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여름 해바라기
박상재
민아 할머니는 화가이다.
“정순희 화백님!”
민아 아빠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할머니를 이렇게 부른다.
할머니가 붓을 잡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민아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니까 한 5년째 되는 셈이다. 할머니의 그림 소재는 주로 꽃인데, 그중에서도 해바라기꽃을 즐겨 그린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는데, 어머님도 이제 화가 다 되셨어요.”
민아 아빠가 이렇게 말하면 할머니는 부끄러워하며 손사래를 친다.
“화가가 추위에 다 얼어 죽었나 보다. 화가는 무슨….”
“아니, 당신은 어머님을 어떻게 서당개에 비유하세요? 어머님 그림 솜씨가 보통이 아니세요. 공모전에 내기만 하시면 틀림없이 상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민아 엄마가 콧소리를 섞어가며 말했다.
“공모전이고, 화가고 내게는 먼 나라 이야기야. 그저 심심해서 짬을 내어 잠깐 그리는데 뭘.”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싫지 않은 눈빛이다.
“아니어요, 어머님!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는 일흔여섯 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국민화가로 불릴 만큼 유명해졌대요. 어머님은 모지스 할머니보다 두 살이나 더 젊잖아요.”
“그래? 당신 이제 보니 아는 것도 참 많네.”
아빠의 얼굴이 할머니가 그린 해바라기꽃처럼 환해졌다.
“어머니가 연세 들어 그림을 그리시니까 내가 조사를 좀 해봤죠.”
민아 엄마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어느 날 민아가 꽃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할머니한테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화가 중에서도 누구를 좋아해요?”
“아니 민아 니가 왜 갑자기 그런 걸 다 묻냐?”
“우리 선생님한테 여쭈어봤어요. 해바라기꽃을 잘 그린 화가가 누구냐고 말이죠.”
“그랬더니 뭐라고 하시던?”
“외국의 화가 중에 고아라는 사람이 있대요. 이름이 참 웃기죠?”
“고아가 아니라 고흐란다. 할머니도 그 화가를 좋아하지.”
“음, 그렇구나. 그래서 할머니가 해바라기를 잘 그리시는구나.”
민아가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머니는 고흐의 해바라기꽃을 좋아한다. 이런 할머니에게 민아 엄마는 ‘고흐바라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어느 비 오는 여름날 할머니는 갑자기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을 한 권 사서 민아의 크레파스로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 어머니 그림 솜씨가 이렇게 훌륭한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요. 어머님 저희가 미처 몰라 뵈어서 정말 죄송해요.”
민아 아빠와 엄마는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말했다.
이튿날 아빠는 할머니께 유화 그림 도구를 사다 주었다.
이젤, 캔버스, 붓, 유화물감 등이었다.
“어머님 제가 모시고 갈 테니까 문화센터에 다니세요. 유화 물감 쓰는 법을 배우셔야 그릴 수 있잖아요.”
“그래 알았다. 그럼 딱 석 달만 배울란다.”
할머니는 뜻밖에도 민아 엄마의 부탁을 순순히 따랐다.
‘난 싫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 어머님이 그림 욕심이 있는 거야.’
민아 엄마는 수요일 오후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할머니는 물감 사용법을 열심히 배우더니 석 달 후부터는 혼자 집에서 그리겠다고 했다.
민아 엄마는 꽃집에 가서 해바라기를 사다 항아리에 꽂아 할머니 방에 두었다.
“조화이긴 하지만 진짜 해바라기처럼 탐스럽구나.”
할머니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가 넘쳤다.
할머니는 여름철 소나기가 오면 어김없이 해바라기 그림을 그린다. 이슬비나 보슬비가 올 때에는 그리지 않다가도 소나기만 오면 캔버스 앞에 앉았다.
‘할머니는 왜 소나기만 오면 꼭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실까?’
민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잠결에 소나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비가 많이 내리나 봐요.”
“그래 꽤 굵은 빗줄기 같구나. 어서 자거라.”
민아가 할머니 품으로 파고들며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 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그래. 뭐가 궁금한데.”
“할머니는 왜 소나기만 오면 해바라기꽃을 그려요?”
“소나기가 올 때마다 해바라기를 그린다고? 내가 그랬나? 하긴 그런 것 같기도 하구나.”
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아꼈다.
“할머니 제발 알려줘요. 궁금하단 말야.”
“우리 민아가 더 크면 말해줄게. 좀 더 자라서 고등학생쯤 되면 얘기해 줄게.”
“아이, 나도 이제 다 컸단 말야. 내가 고등학생쯤 될 땐 할머니가 없을지도 모른단 말야.”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내가 이야기를 해주마.”
할머니는 낡은 책상 속에서 일기장을 꺼내 읽듯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순희는 엄마와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었단다. 여고 2학년 때였지. 그해 여름에 전쟁이 났고, 학교는 일찍 방학을 했단다. 순희 엄마는 순희와 함께 시골 할머니 집으로 내려왔지. 순희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살던 집이었어.
그 마을에 경수라는 오빠가 살았단다. 순희보다 두 살 많은데 키도 크고 마음씨가 착한 총각이었어. 경수 오빠는 공부를 잘했지만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가지 못했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지.
순희가 중학교 1학년 때인 여름철이었어. 순희는 징검다리에 앉아 세수를 하고 있는데 경수 오빠가 지게를 지고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어. 지게 위에는 노란 해바라기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지.
“어머나, 해바라기 좀 봐. 참 예쁘다.”
내 말을 듣고 경수 오빠가 걸음을 멈추었어.
“순희야, 너 해바라기꽃 좋아해?”
순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경수 오빠는 해바라기꽃을 순희에게 내밀었어,
“오빠 고마워. 오빤 키가 커서 꼭 해바라기 같아.”
순희는 부끄러워 오빠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했어.
“내가 해바라기 같다고?”
경수는 씨익 한번 웃음을 날리고는 집으로 갔단다.
경수 오빠네 밭머리에는 해바라기가 줄지어 피어 있었어. 경수 오빠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심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 순이도 샛노란 해바라기를 좋아했단다. 키 큰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아버지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지.
순희도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그곳 시골에서 살았었어. 중학교 3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셨어. 해바라기가 한창 피던 여름철이었어.
그 여름 경수 오빠네 집 뒤란 텃밭에도 해바라기꽃이 한창이었지.
전쟁이 터진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야. 순희는 징검다리에 앉아 손을 씻다가 풀을 한 짐 지고 오던 경수를 만났단다.
“순희야, 한 동네에 사는데도 참 오랜만이다. 날이 많이 덥지?”
오빠의 얼굴에는 구슬땀이 흐르고 있었어. 순희는 그냥 수줍게 웃기만 했어.
“너 지금도 해바라기꽃 좋아하니?”
“그럼, 좋아하지.”
경수 오빠는 짐이 무겁지도 않은지 자꾸 말을 걸었어.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라도 있어?”
‘해바라기는 오빠처럼 키가 크잖아. 난 고흐라는 화가를 좋아하는데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특히 ‘해바라기’를 좋아해. 고흐도 나처럼 노란색을 좋아했거든.’
순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경수 오빠를 가르치는 것 같아 꾹 참았어. 오빠 앞에서 잘난 체를 하면 상처를 받을까 봐서였지.
“키가 커서 힘차게 느껴지잖아.”
순희는 ‘오빠처럼’이라는 말을 하려다 참았어. 경수 오빠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눈웃음을 지었어.
“경수 오빠, 풀짐이 무거워 보여. 어서 가. 다음에 또 만나.”
“다음에? 그래 그럼….”
경수는 또 한 번 웃어주고는 뚜벅뚜벅 걸어갔어. 순희는 경수의 넓은 어깨가 참 믿음직하게 느껴졌단다.
이튿날 먼동이 틀 무렵부터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어.
순희는 문득 엄마의 목소리에 잠이 깨었어.
“간밤에도 없었는데 해바라기가 왜 여기에 있지? 비에 젖어 있는 걸 보니 새벽에 누가 갖다 놓은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순희 할머니도 방문을 열었단다.
“도깨비 장난은 아닐 테고, 누가 꼭두새벽부터 꽃을 갖다 놓았다는 거여. 해바라기는 안성댁네 집 뒤란에 많이 피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순희도 방문을 열었어.
“참 얄궂은 일도 다 있다. 대체 누가 꼭두새벽에 이 커다란 꽃을 두 송이나 갖다 놓았지? 비까지 오는데 말여.”
순희는 문득 경수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마음속에만 담고 있었지.
“어머님! 돼지는 아무거나 잘 먹으니 이 꽃 돼지한테 줘도 되겠지요?”
어머니가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어.
“그래라. 소는 거칠어서 안 먹겠지만 돼지는 잘 먹을 게다.”
순희는 깜짝 놀라 어머니를 바라보았지.
“엄마, 왜 예쁜 꽃을 버려요. 그냥 두세요. 제 방에 꽂아 놓을게요.”
순희는 질항아리를 깨끗이 씻어다 해바라기꽃을 꽂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단다.
그날 밤 밥상머리에 앉았던 순희가 막 숟가락을 들려던 참이었지.
“아, 글쎄 경수가 군대에 간다네요. 경수 엄마가 참 안됐지요”
어머니의 말을 들은 순희는 갑자기 입맛이 싹 가셨어.
“안성댁이 힘들게 됐고만. 남편 죽고 아들 하나 의지하며 농사를 져왔었는데. 이제 누굴 믿고 사나?”
할머니도 긴 한숨을 내쉬었어.
“영장이 왜 그리 갑자기 나왔다냐? 그나저나 난리 통에 무사히 살아 돌아와야 할 텐데.”
“누가 아니래요?”
순희는 숟가락을 떠는 둥 마는 둥 멀뚱대며 시간만 보냈지.
“왜 밥 먹지 않고 깨죽거리고 있냐?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말거라.”
순희는 할머니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숟가락을 놓고 제방으로 갔단다.
이튿날 아침 일찍 경수 오빠가 순희 집에 들렸단다.
“순희 할머니, 어머니! 저 군대에 갑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경수가 우리 집까지 인사하러 왔구만~ 에고 마음도 심란할 텐데.”
순희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찔끔 비치었어.
“그래 몸 성히 잘 싸우다 꼭 돌아와야 한다.”
할머니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지.
“순희는 아직 안 일어났나 봐요. 안부 전해주세요.”
순희가 재빨리 방문을 열고 나왔단다.
순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말도 못 했어.
‘오빠 꽃 고마워.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해.’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어.
경수는 어줍잖은지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섰어.
“경수 오빠 고마워. 몸 건강히 잘 다녀와.”
순희는 경수 오빠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어. 경수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사립문 밖으로 겅중겅중 걸어 나갔단다.
10시쯤 되자 마을 사람들은 동구 밖으로 나갔어. 전쟁터로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기 위해서였지. 순희도 울먹이며 경수 오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어.
순희는 그 뒤로 경수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단다. 경수는 전쟁터에서 영영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할머니, 참 슬퍼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런데 할머니, 그 경수 할아버지 잘생겼어?”
민아가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래. 원빈보다 더 멋지게 생겼지.”
“정말? 그럼 현빈보다는?”
“현빈보다도 훨씬 더…. 그런데 민아야. 할아버지라는 말은 하지 마라. 경수 오빠는 할미 맘속에 늘 스무 살 청년으로 살아 있단다.”
민아는 할머니의 그림 속에서 늘 스무 살 경수 삼촌을 만날 수 있었다. *
박상재 아동문학가 약력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79년 서울신문에 동화 발표
*1984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방정환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PEN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아동문학학회 회장, 단국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동화집 『개미가 된 아이』『햄버거나라 여행』『돼지는 잘못이 없어요』등 100권
|
첫댓글 최영희 선생님! 졸고를 잘 교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박선생님, 확인 감사드리구요.
약력 부분에 사진 때문인지 파일 첨부가 안 되어
그냥 약력만 올렸습니다.
출판사에 원고 보낼 때도 만약 사진 첨부가 안 되면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