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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림절을 앞두고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 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 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그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 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가을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장석주, <가을의 시>
지난 주일(11월 26일) 주보에 실었던 장석주 시인의 <가을의 시>란 시이다. 계절은 분명 겨울로 넘어왔지만, 저만치 멀어져 가는 가을의 물음에 대해 아직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했기에 난 아직 겨울로 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느꼈기 때문이다. 뭇 생명들이 봄에 피어나 여름내 살찌우고 가을내 익어가는 동안 난 과연 무얼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이 여전히 고통과 아픔 속에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 내가 아무리 잘 살았다 한들 그것은 자기만족에 그칠 터! 난 제대로 산 것이 아닌 것이다.
시는 강렬하게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역설의 언어로, 기도의 형식으로 우리 존재의 폐부를 찌른다. 마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눅12:49) 하신 예수님의 사자후를 보는 듯하다. 불의한 현실을 보고도 그러한 것들에 관여되기를 꺼려하고 그저 서정적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이들, 자신의 욕망에 도취 되어 남을 마구 짓밟는 일을 서슴지 않는 이들, 제 배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어 가난한 이들을 보지 못하는 이들, 가장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실상은 허상을 좇고 있는 종교인들... 이들이 세상의 주류가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 시에 담겨 있다.
세상이 점차 수렁에 빠지듯 절망의 늪에 빠져들어갈 때 난 과연 무얼 했을까? 배고픔과 설움과 아픔이 세상 곳곳에서 울부짖을 때 난 과연 무얼 하고 있었을까? 수많은 사랑의 기회들 앞에 주저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많은 생각하지 않고 그 아픔과 고통에 있는 그대로 다가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이 더욱 컸던 이유는 지난 주일이 교회력의 마지막 절기인 왕국절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앙의 순례가 매듭되는 절기여서 빈약한 나의 삶의 내용에 더욱 초라해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또한 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이렇듯 완벽하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이 사실은 내 삶에 희망의 틈을 만들며 나를 위로한다. 만약 내가 완벽한 사람이었다면, 주저함 없이 모든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인간미 없었을까, 내 주위 사람들은 얼마나 숨이 턱턱 막혔을까. 그런 허술함 때문에 난 여전히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올해가 끝이 아니지 않은가!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다시 오기 마련이다. 사랑의 기회는 앞으로도 수없이 다가오고, 그것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아쉬움을 그저 아쉬움으로만 남기면 안 된다. 아쉬움이 보람이 되도록, 더 값진 의미가 되도록 우린 더 힘을 내야 한다. 그래서 이제 마주할 대림절이 더욱 의미있는 것이다. 대림절은 의미 그대로 기다림의 시간이다. 우린 무얼 기다리는가? 생의 의미를 가르쳐주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린다. 빛 되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신,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법을 가르쳐주신, 진리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신, 불의 앞에 당당히 맞서는 법을 가르쳐주신, 그래서 생을 참 값지고 의미있게 만들어가는 법을 가르쳐주신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은 마냥 설렘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닮음으로, 따름으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기다림이다.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보며 평생 그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을 기다린다. 평생 4명의 사람을 만나지만 그들은 그가 기다렸던 위대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어니스트 만난 네 번째 인물은 시인이었는데, 이 시인은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임을 알아차리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모두가 놀라며 인정하지만, 정작 어니스트 본인은 자신보다 더욱 훌륭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차분히 말을 하며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어니스트는 기다리는 이는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다리는 존재는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끝없이 추구하고 찾고 구한다. 그러면서 닮아가고 따라간다. 그렇게 닮아감으로, 따라감으로 기다림의 시간은 의미로 채워진다.
이제 곧 맞이할 대림절기는 우리네 마음에 두 가지 심상을 그려낸다. 칠흑 같은 어둠과 같은 현실과 그 현실을 가로질러 비추는 한 줄기 소망의 빛이 그것이다. 2천년 전 로마의 압제 속에 신음하던 민중의 한숨이 지금도 여전히 들려오고 있다. 그래서 우린 여전히 기다린다.
기다려 본 자는 안다. 기다림 안에 품고 있는 간절함과 애틋함과 일면 초조함을.. ‘무엇을 기다리는가’는 우리네 인생에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좌절과 절망을 경험한 이들은 다시금 딛고 설 한 줌의 희망을 기다릴 것이다. 죽음의 상황의 처한 사람이라면 구원과 회복을 기다릴 것이다. 만약 기다림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그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2.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기다림의 절기에 난 체코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다시 펼쳐 든다. 물론 이 책의 기다림(인내)과 대림절의 기다림(소망)의 의미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믿음과 희망에 가닿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지나는 우리의 신앙의 순례는 소망과 인내로 점철되어 완성되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이 책은 2014년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한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의 대표작으로,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 이야기를 통해 ‘믿음과 의심’에 관한 주제를 다룬다. 이 책 표지엔 “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라고 쓰여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생을 뒤흔드는 절망의 경험들을 통해 인생의 파고를 겪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기존 신앙인들에게, 또는 아예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저자는 ‘신앙’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안내한다.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키 작은 자캐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받았던 세리였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였다. 그는 예수에게 호기심은 있었지만 간절함을 가지고 군중들을 헤치고 목청껏 소리 지르며 예수께 나아갔던 여느 병자들처럼 열정적이지 않았고, 그저 돌무화과나무에 조용히 올라 멀찍이서 예수를 바라보던 소심한 이였다. 그렇게 누구도 찾지 않던 자캐오에게 예수께서 다가가셨고 이에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지만, 자캐오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구원을 감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자캐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을 의미한다. 그는 신앙인일 수도 있고, 타종교인일 수도 있고, 무신론자일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수많은 자캐오들이 존재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확실과 의심, 부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그 의심의 시간들은 인생을 소모하는 시간이라 여기지 말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하느님께 진실히 다가서는 시간이 된다고... 자캐오를 찾아가 말을 건넸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저자는 책머리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도 간혹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멀리 동떨어져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짓눌릴 때가 있다. 세상과 인생의 수많은 모순이 지닌 양면성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 같은 말마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이 체험도 달리 해석하고 ‘하느님의 부재’에 달리 접근할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한 서로 깊이 관련된 세 가지 인내가 있다. 이들은 각각 믿음・희망・사랑이라 불린다.”
저자는 의심 또는 불신앙과 신앙의 차이를 ‘인내’라고 생각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을 대면하는 인내의 세 가지 얼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내는 곧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옛 성인들은 ‘어두운 밤’, ‘구름 덮인 산’, ‘무지의 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런 의심의 시간들을 보내는 것은 뒤집어보면 열정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오히려 전혀 의심하지 않고 확고하게 믿는 이들의 그 믿음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 확고하다 여기는 신앙은 경직되어 있어 생동감이 없고, 상대로 하여금 질식시키게 만들며, 자기 스스로도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의 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 아니던가! 우린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손쉽게 단죄하고 상대를 규정하며 낙인찍어 혐오한다. 신앙인들은 이 땅에 풍요롭게 임하는 다양한 하느님의 은총을 다 막아버리고, 돈만 넣으면 바로 제품이 나오는 자동자판기처럼, 단순하고 간편한 신앙도식을 만들어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예수 믿으면(교회 나오면) 천국, 믿지 않으면(교회 나오지 않으면) 지옥. 얼마나 확실하고 간편한 도식인가.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 일(전도)이 협박을 일삼고 폭력을 서슴지 않는 구호로 전락하였다. 그 확신에 찬 구호는 2천년 전 뭇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심어주어 단지 벌을 피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노예로 전락시킨다. 이들은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구원과 심판의 자리에 스스로 앉아 사람들을 정죄하고 규정하며 심판한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잠시의 고민도 없이 지체 없이 판결한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을 그들은 직무유기라 여기는 듯하다. 믿음이 의심과 회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숙성되고 곰삭는 과정 없이 만들어질 때 그 믿음은 우리의 삶에 자유와 소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발목잡는 위험을 안겨다 주게 된다. 그 믿음은 얼마나 비신앙적이고,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우린 하느님 부재의 현실을 종종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체험 없이는, 그런 의심의 과정 없이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 즉 인내의 얼굴인 믿음, 소망,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할리크는 때로 주저하고, 때로 하느님의 부재를 토로하며, 때론 불경하게 여겨지는 낯설고 불편한 감정들이 우리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께 더욱 솔직히 나아가는 좋은 모습이라 여기고 있다.
그렇게 주저하고 의심하는 모든 이들의 표본으로 지금 '자캐오'가 서 있다.
“자캐오가 고질적인 개인주의자나 ‘아웃사이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열광의 무리에, 또는 분노의 무리에 줄을 서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돌무화과나무 가지 속에 은신처를 찾는다. 교만해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절대적 기준과 요구 조건에 견주어 한없이 부족한 자신의 ‘작은 키’와 큰 결함,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름을 불러준다면’ 자신의 사생활과 집착을 버릴 수 있고 기꺼이 버리려 한다. 그는 덥석 그 절대적 도전을 받아들고 자기 삶을 바꿀 것이다. 그러나 돌무화과나무 가지에 숨어 있는 이들에게 낯설거나 이질적이지 않은 사람,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 그들을 염려하는 사람, 그들 마음과 정신에 일어나는 일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캐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자캐오가 있다. 우리 세계, 우리 교회, 우리 사회의 운명은 이 자캐오들을 얼마나 얻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다.” (24쪽)
토마시 할리크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이 땅의 수많은 자캐오들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자캐오가 홀로 견뎌내며 걸어가는 인생의 과정 속에 하느님은 그와 함께 하며 그들을 위해 일을 하고 계신다. 십자가의 부재를 경험했던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쉽게 속단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되 하느님을 기다리며 인내로써 그 지난한 과정들을 견디어내라고, 그 끝에 부활의 주님이, 사랑의 하느님이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다고 할리크는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경계인들, 모든 자캐오들에게 다가가 속삭여 주자.
“행복하여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가운데에, 심장부에 올 것이다”(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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