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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음을 품었으니 벌을 받을 것이라. / 호 10:1-15
각 나라의 국민성을 꼬집어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나라 사람들이 배에 함께 타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물로 뛰어 내리게 하려고 합니다. 그때 각 나라 사람들마다 그 방법을 다르게 해야, 뛰어 내리게 할 수 있답니다. 먼저 독일 사람입니다. 그들은 규칙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걸로 알고 있으니까, “뛰어 내리는게 규칙이다”라고 하면 뛰어 내린답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에게 “규칙이니 뛰어 내려라”고 아무리 그래봐야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뛰어 내리는게 요즘 유행이래” 그러면 된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뛰어 내리는게 돈 버는거래” 그러면 바로 뛰어 들고요. 그런데 이 이야기에 나오는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뛰어 내리는 거 공짜다”라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내린답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였습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이 있습니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내가 이 행동을 하면, 그리고 이런 삶을 살면, 또 이런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얻기 위해 사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됨을 포기 하고라도 온갖 죄악을 행합니다. 지식과 명예에 대한 욕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 한 가지도, 어느 한 곳도, 거짓과 부패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악을 계획하고 저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들었고, 또 계속 듣고 있어서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속에 젖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시편 128:2절에서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건만, 수고하고 노력하여 씨를 뿌린 만큼, 얻게 되는 것이 참 복인 줄 알지 못하고, 불로소득에 눈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시겠습니까? 그게 어디 제 정신인 사람이 할 노릇입니까? 아무리 공짜라도 양잿물을 마시면 곧 죽습니다. 세상 유혹에 빠져 시력을 잃은 것처럼, 앞 뒤 못 가리고, 삶의 목표와 참된 소망을 잃어 버렸습니다. 마음을 다스림 받아야 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무너진 것입니다. 스피드 스케이트 경기를 할 때,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 빨리 가는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기판에서 아무리 내 말이 상대편 말 보다 많이 남아 있어도, 왕이 죽으면 끝나는 겁니다. 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 영화, 세상 명예를 산더미 같이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내 영혼이 죽으면 그만입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끝나는 것을 종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우리 인생 종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공짜라고 양잿물을 마시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게 어디 수천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었던 일입니까? 우리에게도 공짜니까 마음껏 마시라고, 양잿물로 유혹하는 것이 쉬지 않고 밀려들고 있습니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쉬운, 그리고 좀 더 세상적인 것들이, 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것도 큰 복으로 여기지만, 또 어떤 사람은 큰 것도 작은 복으로 여깁니다. 느낌은 자유입니다. 작은 것을 큰 복으로 느끼는 것도 자유고, 큰 것을 작은 복으로 느끼는 것도 자유입니다. 누구도 그걸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 있습니다. 큰 것을 작은 복으로 느껴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큰 것을 받고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작은 것을 받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작은 것을 큰 복으로 느끼고 감사할 때 행복이 찾아옵니다. 행복은 감사라는 통로로 들어오고 불평이라는 통로로 빠져나갑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범사에 행복하기를 바라서였습니다. 우리가 복을 구하는 데는 열심입니다. ‘하나님 복을 주세요. 하나님 이런 복을 주세요. 저런 복을 주세요.’ 그럼 복만 많이 받으면 예수를 더 잘 믿을까요? 지금까지 예수를 시원하지 않게 믿었던 이유가, 단지 복을 많이 받지 못해서였을까요? 복을 받는 것과 예수 잘 믿는 것이 얼마나 관계가 있을까요?
1절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곤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열매가 없거나,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묘사됐습니다. 열매를 맺는다고 해도, 얄궂은 들포도 같은 열매를 맺었다고 질타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의외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 자체가 복입니다. 그렇지 못한 포도나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열매가 많을수록”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인 것도 복인데 열매까지 많습니다. 그럼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큰 복을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큰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큰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누구에게 했다는 말입니까? 우상에게 했습니다. 왜 제단을 많게 했습니까? 감사를 많이 하려고, 더 큰 감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가나안 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복을 주신 보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자기가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탓할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뻑 하면 하나님을 탓하곤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까지 희생시키신 분입니다. 롬 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세상에 이런 신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이 우리한테 무슨 억한 감정이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는 우상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는 없습니다. 복을 구하는 것 중요합니다.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받은 복을 관리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달라한다고 주고는, ‘이제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받은 복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지켜보십니다. 받은 복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테스트이기도 합니다.
2절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하지만 이스라엘은 복을 받는 데까지만,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 하나님, 나한테는 하나님 밖에 없어요.” 이렇게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많은 열매로 풍성해지니까,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귀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닙니다. 또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아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게 두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마음과, 교회 밖에서의 마음이 다릅니다. 기도할 때의 마음과, 기도 응답 받고 나서의 마음이 다릅니다. 말씀 들을 때의 마음과, 집에 가서의 마음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구약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7-3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다하고”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둘로 나뉘어, 반은 하나님을 섬겼고, 반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전심을 쏟지 않고, 반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알이 있었습니다. 바알이 주는 기쁨과 쾌락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실질적인 하나님은 여호와가 아닌 바알이었습니다.
3절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서서히 없어졌습니다. 처음에 바알 제사에 갈 때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습니다. 당장에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차츰 맘 놓고 우상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 별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복입니까? 말씀에 불순종했는데 오히려 일이 잘되었으면, 그게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신앙인입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교인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 참인가를 거짓인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꼬박꼬박 지키고, 제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왕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자기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하고 내 맘대로 한다면, 내가 왕인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이 왕이냐, 내가 왕이냐입니다. 예수님이 왕인 상태를, 달리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내가 왕인 상태를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불신앙 상태였던 것입니다.
4절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그러니 그들이 정상적으로 살 리가 없습니다. 바른 삶은 바른 신앙에서 나옵니다. 신앙이 잘못 되면, 삶도 잘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단 사이비들이 그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헛된 말을 냈습니다.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헛된 말과 거짓 맹세가 재판하고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서 끝까지 신임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 사법부입니다. 행정부도 중요하고 입법부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사법부가 중요한 것은, 행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나 입법부인 국회의원들은 선출직입니다. 임기가 지나면 투표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법부인 법관은 임기가 아니라, 정년이 있습니다. 또한 사법부는 심판하는 기관입니다. 가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판결이 나곤 합니다. 그럴 때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좌절과 분노를 느낍니다. 재판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헛된 말과 거짓 맹세로 재판이 왜곡되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아집니다. 법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좀 귀담아 들으면 좋겠습니다.
5절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긴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벧아웬’은 ‘사악함의 집, 우상의 집’이란 뜻입니다.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 ‘벧아웬’ 곧 ‘사악함의 집, 우상의 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벧엘에서 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송아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다른 이유보다도 편하고 쉽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송아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습니다. 웃는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았으니, 얼마든지 맘 편히 제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십니다. 그러니 섬기기가 어렵고 불편한 것입니다. 문제는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입니다. 잘 될 때, 형통할 때는, 웃고 있는 송아지 하나님과 함께 웃을 수 있습니다. 급박한 문제 앞에 살려달라고 부르짖어야 하는데, 송아지 하나님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죽을 거 같아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는데, 송아지 하나님은 그때도 그저 웃고 있습니다. 열심히 송아지 하나님을 섬겨온 백성들은 슬퍼하고, 제사장들 역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이러려고 송아지를 섬긴게 아닌데.’ ‘내가 이 꼴 보려고 송아지 하나님께 제사드렸던가?’
6-7절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송아지 하나님의 최후는 어떻게 됩니까? 앗수르로 옮겨집니다. 당시 앗수르 왕이 야렙이었습니다. 야렙이란 ‘싸움 왕’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으로 숭배 받았던 송아지가 ‘싸움꾼, 깡패’ 같은 야렙에게, 예물로 바쳐지는 운명을 맞이한 것입니다. 당시 나라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앗수르 나라가 전쟁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신과 앗수르 나라의 신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패함으로, 이스라엘 신을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송아지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쇳덩어리에 금을 입힌 조각상이 되고 맙니다. 용도 폐기된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용도 폐기된 송아지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사실 송아지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송아지가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까?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송아지를 억지로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숭배하고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다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바쳤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신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참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8절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자기 신을 예물로 바쳐야 했던 이스라엘의 심정은 비참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탄식했습니다.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차라리 산이 무너져 내릴 때, 거기에 깔려 죽는 게 낫다는 부르짖음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징벌이 혹독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치욕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는 걸 택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살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죄에서 돌이키고, 우상숭배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까지 이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 잘못 했다고, 무시무시한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입이 닳도록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박해하기까지 했습니다. 막상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니까, 차라리 산에 깔려 죽고 싶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교만이요, 완고한 고집입니다. 이를 본 하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9절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그들이 잘못할 때마다 징계하시지 않았습니다. 두고 보셨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죄에서 돌이킬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무슨 죄 짓는데 재미 붙인 사람들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10절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드디어 하나님의 인내의 때가 차고 말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여기서 내가 원하는 때는 하나님의 때를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때를 우리가 알 수 없으니,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때를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하나님의 때를 모릅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늘 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때는 모르는 게 낫습니다. 내가 죽을 날을 알고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까? 그럴 거 같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죽기 직전에 믿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때를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징계의 때를 알지 못해서, 그렇게 용감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무식할수록 용감한 법이고, 유식할수록 겸손한 법입니다.
11절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에브라임은 남다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길들인 암소”란 ‘제대로 훈련받은’ 또는 ‘정식으로 교육 받은 백성’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방인들이 받지 못한 율법의 교육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율법을 잘 배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곡식 밟기는 좋아하지만, 멍에 메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곡식 밟는 것은, 곡식을 밟으며 마음껏 그것을 먹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께 받는 것만 챙기고, 의무는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축복은 자기가 챙기고, 의무와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지우는 것입니다. 잘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자기 목이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암소는 필요 없습니다. 진짜 아름다운 암소의 목은 멍에를 멘 목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11: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 복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2절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지금은 묵은 땅을 기경할 때입니다. 왜 공의를 심어야 합니까? 인애를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공의를 심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묵은 땅, 교만과 고집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땅, 불순종으로 인해 묵혀져 버려 있는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은, 무척 고된 일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은, 옥토를 기경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해야 합니다.
13절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묵은 땅을 그대로 두는 것은, 악을 밭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밭 갈면,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게 됩니다. 거짓 열매는 거짓 신앙에서 나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길을 믿었습니다. 또한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의 손이 아닌 군사력을 믿은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실제로는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잘 살아야 잘 믿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을 통해, 잘 믿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4-15절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인해 참혹한 살육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라는 말은, 벧엘에서 우상숭배를 한 결과가, 참혹한 살육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는 말은, 이스라엘 왕이 갑작스럽게 멸망하게 된다는 것인데, 대적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참혹하게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다가,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맞이하게 될 비극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훼파되며, 무참한 살육을 당하는 그런 비극입니다. 14절의 “그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숴졌도다”는 말에서, ‘부숴졌도다’는 말은 ‘내동댕이쳐서 박살을 내다’는 뜻인데, 이스라엘이 당한 살육의 참혹함과 그 참혹한 살육으로부터, 아무도 이스라엘을 구해 줄 사람이 없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비참한 비극이, 자신들의 목전에 다가와 있는데도, 거짓 열매를 먹는 즐거움에만 깊이 빠져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앗수르가 침공해 오면,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이스라엘의 산성들은 포위하여 무너뜨릴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은 침략자들의 칼에, 부모와 자식이 함께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아무도 피할 수 없도록,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유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던 우상숭배가, 그들에게 이와 같은 비극적인 멸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음악이든지, 특히 교향곡에는 늘 반복되는 음율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제곡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곡조나 기쁘게 하는 곡조, 또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환상에 빠지게 하는, 그러한 음율이 사실은 모두 이 주제곡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연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주제곡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주제곡을 위하여, 인간의 역사, 하나님과의 관계, 모든 사건, 가정, 개인 등의 감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 바로 전 구원사의 정점이며, 구원 음악의 주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약의 전 역사를 통해 살펴볼 때, “회개하라”는 이 주제가 얼마만큼이나 강조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회개의 첫 조건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자신은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죄인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회개는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고, 우리가 죄인이라고 저버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회개’란 말의 어원적인 뜻은 ‘길을 바꾼다, 되돌아온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과 그 가치관에 기초한 행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본능과 이를 억제하는 나의 의지, 선과 악, 하나님과 인간, 진실과 가식, 얕은 잔꾀와 성실, 영원과 잠시,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정립되었으면, 이제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잘못되어진 부분을 과감히 베어 버리고, 바른 자리로 돌아서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가치관의 정립과 그 가치관에 기초한 행동이 수반되어질 때, 비로소 참된 회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촉구하시는 회개가 바로 이런 회개입니다. 우상의 거짓됨과 음행과 죄악의 가증스러움을 진실로 깨닫고, 그것들로부터 과감히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스라엘에게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하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만이 이스라엘이 다시 의를 심고, 하나님의 긍휼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며, 오직 하나님 만을 마음에 품고, 순종하고 열매 맺는 풍성함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을 살아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두 마음을 품어, 하나님께로 고정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결과를 기억하게 하시고, 자기를 위하여 헛된 삶을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이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인 묵은땅을 기경하며,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옵소서. 내 삶에, 내 신앙에, 내 인격에, 기경해야 할 묵은 땅은 없는지, 조용히 곱씹어보게 하옵소서. 깊이 아주 깊이 쟁기질되어, 마음의 묵은 것을 기경하고, 영혼의 자리, 삶의 자리를 갈아엎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정의의 씨를 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일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른 삶의 방법을 지켜 나가는 자만이,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 더욱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