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티베트의 타공(他空)과 자공(自空)의 논쟁
여러 경전들과 『보성론』에 나타난 여래장사상을 통하여 이들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불교
해석학의 범주에서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을 문자 그대로 또는 한정적으로 선택해서 보았지만 그 의미는
극히 명백하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중관파의 사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카사키는 여래장사상이
중관학의 공사상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면서 발생했고(de Jong 1979: 585를 보라), 이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붓다의 최고 가르침으로 귀류논증 중관파의 공사상을 받아들이는 티베트 학자라면 여래장사상의 이
명백한 불일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석해야만 한다. 여래장사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붓다의 최종적이며 최고의 교리로 여기는 티베트 학자들과 학파 사이에 중요한
교리적인 균열이 나타난다. 그리고 티베트 학자들과 학파들은 이러한 교리가 문자 그대로의 가르침이
아니라 붓다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설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여래장사상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파는 14세기 후반 총카파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이 학파는
중국과 서양에 황모파(黃帽派)로 알려진 게룩(dGe lugs)파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학파는 현재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속한 학파이다.
(『능가경』과 월칭을 추종하는) 총카파는 여래장사상과 비불교도들의 자아설과의 차이는 여래장사상을
설한 붓다의 의도에 있다고 본다. 만약 이 이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여래장사상은 비불교도들의
자아설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여래장사상을 가르친 것이다. 그는 (예를 들면 자성을 가진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궁극적 실체 혹은 참된 자아라는 종류의 가르침) 글자 그대로 처음에는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게 할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붓다는 자비심을 가지고 비불교도를 불교로 이끌어 주는 방편의 하나로 여래장사상을 가르쳤다.
게다가 여래장을 설함으로써 붓다가 진실로 말하고자 한 것, 즉 그 가르침의 이면에 있는 진리는 바로
중관의 의미에서 자성의 공(空)이었다(Thurman 1984: 347-50을 보라).
결국 여래장사상은 일체 중생들이 모두 불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임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일체 중생이 붓다가 될 수 있게 하는 공이고 무자성(無自性)인 것이다. 공은 연기(緣起)이고, 연기는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을 수반함을 기억하자.
이와 같이 바르게 이해하면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을 마지막 진리를 설한 경전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올바르게 이해하면 여래장계 원전을 중관에서 공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중관학의 원전으로 (사실 총카파와 그의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원전에 의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
여래장계 원전들은 어떤 의미에서 해석을 요구하는(ney?rtha)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결정적인(n?t?rtha)
원전들로 완전한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여래장이 바로 공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엄밀히 보면 중생의 마음, 정신적인 흐름에 적용될
때 자성이 공한 것이다. 즉 여기서의 공은 마음에 자성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변화하는 마음, 정신의
흐름을 함축한다.
중관에서 공한 것과 조건 지어진 것은 같고, 마음이 변화하면 자성은 공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여래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모든 중생은 변화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붓다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티베트 불교에서 마음의 흐름은 일반적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므로 마음, 즉 마음의
공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Hopkins 1983: 382). 무엇보다 이것은 마음이 ‘본래 청정함’을 말할
때의 공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오염된 마음일 때 이 공은 여래장이라 불린다.
마음이 성불의 도를 따라서 청정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성불에 이르렀을 때 게룩파에서는 공(空)을
붓다의 자성신(自性身, svabh?vikak?ya)이라고 말한다. 이 단계에서 붓다의 청정한 마음은 지혜신
(智慧身, jñ?nak?ya) 이다. 자성의 공한 흐름과 붓다의 청정한 마음 둘을 합쳐서 법신(法身, dharmak?ya)
이라 부른다.
귀류논증 중관파의 사상과 여래장사상을 조화시키려는 게룩파의 이러한 설명에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모든 중생이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일부 여래장 계통 경전들의 주장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 주장이 옳다면 불교에서 수행은 전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여래장 자체가 분명히 붓다를
이루는 가장 근본 원인이고, 오염된 마음과 붓다의 마음이 둘 다 자성이 공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보로서의 법신과 일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두 번째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게룩파가 주장하는 사유체계는 티베트에서 랑통(rang stong)
으로 알려졌다. 이 랑통이란 문자 그대로 ‘자공(自空)’이란 뜻이고, 법신과 또한 공 자체까지도 모두 자성이
공함을 말한다. 그것들은 ‘진실로 건립된’ 것이 아니고, 궁극적인 실재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의미에서의
‘절대’란 없다(케둡제[mKhas grub rje] 1968: 53). 귀류논증 중관파의 사상에서 이미 보았듯이 그러한 존재는
없다.
티베트에서 이에 대립하는 견해는 젠통(gzhan stong)이다. 젠통은 문자 그대로 ‘타공(他空)’을 의미하고,
특히 결코 배타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조낭(Jonang pa)파와 연결되어 있다. 조낭파는 여래장사상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여래장은 실제로 자성을 가진 궁극적인 실재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모든 중생에게 존재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요소이고, 무지한 상태에서나 깨달음의 상태에서나 완전히 동일하다. 모든 중생은
자신안에 완전히 깨달은 붓다의 청정하게 빛나는 무분별적인 의식(또는 지혜)을 가지고 있다.
이 의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우발적인 번뇌들로 덮여 있다. 이 무분별적인 의식은 오염된 상태에서는
여래장이라 하며 깨달은 상태에서는 법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같은 것이어서,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내면에 붓다의 무분별적인 의식을 지니며, 붓다의 많은 뛰어난 의식적 성품들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다. 이 학파를 젠통, 즉 타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승만경』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인 존재는 자체의 자성이 공한 것이 아니고, 또한 자체의 바로 그
본성의 일부인 붓다의 성품들이 공한 것도 아니다.
조낭파의 학자들은 젠통의 학설이 미륵과 무착의 학설(유식의 일반 교리보다 뛰어나지만)뿐만 아니라
용수와 그의 제자인 성제바의 궁극적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며, 그 교리를 위대한 중관학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중론송』과 같은 용수의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저작들은 궁극적인 존재가 자성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고(다시 말해 랑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조낭파의 학자들과 몇몇 다른 학자들은 궁극적인 존재가 자성을 가진다는 용수의 분명한
가르침이 특히 『찬법계송』과 같은 게송들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조낭파의 학자들은 ‘자공’에 대한
가르침을 낮은 단계의 가르침으로서,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고 실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 허망분별에
대한 집착을 끊는 논리로서만 옳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반드시 논리적인 면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리를 넘어설 때 (특히 무분별의
명상 체험 속에서) 무엇인가 새롭고, 실재하며, 모든 개념화를 넘어선 자성을 가진 절대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이 강조하듯이 이 절대존재란 정신적 직관(지혜에서)
으로만 도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단지 믿음을 통해서만 유효한 존재이다.
자공과 타공 사이의 차이는 매우 골이 깊으며 둘은 심각하게 논쟁해 왔다. 자공의 관점에서 보면
타공의 접근 방식, 특히 조낭파는 거의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단의 주장들에 따르면 비불교도의 자아설에 버금가는 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게룩파의 반대론자들은 자성을 가진 절대 존재라고 주장하는 어떤 것조차도 젠통파의 입장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분별지에서 직접적으로 인식된다면 어떻게 궁극적인 해탈에 이를 수
있는가? 그것은 현상의 본질(공)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게 하는 근본무명의 실체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여래장이라고 불리는 다른 실재의 인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조낭파의
가르침과 그와 같은 것들은 궁극적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음이 확실하다. 또한 서양의 학자들도
과거에 조낭파와 그들의 타공의 교리가 비불교의 이상한 변형같다고 말해 왔다.
이것은 오해이며 그들은 불교의 ‘실재관’에 대한 근본적인 관념에 의지한다. 힌두교가 원래의
여래장사상에 영향을 끼쳤듯이 타공 사상의 발전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낭파는 인도의 일부 사람들이 분명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과거와 현재에 널리 유포된 학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티베트 자체 내에서도 타공 이론은 게룩파 이외의 학파에서 널리 수용되었고, 특히
현대의 닝마(rNying ma)파와 게퇴(bKa’ brgyud)파 스승들은 최고의 불교 교리로서 타공 사상의
몇몇 형식을 특히 공공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19세기 초 리 메이(Ris med)로 알려진 평등운동을 주창했고 지금도 매우 영향력 있는
비(非)게룩 사상의 발전 이후 이러한 예는 매우 많다. 이 운동은 학파적인 논쟁을 종식시키고
그 차이점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논리와 논쟁을 넘어선 젠통의 절대 실체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중관 귀류논증파 논리의
순전히 치유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보성론』이 뛰어난 논서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