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동호회 농구계에 나온지 13년이 흘렀습니다.길었나? 생각하면 아직도 그 시절본 사람들이 남아있고 농구를 하고 있어서 생각보다는 길지 않았던 것 같고 짧았나 생각하면 제 몸이 변해버린 것을 보면서 짧지만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대부분의 동호인들과 같이 농구가 좋고 땀흘리고 하이파이브하고 지면 분해하고 끝나면 맥주한잔 하던 그것이 너무 좋아서 비록 못했지만 농구가 정말 좋아서 그래서 더 해보고 싶어서 팀을 만들고 동호회 농구계에 발을 내딛으면서 설마 제가 몇만명이 보는 이 카페의 주인장이 되고 이렇게 수필을 통해서 평가하고 정리하는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조차 없었는데 어느덧 지나간 시간이 저를 상상치도 않았던 나래속으로 끌어왔네요.그 짧고도 길었던 시간들이 몰랐었지만 꽤나 깊었었나 봅니다.삶에 농구가 투영되었던 시간들이 다가왔으니까요.
생활이 힘겨웠고 사랑이 어려워 무너져갈때 제 옆에는 농구밖에 없었습니다.바닦을 튕기는 장난스러우면서 잔잔한 그래서 더더욱 경쾌했던 농구공의 드리들 소리에 묻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삶을 잊고 농구에 잠겨갔습니다.다른 무엇보다도 좋았기에 그래서 더더욱 미친 듯이 좋았던 농구였지만 그 농구보다더 어쩌면 더 빛나는 존재들이 제게는 있었습니다.정말 미친듯이 농구를 잘했던 그래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던 그런 선수들이 있었습니다.혹시나 대회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저희팀의 경기가 아니어도 구경을 가고 그리고 그들의 동작과 표정 그리고 소리들을 한곳에서 들을 수 있을 때 농구에 대한 열망이 또다시 터져오르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던 선수들이 있었습니다.어느덧 그들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그리고 변하고 있지만 제 삶의 모티브로 남았던 그들의 그 열망적인 플레이를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그 인간들이 아니었다면 저도 일반적인 생활인이 되어서 평범한 농구인으로 남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안겨준 플레이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①김세연(32.연세대 계농패.토파즈.삼성코닝)
농구명가 경복고를 나와 사학의 명문 연세대를 간후 그리고 연세대 기계과를 거쳐서 삼성코닝이라는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걸 보면 알수 있듯 FM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고 그리고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재미없는 표정의 남자 김세연은 농구장밖에서 보면 그냥 모범생에 가깝습니다.조근거리는 말투와 흥분하지 않을 듯한 학자풍의 안경속의 차분함을 대하면 이 선수가 보여준 그 엄청났던 플레이들을 떠오르게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하지만 이 학자와도 같은 차분함과 열정이 터지지 않을 것 같은 포지션 불분명의 선수가 필자의 13년의 동호회 생활중에 선출과 생체를 모두 망라해 보고 접해본 단한명의 최고의 선수입니다.말로는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평범한 외모에 정반대되는 화려함과 차분함속에서 끝없는 승부욕을 보여준 남자 김세연입니다.
김세연을 처음 본 것은 소속팀인 토파즈가 아니라 2003년경 문광부장관기 전국대회였습니다.당시 김세연의 나이가 20살인가 21살인가로 기억하는데 당시 멤버들이 가드라인에 당대 탑클래스 포가를 다투던 명지대 돌핀스의 손성엽과 SP의 귀공자 장도환 그리고 슛터라인에 쿠바의 슛터 정우인등이 앞선에 포진하고 있었고 센터라인에는 공격도 좋았지만 수비에서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던 레인보우의 괴물 오상훈과 공수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닥터바스켓의 임종학등이 포진하고 있어 이제 약관의 이 선수를 눈여겨 보는 선수는 없었습니다.대표팀이라는 것이 소속팀과 다르게 다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 많아 아직 어린 이 선수가 처음부터 눈에 띈 것은 아니었습니다.하지만 김세연은 당시 전국대회에 나온 기라성같은 상대들을 무너트리는데 있어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당시만해도 드리블을 치거나 야투를 던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때였는데 이 선수 골밑에서 리바운드와 세컨리바운드를 기가 막히게 잡아냈습니다.190을 갓 넘긴 약관의 이 선수가 전국의 내놓으라하는 센터들의 골밑에서 공격리바운드를 무수하게 잡아낸 장면은 지금까지도 필자의 기억속에 대단한 모습으로 남아있고 덕분에 서울이 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당시 대회 MVP는 가장 선참이었던 윤성모가 가져갔지만 실질적인 MVP는 포가인 손성엽과 김세연 둘중의 한명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정도로 김세연은 그렇게 전국을 제패하면서 동호회에 모습을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있었던 팀 토파즈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좋은 센터진이 우글거렸습니다.당대 최고의 센터라고 스스로 떠들고 다녀도 웃을 수 만은 없었던 엄청난 거구에 촌철살인의 입담을 자랑했던 박성우와 190 후반대의 신장이 좋고 힘이 좋았던 레블스의 센터 최성원(현 토파즈의 감독인 최성원과는 동명이인입니다) 그리고 동국대의 신장이 좋은 센터였던 지종민에 이슈의 핵이자 내외곽에서 모두 플레이가 가능했던 현 토파즈의 에이스로 꼽히는 이요한 여기에 비운의 탄력맨 김기태와 지금의 탑건으로 꼽히는 이진행과 김영신등 굴지의 센터진이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런 최고의 센터진들 속에서도 최고로 빛났던 건 이 선수 김세연이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무섭게 성장을 하면서 동호회팀들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당대 최고의 선수반열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그런 그가 더욱 무섭게 빛난 건 대학부였습니다.당시 그가 소속했던 연대 계농패는 기계과 소모임동아리로 체대중심의 볼캐이노와 중앙동아리인 공오친에 가려 빌을 못보던 때였습니다.하지만 그는 그 계농패를 이끌고 한양대배에서 당시 대학부 대표팀 12명을 뽑으면 6명 이상이 뽑히고 백업으로도 4강은 간다던 당대의 쌍벽인 박희철이 이끌던 수원대 콘돌과 후에 1:5의 경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승부가 될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주었습니다.비록 마지막에 점수차이가 벌어지면서 대패했지만 한 선수가 완전히 밀리는 팀을 이끌고 다른 선수들의 시너지를 마음껏 이끌어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했습니다.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득점과 리바운드,어시스트,수비등 전방위에서 맹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이때부터 소위 정통빅맨이 아니라 올라운더로써의 김세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속에 양팀 베스트가 수원대 콘돌이 채동식(세븐몽키즈),이현호(역풍),김우철(SYBC),김병호(NAO),곽호준(업템포),박희철(MSA),손우성(역풍),장수영(베어,MSBB)등이었고 계농패가 강구민,김세진,최정욱,한규동,김세연이었다는 점을 보면 멤버의 차이는 어마어마했습니다.실로 김세연의 위업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 경기이었습니다.
이후 김세연은 대학동아리배 주최 대회중 마지막 대회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연대배에서 강호들을 줄줄이 격파하면서 결국 우승을 이끌어냈습니다.무서운 기세였고 그리고 당대의 빅맨들을 줄줄이 무너트리며 멤버쉽에서 현격히 밀렸던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명지전문대배에서 당시 토파즈가 20대로만 대회에 출전하기로 하면서 주전들이 거의 모두 빠진 상황에서 고재필만이 주전급 멤버로 남았던 상황에서 벡업멤버들을 이끌고 당시 장민욱과 선우찬영 그리고 황주석등 베스트가 모두 선출이었던 CAD와 대격전을 치르면서 우승을 이끌어내 기염을 토했습니다.당시만 해도 한팀에 이렇게 젊은 선출들이 대거 포진한 팀은 드물었고 더더구나 당대 최고수준의 선출들이 포진해 예선전부터 파죽의 승리를 해온 CAD에 멤버들이 줄줄이 빠진 토파즈가 이길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는데 김세연이 가히 일당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면서 무섭게 터져나온 CAD의 외곽포에 치열하게 대항했습니다.결국 종료 몇초를 남기고 1점차로 CAD가 앞선 상황에서 토파즈는 작전타임 후 공격을 시도했고 이것을 김세연이 패스를 받은 후 득점에 성공하면서 역전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서울시 대표팀에서도 자신의 소속지역인 서울을 참여할때마다 우승 내지 입상으로 이끌면서 박희철과 더불어 내외곽의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됩니다.가히 전국을 아우르는 에이스라고 보아도 무방했습니다.또한 동갑내기인 박희철과 더불어 걸그룹 이름을 딴 원더걸스로 3:3 대회에 나서게 되면서 그시절 최고수로 꼽히던 대구 플라이의 전성기를 끝내면서 한동안 무적으로 시대를 이끌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은 것은 5:5 대회도 또한 토파즈나 원더걸스와 함께한 것도 아닌 2008년 KBL 3:3 대회였습니다.당시 페가수스의 멤버들이고 모두 가드였던 양진규와 김경록 그리고 조경훈등과 함께 3:3에 나선 것입니다.당시 대부분의 우승을 노리는 팀들이 2센터 1가드이거나 1센터 1원포워드 1가드 내지 3포워드 형식으로 대회에 나섰다면 이팀은 투가드에 원센터의 형식을 취한 것입니다.높이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는 평가를 뒤로 하고 결승에서 현 아울스 멤버들인 장민욱등이 포진한 상대팀을 무너트리며 우승을 거두었습니다.당시 나머지 3선수의 신장이 너무 작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바운드와 수비,득점등 전방위에서 활약한 김세연의 능력의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선수의 플레이에서 아쉬운 점은 이 선수가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MSA에는 약점을 보여주었는데 당시 MSA의 감독이었던 조현익씨는 이 선수에게 지금은 생사가 불분명한 명지대 돌핀스 출신인 빠르고 투지와 운동능력이 좋았던 김명철을 붙임으로써 그를 막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대부분의 팀관계자들의 예상을 깨고 잘막아냈던 것이 결과적으로 MSA가 토파즈에 역대전적에서 앞서는 계기를 만들었점 점이었습니다.그를 막을 때 키가 큰 대신 느리고 가로수비에 약한 센터보다는 작더라더 빠르고 가로수비가 좋으며 몸싸움에 능한 선수를 붙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에 대한 해법을 어느 정도 내놓았는데 일당백의 그가 약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라이벌전이었던 것 같습니다.또한 엘보를 잘 써 상대를 위협한다는 원성도 일부 있었는데 워낙 탁월한 기량을 보여 이런 부분을 상쇄시킨 점도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취업과 동시에 아산으로 내려갔고 이후 차츰 전성기의 컨디션에서 벗어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팀전체를 아우르던 시야가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고 190이면서도 빠르고 순간동작이 좋았던 모습들이 느려진데다 타 운동에 전념한데다 그의 팀내 후배들인 김영신과 이진행등이 무섭게 성장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양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전 끝난 광진구 대회에서 그동안 패배의 아픔을 연속으로 안긴 아울스전에 나타나 현 동호회 최고의 센터이자 이전 경기에서 토파즈의 골밑을 그야 말로 탈탈털었던 상대 에이스인 전상용의 수비와 그에 대한 공격에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팀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깜짝승리를 안기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습니다.이후 가정의 소중함을 보여주며 사라져 결국 결승전에 팀이 무너지는 원흉(?)이 되긴 했지만 한세대 그리고 한시대의 에이스로써 손색없는 모습을 보인 최고의 선수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이 선수와도 같이 공부와 학업 그리고 한시대를 휩쓴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요?기대하고 기대할 뿐입니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2007년인가 문광부전국대회에서 처음 플레이하는 걸 봤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삼성 이동준과 1:1을 진짜로 붙어서 서로 못막았다는 전설의 선수 ㅋㅋㅋ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