의
민가에 부과된 요역, 혹은 민가에 부과된 공물과 요역.
개설
조선전기의 호내잡역은 호역(戶役)을 의미하였다. 호역은 개별 민가에 부과된 부역(賦役)을 뜻하며, 특히 요역을 지칭하는 일이 많았다. 넓은 의미로는 공납(貢納)과 요역을 아우른 개념으로 쓰였다. 따라서 토지에 부과되는 전세와 인신에 부과되는 신역(身役)을 제외하고 민가에 부과된 현물과 노동력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쓰였다.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에는 연호잡역(烟戶雜役)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요역은 군역·직역(職役) 등의 신역과 달리, 개별 민가를 대상으로 불특정 노동력을 차출하는 부역을 의미하였다. 또한 신역과 달리, 원칙적으로 신분의 고하를(높음과 낮음을) 불문하고 민호에 부과되었는데, 이러한 요역을 곧 호역이라고 하였다. 호내잡역이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호역은 개별 민호에 부과된 부역을 뜻하며,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공납의 의무도 포함되었다. 공납은 요역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요역이 과중할 경우 공납을 덜어 주거나, 새로운 공납의 의무를 부여하면서 다른 요역 종목에서의 차역을 면제해 주는 것도 요역과 공납의 긴밀한 상호 관계를 보여 주었다.
공요(貢徭)라고 하면 요역과 공납을 모두 통칭할 수 있었다. 혹은 전세를 제외한 잡부라는 뜻으로 호내잡역이나, ‘전세외요역(田稅外徭役)’이라 하여 공납과 요역을 총칭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4년 4월 10일]. 다만 요역·잡역 등이 보다 확대된 개념으로 쓰였다. 이와 같은 용례는, 요역과 공납이 모두 개별 민가의 호역을 구성하고 있었던 공통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변천
조선후기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 호역은 농민에게 부과된 요역·잡역을 뜻하는 연호잡역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강제훈, 「조선초기 요역제에 대한 재검토: 요역의 종목구분과 역민규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45, 1995.
김종철, 「조선초기 요역부과방식의 추이와 역민식의 확립」, 『역사교육』 51, 1992.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 10, 1986.
호료병포(戶料兵布)
정의
조선후기 일반 관청의 상급 관원으로부터 하급 이예에 이르기까지 지급되는 급료 중 요미는 호조에서, 요포는 병조에서 지급하였기 때문에, 이를 아울러서 부르는 말.
내용
조선후기 호료병포(戶料兵布)는 호료(戶料)와 병포(兵布)를 함께 지칭한 것이었다. 호료는 호조(戶曹)의 각종 세미(稅米) 수입으로 구성되었으며, 병포는 비상번병(非上兵番)·군보(軍保) 등으로부터 실역을 부담하지 않는 대가로 병조가 거두어들이는 군포 수입으로 이루어졌다.
호료병포는 관청의 원역(員役)에게 급료로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기적인 잡역이 있을 때 고용되는 인부들의 고가로도 지급되었다. 호료병포는 17세기 이후 모립제 하에서 모군의 고가(雇價)를 위한 재원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677년(숙종 3) 남별전(南別殿) 중건, 1744년(영조 20) 숙종 명릉(明陵)의 개수(改修), 1764년(영조 30) 수은묘(垂恩廟) 영건, 1783년(정조 7) 영조 원릉(元陵)의 개수, 1785년(정조 9) 영우원(永祐園)의 보토(補土) 공사 등에서 호료병포만으로써 모군·장인 등의 고가를 마련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용례
命宮墻修築 依都城例 三軍門各就所管字內擧行 修築時 亦依都城例 劃給戶料兵布 是日命諸將臣 看審形趾 自景秋門宮墻始築 以纔經賊變也 [『정조실록』 1년 8월 10일]
참고문헌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호보(戶保)
정의
정군으로 중앙에 가서 번을 서거나 군사훈련 등의 실무를 수행하는 호수와 그에 딸린 봉족, 혹은 보인을 함께 가리키는 말.
개설
조선시대 군제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 신분의 모든 남성을 군역 복무자로 하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 중에서 중앙에 번을 서러 가거나 지역을 지키는 정군(正軍)을 호수(戶首)라 하고, 이 호수의 경제적 뒷받침을 맡은 자들을 봉족(奉足)이라고 하였다. 호수의 역종에 따라 상응하는 수의 봉족이 배정되었는데, 이 호수와 봉족이 하나의 군호(軍戶)를 이루었다. 군호의 편제에 기초한 호수와 봉족을 ‘호보’라 통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역의 종류에 따라 나누어 주는 보인(保人)의 수는 달랐다. 갑사(甲士)와 장번(長番) 환관에게는 2보를 주었다. 양계(兩界)의 갑사는 1정(丁)을 더 주었다. 기정병(騎正兵)과, 취라치(吹螺赤), 대평소(大平簫), 수군(水軍)은 1보 1정을 주었다. 교대로 번을 서는 내관, 기잡색군(騎雜色軍), 한성에 머무는 제주자제(濟州子弟) 등도 같았다. 보정병(步正兵), 장용위(壯勇衛), 파적위(破敵衛), 대졸(隊卒), 팽배(彭排), 파진군(破陣軍), 조졸(漕卒), 봉수군(烽燧軍), 차비군(差備軍)은 1보를 주었다. 어부(漁夫), 보잡색군(步雜色軍), 제주의 기·보정병 및 수군 등도 같았다. 이 밖에 여러 잡직계열의 관원·생도 등은 동거하는 족친 중 1명, 서리·악생(樂生)·악공(樂工)·수부(水夫) 등은 2명, 원주(院主)는 3명을 주었는데, 각각 다른 역에 배정하지 않도록 하였다.
변천
1464년(세조 10)에 봉족제(奉足制)를 개편하여 2정을 1보로 한 보제(保制)가 성립되었다. 군호 단위의 호보 구성이 정군과 납포군으로 바뀐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납포가 매월 1필 이하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납포는 1515년(중종 10)에 1년에 2필을 징수하는 순수한 세납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군역은 그 복무를 타인이 대신하게 하고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립(代立)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지방의 정병도 자신의 대역(代役)을 찾았으며, 지방관도 군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 행위에 열중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실역(實役)을 지지 않는 대가로 1년에 2필씩의 군포(軍布)를 냈다. 병조가 오히려 이를 주관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실역이든 보인이든 군역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단순한 도망만이 아니라, 승려가 된다든지 세력자의 그늘에서 사노(私奴)가 되어 합법적으로 군역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반면에 정부는 임진왜란 직후부터 오군영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용병제(傭兵制)를 실시하면서 여러 종류의 군보(軍保)를 증설하고 보포를 징수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양역의 소속별·역종별 정족수가 재확인된 이후로, 1필 이상의 부담을 줄여서 군포를 1필로 균일화하는 논의가 있었다. 그것은 군포 부담을 일부 토지에 전가시키는 대신 모든 양인 군보가 1필의 군포를 납부하는 균역법으로 귀결되었다. 이로서 군호에 기초하여 편제된 호보의 체제는 사라졌다.
참고문헌
『각사수교(各司受敎)』
『수교집록(受敎輯錄)』
호전(戶錢)
정의
양인에게 부과되던 양역을 가호마다 얼마씩 돈으로 부과하려던 방법.
개설
호전(戶錢)은 18세기 전반에 상당히 유력하게 논의되던 양역변통책 중 하나였다. 양인의 인신에 부과하는 양역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집마다 일정액을 부과하는 호전이 논의되었다. 대개는 가호를 식구 수에 따라 대호·중호·소호 등 몇 가지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부과하려 하였다. 초기에는 포를 부과하여 호포제로 시행하려 하였으나 징수 수단을 포목에서 돈으로 바꾼 것이 호전이었다.
내용 및 특징
호전이나 호포 모두 결국 가호에 부과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징수 수단이 포인가 돈인가에 따라 호포와 호전으로 나뉘었다. 쌀이나 포목 대신에 돈을 내라고 하면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반대도 있었다. 돈으로 거둘 경우 동전이 많이 유통되지 않아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목으로 거둘 경우, 포목의 질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농간이 생길 수 있었다. 결국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포를 돈으로 거두기로 하였다.
변천
호전이 거론된 것은 숙종 말년부터였으나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750년(영조 26) 균역법을 제정하기 직전이었다. 영조는 처음부터 양역변통책의 하나로 호포제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호포는 박문수(朴文秀) 등의 건의에 따라 호전으로 바뀌었다[『영조실록』 26년 5월 17일]. 1750년 감필(減疋)을 결정짓기 직전, 5월 한 달 동안 호전을 부과하는 방안에 대하여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영조는 포목이나 돈을 바치는 양역을 모두 없애고 그 재정 결손은 호당 5전 정도만 부과하면 해결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액수를 산출하여 호당 부담을 확인해 본 결과 예상과 크게 달랐다. 대호(大戶)에 배정되는 액수는 2냥을 넘고 대호·중호·소호 평균을 잡아도 1냥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양역을 완전히 없애고 호전을 시행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고 모자라는 1필 부분만 호전을 징수해서 해결하는 감필호전(減疋戶錢)에 대하여 논의하였다[『영조실록』 26년 7월 3일]. 그러나 이 안 역시 가호의 색출을 가혹하게 해야 했고, 대호에 1냥을 부과해도 50,000냥의 재정 수입이 부족한 상황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반층의 반발이 강하였다. 결국 감필호전마저 포기하고 감필결포(減疋結布)를 기본으로 한 균역법이 1751년(영조 27)부터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제13집, 1982.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정만조,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호포(戶布)
정의
양인 신분의 사람에게 양역으로 부과하던 포를 가호에 부과하려던 방법.
개설
유포론(儒布論)과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호포론은 유포론보다 한 단계 발전한 방안이었다. 유포론은 양역은 그대로 두고 양역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유생에게도 포를 징수하자는 방안이었다. 반면, 호포론은 양역을 없애고 그 대신 모든 집마다 포를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층도 포를 부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호포론은 유포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어차피 두 방안 모두 양반층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면 양역제를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없애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므로, 결국 유포론은 사라지고 호포론이 남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모든 가호(家戶)에 포를 부과하자는 주장은 1656년(효종 7)에 병조 판서원두표(元斗杓)가 처음 제기하였다[『효종실록』 7년 2월 21일]. 이때의 호포론은 양역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양역변통책이 아니라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 후 현종대에 이르러 이유태(李惟泰)·민시중(閔蓍重)·정지화(鄭知和) 등이 양역변통책으로 호포의 징수를 거론하였다.
숙종 초에 오가작통법이 시행되고 호패사목이 제정되어 숨어 있던 양인 장정을 색출해 내는 사업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숙종실록』 2년 5월 25일]. 이때 사업에 대한 저항이 일자 윤휴(尹鑴)가 양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책으로 호포의 시행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 2년 1월 19일]. 이를 계기로 호포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후 1677년(숙종 3) 김석주(金錫冑)가 「호포의(戶布議)」를 지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호포는 1681년(숙종 7)에 김석주·이세화(李世華)가 주축이 되어 평안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시행 직전에 무산되었다[『숙종실록』 7년 12월 9일]. 그 후 1698년(숙종 24)에 다시 거론되었다가 수그러들었다. 전면적인 개혁이 저항에 부닥치자 숙종 말년부터는 양역을 1필만 감하고(줄이고) 나머지 1필만 호포로 해결하자는 감필호포론(減疋戶布論)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이 제정되기 직전에도 영조는 호포의 시행을 적극 검토하였다. 그러나 결국 무산되고 감필결포론을 수용한 균역법이 완성되었다.
변천
호포제는 19세기에 접어들어 지역적인 편차를 보이면서 마을 단위로 포를 납부하는 동포제(洞布制)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동포는 본격적인 동포는 아니었다. 이른바 ‘구파(口疤)’라고 하는 기존 양역제의 빈자리를 면(面)·리(里)가 나누어 공동부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동포제는 1862년(철종 13)의 민란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동포제는 양역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세금이 된 양역 전체를 동 전체에 부과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대원군 집권기인 1871년(고종 8)에 동포, 또는 호포라는 이름으로 전국 군현에 확대 시행되었다. 다만 이때에도 양반은 입역(立役)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물품으로 납부하는 경우에도 관인(官人)은 제외되었으며, 유학(幼學) 이하의 가호에만 부과되었다. 호당 부담액도 평민 가호보다 적었다.
양역이 특정 신분의 사람에게만 부과되었던 전근대적 부세 체제라면 호포제는 이를 부인하는 진보적인 세제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의 균역법 시행 단계에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이후 진행된 사회 경제적 변화는 양역제를 실질적으로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호포는 19세기의 부분적인 동포제를 거쳐 대원군 집권기에 전면적인 동포제·호포제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제13집, 1982.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편집위원회,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을유문화사, 1969.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호포법(戶布法)
정의
호를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고자 하는 군역 및 세제개혁 논의, 또는 그 제도.
개설
호포는 반드시 군역(軍役)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나, 조선후기에는 주로 군역과 관련하여 언급되었다. 조선후기의 호포법은 군역 대상자나 그 호(戶)에만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호에 고르게 군포(軍布)를 부과하고자 한 군역 변통 방안이었다. 그러나 양반층이 상민과 동등하게 군포를 낼 수는 없다는 반대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숙종대 여러 번 제기된 호포법 논의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군역 재원에 관한 논의는 영조의 강력한 의지로 호포와 결포, 2가지 방안 중 하나를 실시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19세기 후반에는 수령의 주도 하에 지방에서 실제로 호포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대원군 집권 하에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하는 한편, 신분 상하에 관계없이 호당 2냥씩을 부과하는 제도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필요한 경비나 빈민구제를 위한 물자 마련을 위하여 은이나 미곡을 민간의 호 단위로 징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초에도 요역(徭役)을 질 장정을 동원하는 대신에, 민간의 호를 대·중·소로 나누어 호단위로 포(布)를 징수하였다. 1517년(중종 12)에는 함경도의 무격(巫覡)들에게 호포를 징수하여 군대의 물자로 사용하였고, 1601년(선조 34)에는 명의 칙사 접대를 위하여 외방에 빈잔호(貧殘戶)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민호에 호포를 징수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군역은 군호(軍戶)의 편제에 기초하여 부과되었다. 군호는 양인호(良人戶)를 대상으로 하여 실제로 번을 서는 정군(正軍)과 그것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봉족(奉足)으로 구성되었다. 요컨대 군역은 기본적으로 호를 대상으로 부과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를 거치면서 군역자가 개별 신역으로 파악되고, 봉족 또한 군포 징수로 전환되면서 군호의 편제는 현실성을 잃어 갔다.
군포 징수와 관련하여 1654년(효종 5)에 영의정김육(金堉)은 직역(職役)이 없는 양반 자제에게 군포 1필을 징수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군포 부담은 양인호에게 균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지속되었다. 숙종 즉위 초부터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그 인식은 다시 호포법논의로 전환되었다. “위로는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는 서천(庶賤)에 이르기까지 포를 내지 않는 호가 없도록 한다.”는 원칙 아래, 호포를 징수하여 군수(軍需)를 확충하고 양역을 줄여 주자는 윤휴(尹鑴)의 주장이 그것이었다[『숙종실록』 2년 1월 19일]. 이에 호포법 시행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중되었다. 실제 윤휴의 제안이 이상론으로 민간의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는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이후로 역종별 군액을 일정한 수로 고정하는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군적(軍籍)에 기초해서 군역 대상자를 파악하거나 해당 군액을 조절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호에 군역을 고루 할당할 것인지가 논의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관료들은 작은 폐단을 없애려다가 도리어 큰 폐단이 일어날 것이라 하며 호포제 시행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심지어 호포법 시행 논의는 국론(國論)을 분열시킬 것이라며, 호포에 관한 논의를 중지하라고 요청하였다[『숙종실록』 8년 1월 4일].
내용
1677년(숙종 3)에 윤휴는 도망자나 사망자·어린아이에게 포(布)를 거두는 것을 감면하는 일을 신속히 시행할 것을 재촉하면서, 호포를 인구수대로 계산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면 나라의 경비가 풍족해질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숙종실록』 3년 12월 5일]. 며칠 뒤에 부제학(副提學)이당규(李堂揆)도 사망자나 어린아이의 수를 계산하면 많아도 40,000~50,000명에 불과할 것이므로, 1명당 2필의 베라면 겨우 100,000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비록 양민으로서 역이 있는 자, 공천(公賤)·사천(私賤)으로서 공물을 바치는 자, 의지할 데 없는 환과고독(鰥寡孤獨)을 계산하여 제외시킨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역이 없이 한가롭게 노는 자는 적어도 200,000호를 밑돌지 않을 것이니, 호마다 1필의 베를 내면 그 수가 배로 될 것이며, 호에서도 해마다 베를 낼 필요가 없고 경비도 자연히 충분해질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숙종실록』 3년 12월 25일].
원칙적으로 모든 양인이 군역의 의무가 있었으므로 모든 양인호에게 고르게 군포를 부과하는 것이 군역 운영의 원칙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를 대상으로 포를 징수할 경우에 대호·중호·소호 등으로 호등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호마다의 부담이 균등할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호포법 논의는 각종 군문과 관서들이 개별적으로 군역 재원을 확보하려는 활동을 금지하고 군역의 역종별 액수를 고정화하여 군역 징수 체계를 중앙에서 통제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호포법은 통치 체제의 집권화 경향에 대한 논쟁거리를 신하들에게 제공하였던 것이다.
변천
호포법은 모든 계층에게 군포를 부과하면 소요가 일 것이라는 우려와 흉년을 빌미로 하여 시행을 못하고 있었다. 그 대안으로 모든 인구에게 포를 거둔다는 구포(口布)나 그것을 동전으로 거두는 구전(口錢) 논의가 제기되었다. 1714년(숙종 40)에는 숙종이 호포와 구전 중에서 충분히 강구하고 처리하도록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숙종실록』 40년 9월 21일].
군정의 폐단이 심해지면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호포법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호포법의 시행 효과를 어느 정도 반영한 제도들이 생겨났다. 군역에 대하여 지역에서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 즉 이정법(里定法)·공동납(共同納)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특히 호수에 기초하거나 호마다 분담하는 방식은 호포제와 다를 바 없었다.
호포법 논의는 이후 영조대에도 이어졌다. 박문수가 주장한 호전론 등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호를 기준으로 균등하게 군포 또는 화폐로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군역 재원에 관한 논의는 영조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하여 호포와 결포 2가지로 좁혀졌다. 이후 결포 논의의 연장선에 군포 부담을 1필로 균일하게 감축하고 그만큼의 부족한 군역 수입을 토지에 부과하는 균역법이 성립할 수 있었다.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문란하였던 환곡(還穀)·전세(田稅)의 개혁과 함께 군정에도 일대 쇄신책을 단행하면서 호포법이 다시 대두되었다. 1871년(고종 8) 3월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종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하고, 신분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호당 2냥씩을 부과하였다. 이때 양반들의 위신을 고려하여 양반호에 대하여는 호주명(戶主名)이 아닌 하인의 노명(奴名)으로 납입하도록-노명출포(奴名出布)-하였다.
참고문헌
김용섭, 「朝鮮後期 軍役制釐正의 推移와 戶布法」, 『省谷論叢』 제13집, 성곡학술문화재단, 1982.
송양섭, 「조선후기 군역제 연구현황과 과제」,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비평사, 2000.
지두환, 「조선후기 戶布制 論議」, 『韓國史論』 19,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