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이해영 지음, 2022 사계절.
산업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의 종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도 “미국이 신냉전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한때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다. 모르긴 해도 미국 주류 가운데 신냉전 전망을 내놓은 극소수 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 이유로 소프트파워, 즉 ‘매력과 설득력’을 든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 금융위기, 전염병, 그리고 트럼프를 거치며 미국과 서방은 설득이 아니라 가르치는 데 탁월했다. 이들이 하는 “내 말대로 해”라는 말은 위선이다. 그 결과 미국과 서방은 신뢰를 잃었다. 중국의 경제력 추월이 분명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국과 벽 없이 협력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펼쳐질까?
2022년 6월 지구 한쪽에서 EU의 나토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브릭스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브릭스 정상회담을 통해 다가올 신세계질서를 전망해볼 수 있다. 정치군사적으로는 중러 동맹에 기초한 양극이, 경제적으로는 브릭스의 전면화를 통한 다극이 구축될 것이다. 브릭스개발은행을 설립하고, 미국이 러시아 제재를 핑계로 어설프게 무기화하다 실패한 국제 결제 시스템을 다른 체제로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WTO와 IMF, 세계은행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지탱해온 국제기구의 운명이다. 지금의 형태로는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시점이 올 것이다. 다시 스티글리츠로 돌아가자. “자유주의와 낙수 경제학은 글로벌사우스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제 모든 곳에서 유행에 뒤처졌다.”
IMF가 발행하는 『세계경제전망』 2022년 7월호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세계경제는 계속 파편화되고 있다. 중기적 전망에서 우크라이나전쟁은 세계경제를 서로 다른 기술 표준, 국제 경제 시스템, 그리고 준비통화를 갖춘 지정학 블록으로 더욱 파편화시킬 것이다. 파편화로 인해 식량 위기가 노멀normal이 될 수도 있으며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 협력의 효율성도 감소할지 모른다.” IMF가 말하는 ‘지정학적 블록화’가 바로 그들의 존폐를 결정할 것이다. 세계경제의 파편화와 블록화가 우크라이나전쟁 때문은 아니다. 전쟁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던 과정에 새로운 모멘텀을 부여했을 뿐이다.
향후 WTO, IMF, 세계은행이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지금의 형태로 존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지정학적 블록 입장에서는 굳이 식민주의의 상징 같은 국제기구를 존치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유엔은 사실상 기능 마비로 진입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엔은 5개 상임이사국(P5: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의 과두체제인데 이들이 현재−사실상−교전 중이기 때문이다. 즉 P5라는 ‘국제 올리가르히’가 붕괴된다는 말이다.
세계경제는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을 대별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미 오래전에 국제무역(상품과 서비스)에서 미국의 패권이 무너졌다(서비스산업에서 미국이 흑자를 거둔다 한들 전체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미국 패권의 경제적 기초는 금융이며, 미국 월가와 영국 런던시티가 그 중심이다. 실물 국제경제와 분리 자립된 국제금융은 불로소득 계급을 만들어냈다.
마이클 허드슨은 세계경제를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서로 다른 시스템과 철학이 경쟁하는 장으로 파악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정치경제학계와 상당히 구분되는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금융, 보험, 부동산의 국제적 유착을 현대 금융자본의 핵심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현대는 국제 불로소득 계급이 지배한다. 이들은 지대를 추구하는 계급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금리와 주식 배당으로, 특히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국제 투기 세력을 가리킨다.
지금 한국의 부동산을 통한 지대 추구rent seeking를 금융자본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가치 혹은 노동과 완벽히 분리된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을 통한 이익이자 투기의 결과물이고, 금융자본(즉 은행)은 여기에 판돈을 제공해 막대한 수수료를 챙긴다. 이 과정 어디에도 생산을 수행하는 주체가 없다(어차피 실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이윤과 임금을 다룬다. 따라서 이것은 산업 자본주의의의 논리이다. 하지만 금융 자본주의는 이 전통 경제학에서 배제된 지대에 근거한다. 세계경제 차원에서 보면 지대의 경제학이 곧 달러 패권의 경제학이다. 이는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소위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이라는 신화에 둘러싸인 재무부의 채권 판매로 회수한 달러를 통해 군사적 패권 유지에 소요되는 막대한 군비를 조달해온 시스템에 기초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미국 재무부의 채권을 처분했고, 중국도 보유량을 지속적으로 줄이고 있다. 대신 양국은 금을 모았다. 이 상황은 달러 리사이클링 메커니즘을 위협한다. 나아가 달러를 대체할 국제 준비통화도 준비 중이다. 향후 월가와 런던시티를 대체할 새로운 금융시장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달러 패권의 위기는 국제 금융자본과 이와 결탁한 불로소득 계급의 위기이다. 나아가 이것이 미국 패권의 위기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당연히 한국의 부동산시장도 이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곳에서든 지금과 같은 형태의 금융자본 전성시대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지정학적 블록 간 경쟁은 과거 냉전처럼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치열한 이익 각축의 시대일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국의 패권은 저물고 있다.
“서구의 몰락이 필연적이거나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동안 서구가 지대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선택한 결과이다. 실패한 국가는 지대 추구라는 과두제가 정부의 규제와 과세 권한을 해체시키면서 출현했다. 이 과두제는 지대 추출이 생산 활동의 당연한 대가이고, 여기에서 형성된 부가 나머지 경제활동과 사회적 번영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잘못된 논리 위에 세워졌다.”(251-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