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첫 한국인 목사 3인은 누구인가?(1901년)
노 종 해(CM리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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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첫 한국인 목사안수: 김창식 목사/ 김기범 목사/최병헌 목사(1902 안수)
한국기독교 최초 한국인 목사안수 3인은 1901년의 김창식, 김기범, 최병헌 목사이다. 최병헌 목사는 모친상으로 1년 미루어 안수 받았으나, 동일한 년급이었다. 흔히 장로교회의 첫 안수목사 7인은 1907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한국인 최초목사는 감리교회의 1901년인 것이다.
한국기독교 선교(宣敎)의 특징 중 하나는 동족전도(同族傳道)에 있다. 동족전도로 한국인 전도인들이 한국인들을 전도하고 스스로 교회를 설립 자립해 나가는 토착교회(土着敎會)란 점이다. 즉 한국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자전(自傳) 뿐만 아니라 교회성장과 치리 및 활동에 있어서도 한국인 스스로 처리 신앙결단에 의하여 이끌어 나갔다. 이를 자전(自傳), 자급(自給), 자립(自立), 자치(自治) 교회를 이루어 나갔다.
동족전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선교사들은 우선 한 사람의 기독교인을 얻으면, 그로 하여금 가족과 친지, 이웃을 전도할 수 있도록 신앙교육과 성경공부를 시켰다. 또 기독교인이 된 한국인들도 자신의 가족과 친지, 이웃들 중에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을 얻도록 꾸준히 전도하여 그도 전도인 되게 하였다. 이러한 선교정책이 구체적으로 수립 된 것은 1893년 채택된 네비우스(Nevius) 선교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선교정책이 채택되기 이전에도 이미 선교초기부터 실천해 온 사항이며, 감리교회(監理敎會)의 경우에는 구역제도(區域制度) 자체가 평신도를 전도인 전도인(傳道人)과 설교자 및 성경교사로 세우기 때문에 동족전도를 교회설립 자체에서 시행하였다.
구역제도(The Circuit System)란 일정한 지역 안에 있는 예배처와 선교처들로 조직되며 구역장인 장로목사(Elder)와 구역내의 교회나 선교처를 순회하며 돌보는 집사목사(Deacon)가 있다. 또한 각 교회와 예배처 및 선교처(병원, 학교, 서점 등)에는 평신도 사역자들을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사업을 지도케 하였다.
구역(Circuit) 안에 있는 평신도 전도인들을 양성하고 훈련키위한 집회가 사경회(査經會)이며, 3개월에 한번씩 모여 각 예배처와 선교처의 신령상 형편을 살피며 조사하고 새로운 조치로 임명 파송하는 모임을 “계삭회”(季朔會, The Quarterly Conference)라 한다. 이 구역제도는 안수받은 목사(牧師)가 없어도 평신도들이 전도인 되어 교회를 세우며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제도일 뿐만 아니라, 구역 안에 있는 교회와 선교처들은 공동 및 연합선교에 참여하는 특징이 있다.
구역회의 기초 공동체는 속회(屬會, Class Meeting)이며, 교인 11-12명으로 편성된 속회가 모여 개체교회를 이루고, 이 교회를 인도하는 분은 “권사”(勸師, Exhorter)이다. 권사 중에서 한 개체교회를 맡아 지도하는 분을 전도사(傳道師, Local Preacher)라 하였다. 권사는 지방회(地方會, The District Conference)에서 매년 실시하는 사경반(査經班) 과정을 1-4년급까지 마쳐야 한다.
이러한 권사과정 마친 분들 중에서 목회자로써의 신령생활과 인품, 성품이 있고, 헌신결단을 보이는 분들을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전도사는 전도인 과정 즉, 신학반(神學班, Theological Class) 과정을 이수해야 했고, 계절마다 모이는 신학반(神學班, Theological Class)을 수료하면 목사안수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도인 과정을 마치고 한국기독교의 첫 한국인 목사로 안수 받을 이는 최병헌(崔炳憲), 김창식(金昌植), 김기범(金箕範) 3명이었다. 이분들은 1901년5월14일(화) 가리교 제17차 한국선교연회의 6차 회집에서 포웰(E.D. Powell) 선교사와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날 무어감독(Bishop David H. Moor)이 집례하였고, 김창식, 김기범 순으로 목사안수를 받았으니, 같은 날 목사안수를 받았으나 순서상으로 보면 한국인 목사안수 1호는 김창식 목사로 그 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병헌은 모친별세의 집안사정으로 목사안수를 1년 미뤄 1902년에 받게 되었다.
한국인 목사 제1호 김창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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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윌리암 J. 홀 선교사/ 조선의 바울 김창식 목사
1901년5월14일 한국인 최초 목사 1호로 안수 받은 김창식 목사(金昌植 牧師)는 어떤 분인가?
김창식은 1857년 황해도 성동면 생금리 부유한 농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1세부터 16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집안일을 돕다가 21세 되던 1878년에 서울로 올라왔고,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하였다.
김창식은 29세 때박노득 양과 결혼하면서 가정을 이루어 정착생활하게 되었고 1887년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때 이무영(李懋榮) 씨를 만났다. 이무영 씨는 ed시 정동교회 교인이며, 배재학당 학생이었다. 김창식은 이무영 씨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게 올링거(F. Olinger) 선교사를 소개 받아 집 관리를 맡게 되었다.
김창식은 1888년4월10일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 받았고, 성경공부와 교리문답서 등을 공부하며 기도하다가 자신도 전도인으로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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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변 평양성(1890년 대)-좌측;대동문.
김창식 씨는 1890년 정동교회 권사(勸師, Exhorter)로 피택 되어 평신도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1893년 올링거 목사가 귀국할 때 평양의료 전도사업으로 파송 받았다. 이미 1892년에 홀박사(Dr W.J. Hall)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전도하면서 8간짜리 한옥(韓屋)을 매입해 두었다. 김창식 권사는 1893년에 아예 평양으로 이주하였고, 홀박사와 통역인 노병선(盧炳善) 선생과 함께 반목과 박해 속에서도 전도활동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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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서문 안 풍경-성곽 앞 홀박사 기와집과 김창식 등 초가집들에서 남산재교회 창립(1893년)
평양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을 배척하였으나 홀박사의 의료진료 활동은 묵인하였다. 그러나 외국인보다도 그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을 증오하였다. 홀의사가 잠시 서울로 간 사이에 평양감사는 김창식을 잡아가두고 죽도록 매를 쳤으며, 예수를 배반토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김창식은 실신하면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김창식은 칼을 쓰고 묶여서 감금되었다. 홀박사와 마펫 선교사의 안타까운 호소를 통해 겨우 풀려나기도 했다.
김창식 권사는 1894녀 평양에서 있었던 청일전쟁(淸日戰爭) 때에도 평양을 떠나지 않았고, 교회를 지키었다. 다른 외국인들과 주민들이 피신을 갔어도 홀의사와 함께 남아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돌보고, 전염병으로 신음하는 주민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돌보 아 주었다.결국 홀의사 자신이 전염병에 걸려 서울로 호송되었으나 순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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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청일전쟁 터-진료하는 홀 선교사와 김창식 전도인
그러나 김창식 권사는 평양에 홀로 남아서 믿음으로 영혼들을 돌보며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서 평양의 주민들은 김창식 권사의 인간 됨을 알았고, 그를 따르게 되어 전쟁이 끝난 때에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기독교 복음전도가 활발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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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장터 모습(1890년 대)
김창식 권사는 1895년에 외부의 도움이나 보조 없이 한국교인들의 헌신으로 교회를 건축하였으며, 교회 옆에 학교건물도 지었다. 이 교회와 학교가 “남산재교회”(南山峴 敎會)이며 광성학교(光成學校)인 것이다.
김창식 목사는 평양과 서북지역 교회의 개척자로써 1929년 별세할 때까지 48개 교회를 개척설립하였고, 225개 처의 교회를 맡아 목회활동 하였다.
김창식 목사는 1906년 한국 첫 장로사(Elder)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 첫 감리사(監理師, Superintendent)이시었다.
김창식 목사는 해주에서 열린 사경회를 인도하시다가 쓰러지셨고, 1929년1월9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시였다.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써 순교자적 신앙으로 일생을 한국기독교 개척헤 헌신하신 목사님의 삶은 한국기독교의 최초 목사로써 오늘날 우리도 기억하고 본 받아야할 분이다.(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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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남산재교회(1903년 건축봉헌)-평양 최초 벽돌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