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신서인전〉에 실린 홍무황제의 성유를 베껴 쓴 데 대한 발문〔恭錄高麗史辛庶人傳所載洪武聖諭跋〕
홍무(洪武)20년(우왕13, 1387) 고려에서 배신(陪臣)설장수(偰長壽)를 보내어 남경(南京)에 조회하게 하고, 아울러 진정표문을 올렸다. 《고려사》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 성유(聖諭)의 한 대목이 실려 있는데, 온전히 속화문자(俗話文字)를 사용하였다. 그 성유에“나의 말이 그 책자에 전부 쓰여 있다.〔我的言語冊兒上都寫着有〕”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문장은 응당 설장수가 책에 적어 돌아온 것이리라. 내가 생각건대,전ㆍ모ㆍ고ㆍ훈(典謨誥訓)은 문자를 가지고 말을 옮겨 적은 것이므로 말이 간단할수록 이치가 더욱 드러나는데, 후세의 조령은 말을 변화시켜 문장으로 바꾸었으므로 글은 더욱 번다해졌으나 뜻은 더욱 모호해졌다.
대체로 옛날에는 말과 글의 차이가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속화(俗話말)와 고문(古文글)의 구별이 있으니, 이는 본래 형세로 보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못난 것은 종종요 임금을 흉내 내고 순 임금을 가장하여온갖 정성을 다해 꾸몄으나 진실과 순박함이 더욱 사라졌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후세에 영원히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성유의 문자는 사신(詞臣)의 윤색이나 사관(史官)의 교정(矯正)이 없이 모두 당시의 속화문자로 실어 놓았으니, 《고려사》를 엮은 자가 마땅한 체재(體裁)를 얻었다고 하겠다.
오늘날 사람들은 고인이 쓰던 하찮은 기물과 의복, 자질구레한 글씨와 편지를 얻더라도 오히려 손으로 어루만지고 감탄하며 고인의 풍채와 정신을 마음속에 상상해 본다. 하물며 이처럼 간절한 심정으로 타이른 천백여 글자의 말은 성스런 천자께서 조정에 임하여 친히 말씀하신 데서 나왔으니, 한 마디 말씀도 감히 보태고 빼거나 수식한 것이 없음에랴. 그것을금간옥자(金簡玉字)라 일컫는다면 지척에서 웃는 얼굴이 떠오르고,회천화일(繪天畫日)에 비유한다면 귀에 가득한 음성이 들릴 것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애달파하는 마음이 흥건히 흘러넘쳐, 백 세 뒤에도 황홀히경광(耿光)을 친히 보고 옥음(玉音)을 듣는 듯하니, 이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아! 고려 말기에 간흉이 나라를 그르쳐, 이 때문에 황제의 가르침이 막힌 것이 여러 차례였으니, 이 또한 스스로 취한 것이었다. 저들은 새로운 황제가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뚝 일어나 군웅들을 호미질 하듯 제거할 것이라 생각하고,영웅은 사람을 시기하여반드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에게 맡길 것이라 망녕되게 여겼다. 그래서 스스로를 망한 원나라의 외손으로 자처하여 속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품어, 사신을 보내면서도 정탐꾼을 몰래 데려가고, 외교문서를 보내면서도 은밀히 탐지하는 말을 쓰기도 했으니, 그 꾀가 어리석고도 비루했다.
설장수가 명나라 조정에서 돌아올 때에 천자께서 진심을 토로한 성유가 속마음을 다 드러내어 통쾌하고 명백하게 마음을 기울여 조금도 숨김이 없었으니, 진실로돈어(豚魚)도 믿게 하고귀신도 감동시킬 만하였다.
그런데 천자께서 경계하고 타이르기를 간곡히 반복하며 그치지 않았던 말씀은 바로 ‘백성과 더불어 복을 지으라.〔與百姓造福〕’,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라.〔敎百姓安寧〕’, ‘왜구들로 하여금 백성을 해치지 못하게 하라〔敎倭子害不得百姓〕’, ‘만약 백성들을 아끼지 않으면 변경에 난리가 일어나 너희를 부유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若不愛百姓生邊釁却難饒儞〕’라는 말씀이었다. 간절한 생각이 오로지 백성들의 이로움과 해로움, 기쁨과 근심에만 있었고, 화이(華夷)의 구별과 지역의 차별을 묻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사랑하시어 혹시라도 백성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셨으니, 아! 성대하도다. 이것이 하늘의 밝은 명(命)을 받아 중국을 소유하여 만백성의 주인이 되고 모든 이를 신하로 삼아 천하의 군주가 된 까닭이다.
고려가 쇠란해져 이미 황제께서 맡기고 부탁한 지극한 뜻을 감당하지 못하자, 우리 선왕(이태조)께서 신인(神人)이 의탁하는 바가 되어서 곤궁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천자께 사랑을 받아곤룡포와 규찬(圭瓚)을 받아 이 땅의 주인이 되셨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힘쓰는 것은 중외(中外)가 한결같았고, 문자와 수레바퀴를 같이 써서 시왕(時王동시대 황제)의 제도를 삼가 따르니, 그 때문에 자손들에게 안락함을 끼쳐주어 무궁토록 복록을 내려주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제(先帝)와 선왕(先王)의 은혜를 받고 있으니 아! 성대하도다.
올해(무신년, 1848)의 오늘은 바로 고황제(高皇帝명 태조)께서 어좌에 등극하신 그 날이다. 내가 우연히 사서(史書)를 열람하다가 이 성유를 읽고 천시의 순환에 감동하고,주(周)나라 도읍에 기장이 무성함〔黍離〕을 애달파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비록 멀어졌으나 덕스러운 음성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만청묘(淸廟)의 비파소리에 서글피 다시 문왕을 보는 것같을 뿐만이 아니다. 이에 감히 한 통을 베껴 쓰고 그 뒤에 삼가 발문을 써서 잊을 수 없는 심정을 붙인다.
홍무 기원 후 481년 무신년(1848, 헌종14) 정월 4일에, 조선의초모유신(草茅遺臣)박규수가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쓰다.
[주-C001] 선수(瑄壽):
박선수(朴瑄壽, 1821~1899)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온경(溫卿)이다. 환재의 아우로, 1864년(고종1) 증광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이 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고대 종정(鍾鼎)의 유문(遺文)을 연구하고 문자의 원리와 본뜻을 고증하였다. 《환재집》의 간행에 교정을 맡았는데, 간혹 간략한 논평을 달아놓았다.
[주-C002] 한창려집(韓昌黎集):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문집을 가리킨다. 앞부분에 운문인 부(賦)와 시(詩)가 먼저 실려 있고, 문장은 〈원도(原道)〉, 〈원성(原性)〉을 필두로 각종 설(說), 해(解), 전(傳), 잠(箴), 찬(贊), 변(辯), 후서(後敘), 송(頌), 기(記) 등을 모아 첫머리에 배치하였다.
[주-C003] 방정학집(方正學集):
명나라 방효유(方孝孺, 1357~1402)의 문집인 《손지재집(遜志齋集)》을 가리킨다. 문집의 첫머리에 잠(箴), 명(銘), 계(誡), 의(儀), 논(論)을 비롯하여 각종 산문을 모아 잡저(雜著)라는 제목으로 실어 놓았다.
[주-D001] 고려사 …… 발문:
이 글은 1848년(헌종14)에 《고려사》 《신우전(辛禑傳)》에 실린 명 태조의 성유(聖諭)를 읽고서 그 감동을 쓴 것이다. 이 해는 바로 명 태조가 등극했던 무신년(1368)과 간지가 같았다고 한다. 환재는 《고려사》에 실린 명 태조의 성유가 속화문자[白話]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 윤색을 거친 후대의 글보다 오히려 진실함을 느낄 수 있고, 명 태조가 고려왕에게 내린 백성을 평안하게 보호하라는 간절한 성유를 조선을 개국한 이 태조가 훌륭히 계승하여 곤궁한 백성들을 사랑하여 천자의 사랑을 받았음을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서술하였다.
《신서인전(辛庶人傳)》은 바로 〈신우전〉을 가리키니, 우왕(禑王)의 전기를 폄하하는 의미로 쓴 것이다. 《고려사》 133권 열전 46에서부터 137권 열전 50까지 실려 있다. 조선 왕조에서 《고려사》를 편찬할 당시 역성혁명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우왕이 신돈(辛旽)의 자식이었다는 뜻으로 편명을 신우(辛禑)라 하였으며, 신분 격하를 위해 세가(世家)가 아닌 열전에 편입시켰다.
[주-D002] 홍무(洪武):
중국 명(明)나라 태조(太祖) 때의 연호(年號)로 1368년부터 1399년까지 사용되었다.
[주-D003] 설장수(偰長壽):
1341~139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천민(天民), 호는 운재(芸齋)이다. 부원후(富原侯) 손(遜)의 아들이다. 본래 위구르 사람으로 1358년(공민왕7) 아버지 손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올 때 함께 귀화하였다. 1362년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올라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되었다. 1387년(우왕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89년(창왕 즉위년)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8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며, 저서로 《직해소학(直解小學)》ㆍ《운재집》이 있다.
[주-D004] 나의 …… 있다〔我的言語冊兒上都寫着有〕:
이 구절은 《고려사》 권146 〈신우열전(辛禑列傳)〉에 실려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我的言語 這里冊兒上都寫着有”
[주-D005] 전ㆍ모ㆍ고ㆍ훈(典謨誥訓):
전은 제왕의 명을 적은 책을 말한다. 모는 계획 및 시정 방침을 말하는 것으로 국가 대계를 도모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훈은 일깨운다는 의미로 후대 에 모범이 될 가르침과 깨우침을 가리킨다. 고는 소(召)의 의미로, 군주가 신하나 백성들에게 새로운 정치의 시행을 알리는 것이다. 《서경》에 실린 〈요전(堯典)〉, 〈대우모(大禹謨)〉, 〈탕고(湯誥)〉, 〈이훈(伊訓)〉 등이 좋은 예이다.
[주-D006] 요 임금을 …… 가장하여:
《서경》의 문체를 모방하여 문장을 짓는 것을 가리킨다.
[주-D007] 금간옥자(金簡玉字):
제왕의 조서(詔書)나 도교의 선간(仙簡)처럼 귀중한 글이나 글자를 가리킨다.
[주-D008] 회천화일(繪天畫日):
하늘에 떠있는 해를 그리는 것으로, 천자의 용안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D009] 경광(耿光):
빛나는 위엄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황제의 용안을 의미한다.
[주-D010] 영웅은 사람을 시기하여:
원문은 ‘영웅기인(英雄忌人)’인데, 동한 말엽 오나라 손책(孫策)과 유비(劉備)에 얽힌 고사가 있다. 손책이 14살 때 수양(壽陽)의 원술(袁術)을 방문하였다 이때 마침 유비도 도착하자 손책이 막 떠나겠다고 하였다. 원술이 ‘유비와 무슨 관계라도 있소?’라고 묻자, 손책이 ‘아닙니다. 영웅은 본래 남을 시기합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즉시 동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유비는 서쪽계단으로 따라 올라가면서 다만 손책의 행동을 바라보기만 할 뿐 좀처럼 발걸음이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太平廣記 卷174 幼敏》
[주-D011] 돈어(豚魚)도 믿게 하고:
《주역》 〈중부괘(中孚卦)〉에, “중부는 돼지와 물고기까지 감동시키니 길하다. 큰 내를 건넘이 이롭고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中孚 豚魚吉 利涉大川 利貞]”라고 한 데서 나왔는데, 단전(彖傳)에 “돼지와 물고기까지 감동시키니 길하다는 것은 믿음이 돼지나 물고기까지 미침이다.[豚魚吉 信及豚魚也]”라고 하였다.
[주-D012] 곤룡포와 규찬(圭瓚):
중국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 규찬은 옥찬(玉瓚)이라고도 한다. 천신(天神)이나 종묘에 제사 지내며 강신할 때에 쓰던 술잔으로, 옥이나 구리로 만들기도 하고 은으로 만들어 안을 도금하기도 하였다.
[주-D013] 주(周)나라 …… 무성함〔黍離〕:
명나라가 망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周)나라 도읍이란 남경(南京)을 가리킨다. 원문의 ‘서리(黍離)’는 기장이 많이 열려 축 늘어진 모양을 가리킨다. 《시경》 〈서리(黍離)〉에 “저 기장이 축 늘어졌거늘, 저 피는 싹이 돋았도다. 힘없이 가는 길 더디기도 해라, 이 마음을 가눌 길 없도다.[彼黍離離 彼稷之苗 行邁靡靡 中心搖搖]”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 시는 주(周)나라가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한 대부(大夫)가 행역(行役) 나가는 길에 옛 서주(西周)에 이르러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이 있던 옛터를 지나다 보니, 그곳이 모두 기장 밭이 되었으므로, 주나라가 전복된 것을 민망히 여겨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민망한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주-D014] 청묘(淸廟)의 …… 것:
청묘의 비파소리는 선왕(先王)의 훌륭한 음악을 의미한다. 《예기》 〈악기(樂記)〉에 “청묘의 비파는 붉은 줄에 너른 구멍을 밑바닥에 뚫었으며, 한 사람이 연주를 하면 세 사람이 따라서 감탄하는데, 이는 선왕의 남긴 소리가 있는 것이다.[淸廟之瑟 朱絃而疏越 壹倡而三歎 有遺音者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15] 초모유신(草茅遺臣):
교외에 버려진 신하라는 의미로 사대부가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환재는 1848년(헌종14) 5월 42세의 나이로 증광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으로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16
洪武二十年。高麗遣陪臣偰長壽朝京。附進陳情表文。麗史載明高皇帝聖諭一段。而全用俗話文字。聖諭有曰我的言語。册兒上都寫着有。此文當是長壽所寫還於册子者。竊嘗以爲典謨誥訓。以文字而寫言語。故言愈簡而理益顯。後世詔令。化言語而爲文字。故文愈繁而意有晦。葢古無言語文字之殊。而今有俗話古文之別。則是固不能不然者。然其下焉者。往往摸堯裝舜。極意藻飾。而眞樸愈散。况可以感動人心。傳示無極哉。惟此聖諭文字。非有詞臣之潤色史官之櫽括。而盡載當日之俗語話本。爲麗史者。可謂得其軆裁矣。今夫人得古人器服之微翰墨之末。猶爲之摩挲歎息。想見乎其風神也。矧此丁寧諄複千百有餘言。出自聖天子臨殿口宣。一話一言。無有敢增損而修飾之者乎。謂之金簡玉字則有色笑咫尺之顔。擬諸繪天畵日則有洋洋盈耳之韻。夫其至誠惻恒淋漓爛漫。百世之下。怳然親耿光而承玉音。何如其幸也。噫麗氏之季。奸凶誤國。所以屢阻於聲敎。亦其所自取者耳。彼謂新皇帝崛起草昧。誅鋤羣强。妄揣英雄忌人。必任權謀機智。而又自以逋元之彌甥。內懷疑畏。玉帛之會而潛携偵伺之人。詞令之間而或施鉤探之辭。其爲計愚且陋
矣。及夫長壽之來也。聖天子敷心之諭。軒豁披露。痛快明白。傾倒囷廩。無復隱曲。誠可以孚豚魚感鬼神。而若其戒告之董飭之申複而不能已者。則惟曰與百姓造福。則惟曰敎百姓安寧。則惟曰敎倭子害不得百姓。則惟曰若不愛百姓。生邊釁。却難饒儞。眷眷一念。惟在乎生民之利害休戚。不復問華夷之別畛域之殊。而一視同仁。唯恐其或傷之。嗚呼盛哉。此所以受天明命。奄有方夏。悉主悉臣。爲天下君者也。麗氏之衰亂。旣不足以當畀付寄托之至意。而惟我先王爲神人所依歸。子惠困窮。媚于天子。龍袞圭瓚。宅此東服。盖敬天勤民。中外一揆。而書文車軌。恪遵時王。所以貽謨燕翼。垂裕無疆者。民到于今。受先帝先王之賜焉。嗚呼盛哉。是歲是辰。卽惟高皇帝御極之年若月日也。偶閱舊史。讀此聖諭。感天時之回薄。悲周京之黍離。而聖人雖遠。德音猶在。不獨淸廟之瑟。愀然如復見文王。敢錄寫一通而恭記其後。以寓於戱不忘之思云。洪武紀元後四百八十一年歲在戊申正月四日。左海草茅遺臣朴珪壽拜手稽首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