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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조국 독립의 열망을 불사른 이름이 있었다. (뤼순감옥 수감자 명단) 申菜浩, 신채호 선생님이 여기 계십니다. 중국 뤼순의 차가운 감옥 안에 갇힌 외롭고 의로웠던 혁명가, 그는 칼날 같은 의지와 절개로 운명의 길을 걸어갔다.
박걸순/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신에만 그치지않고 그것을 직접 실천했다는 점에서 知行合一, 즉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아주 대표적인 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진실을 쫓았던 언론인이었으며 역사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고 한민족이 하나로 떨쳐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역사학자였다. 세상의 속도에 자신을 마추지 않고 어떤 고통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 바라는 것은 오직 조국의 자유, 그 앞에서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선이가 바로 단재 신채호다.
지난(2019년) 6월, 대전광역시 한 공연장에서 특별한 음악극이 무대에 올랐다. 주인공은 독립운동가 신채호,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전의 한 예술단체가 기획한 창작연극공연이다.
배우1: 국무총리 이승만 반대합니다.
배우2: 난 이승만 지지합니다.
배우1: 우리 힘으로 못하겠으니 당신들이 우리 대신 일제를 물리쳐주고 대한민국의 주권도 가져가라
신채호가 만난 사람들과 역사적인 사건으로 구성된 연극의 스토리,
배우 일동: 대한 독립만세~ 만세~ 만세~
관객1: 신채호의 삶을 좀 더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그 부분을 좀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하나의 기억이 남게 된 것 같아요.
관객2: 우리 과거의 민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몰랐던 부분도 새롭게 접할 수 있던 좋은 시간이었고 참여는 같이 못했지만, 저도 같이 무대에 서고 싶은 그런 동기부여가 있었던 좋은 연극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사상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던 신채호,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 지금의 대전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최창희/단재 신채호 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이곳이 신채호 선생님의 생가가 되겠는데요. 복원된 생가인데 저기가 곳간채이고 저쪽이 안채입니다.
가난한 유학자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던 신채호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허약한 몸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는 아픔을 겪는다.
최창희: 단재 선생께서는 이곳에서 1880년 12월 8일에 태어나셨고 1887년에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갔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때 당시 아버지가 서른 여섯 나이로 돌아가시면서 신씨가 모여 살고 있는 정원군 낭성면 귀래리 쪽으로 가족 전체가 이주하게 됩니다.
신채호는 8살때에 이미 한시를 지었다.
高低風强弱 遠近絲長短-연이 높고 혹은 낮게 날림은 바람의 세고 약함에 있고 멀리 혹은 가까이 날림은 실의 길고 짧음에 있구나.---신채호 (8세 무렵 지은시)
최창희: 당시 조선 후기의 모습들이 우리 민족의 상황을 연에 비유한 것이 아닌가. 우리 민족이 높게 날리고 낮게 날리고 가까이, 멀리 있는 것은 다른 외부의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느꼈고 우리 민족의 상황, 현실을 이렇게 시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라고 저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인근에서 신동으로 통했던 신채호(1880~1936), 그에게는 더 넓은 활동무대가 필요했다. 당시 젊은 유생이라면 누구나 입학하기를 꿈꿨던 성균관, 신채호는 성균관에 들어온다 (분향례-공자를 비롯한 성현에게 향을 피워 예를 차리는 의식), 높은 학식과 엄격한 전통, 지금도 한달에 두번씩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에게 예를 다하는 성균관은 현재의 국립대학격으로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성균관에는 신채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까. 그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기자: 선생님, 이 책은 어떤 책인가요?
박평선/성균관 전례위원: 유교대사전이라고 해서 유교와 관련된 모든 용어 인물들이 정리되어 있는 사전입니다. ㅅ을 찾아보면, 여기 신채호 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요. ‘19세가 돼서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명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도 신채호가 1905년 정7품 관직이었던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申寀浩-柳熙益-權鳳集 任成均館 博士 고종 42년(1905년 2월 30일) 신채호, 유희익, 권봉집을 성균관 박사에 임용하였다-승정원일기-
1900년대에 들어서서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일제는 우리의 자원과 자산을 빼앗고 군대까지 주둔시킨다. 신채호가 참여했던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중집회, 만민공동회를 열고 개혁안을 발표한다. (헌의 6조-1898년 10월 만민공동회에서 결의한 6개항의 국정개혁안), 헌의 6조는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시민대회에서 국정개혁을 공개적으로 결의해 제출한 것이다. (헌의 6조 구체적 내용, 1. 외국인에게 의지말고 관민이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해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2. 외국과 이권에 관한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재정을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勅任官)을 임명할 때는 정부의 자문을 받아 다수의 의견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칙을 실현할 것.
1905년경, 잠시 고향에 돌아가 계몽운동을 펼치던 신채호는 다시 상경해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김하돈/’단재기행’ 저자: 이 종로 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시골에서 한문학만 공부하던 시골뜨기 단재가 본격적으로 서울이라고 하는 급변하는 개화기에 한양을 체험하면서 이른바 국가와 민족, 역사인식 내지는 세계정세, 이런 것들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서울 생활의 시작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종로 거리입니다.
당시에 언론,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종로, 시대의식이 투철했던 단재는 이곳에서 적극적으로 구국활동을 펼쳐 나간다.
김하돈: 이곳은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터가 있던 곳입니다. 대한매일신보 시절 단재의 글쓰기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독사신론, 말 그대로 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 내지는 새로운 담론 이런 뜻입니다. 이후 단재는 필생의 작업으로 조선사, 즉 조선통사를 집필하는데 노력을 다 합니다.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강행된 1905년, 매일 매일 신보 주필로 초빙되는 신채호,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된 민족지로 국내의 일제만행을 고발하고 민족의식을 심어주던 신문이었다. 신채호는 약 4년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며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고발한다. 특히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는 시국논설로 주목을 끌었는데 친일매국노 송병준, 조중응, 신기선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에 일본의 큰 충노가 세 사람이 있는 것은 내가 부득불 통곡치 않을 수 없으며 부득불 방성대곡치 아니 할 수 없으며 부득불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하나님을 부르며 땅을 부르짖으며 통곡치 아니치 못할 지로다. (대한매일신보 1908.4.8), 시론뿐만 아니라 을지문덕, 李忠武公傳 등 우리나라 역사와 영웅에 관한 글도 적극적으로 게재했다. (독사신론-1908년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논설),
박찬승/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에 한국이 국권을 상당 부분 피탈 당했기 때문에 되찾기 위해서는 신채호 선생은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역사 속에서 을지문덕 장군 이나 최영 장군, 이순신 장군 이 세 사람을 가장 중요한 영웅호걸로 선정하고 이들의 전기를 집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전기를 읽는 청소년들이 훗날 우리나라의 국권을 되찾는 영웅호걸이 되길 바랐던 것입니다,
망명전 신채호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국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신채호는 1910년경 망명을 떠난다. 망명전 그의 행적은 어땠을까
김하돈: 이곳은 삼청동 2-1번지 일원인데요. 이곳이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거주하시던 집터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신채호는 당시 비밀결사단체였던 신민회의 핵심간부였다. (살던 집까지 팔아 망명자금을 마련한 신채호), 그는 망명을 앞두고 그동안 살던 삼청동 집까지 팔아 노자를 마련한다.
김하돈: 아시다시피 이 무렵은 국권을 잃고 점차 일제의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였어요. 나라가 풍전등화 같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단재 역시 언론인으로서 사상가로서 또 역사학자로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그런 부분들을 연구하고 실천에 옮기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고 보면 됩니다.
1910년 강제병합이 되고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한다. 신채호가 가담했던 신민회도 1911년에 벌어진 105인 사건으로 결국 해체되고 만다. (105인사건(1911년)-조선총독부가 10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누명을 씌워 탄압한 사건),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일제의 이런 치밀한 탄압은 민족지사들의 망명을 부추겼다.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신채호도 망명을 선택한다.
먼저, 중국 칭타오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후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이었다.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구한말 수많은 우리 민족이 식민지배를 피해 이주했던 곳이다. 시내 주택가에 위치한 한 아파트, 이곳은 우리 독립사에서 중요한 장소 중 하나다.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 권업회가 이 자리에 있었다. 1912년 권업회에서는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북돋우었다. 그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신채호도 권업신문 발간부터 동참한다. 그는 권업신문에서 논설과 주요기사를 집필하며 뛰어난 필력으로 동포 사회에 교육계몽과 통합에 크게 기여한다.
박찬승/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당시 그 지역 러시아 당국은 일본측 요청 때문에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거나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제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신채호 선생은 활동무대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신채호는 중국 상하이를 거쳐서 베이징으로 향한다. 당시 무장 독립운동을 주장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베이징, 그곳에서 신채호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난뤄구샹(베이지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베이징 시내 유명 쇼핑가인 왕푸징 인근의 한 거리, 우리나라 인사동처럼 중국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베이징의 전통골목인 후퉁 중에서도 대표적인 골목이다.
홍성림/재중 화북역사기념사업회장: 여기는 처음 와 보셨나요? 지금 이게 원나라 때 형성된 대도의 저잣거리인데 그때 구획된 저잣거리가 800년째 그대로 남아있는 형태고요. 이 안에도 독립운동가들의 많은 흔적이 남아 있는데 차오떠우 후퉁이라고 되어 있는 이 거리가 신채호 선생님이 사시던 곳, 마오얼 후퉁이라는 곳은 이회영 선생님이 사시던 곳입니다. 지도 안의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가 다 있네요.
좁은 후퉁 수백개가 거미줄 처럼 뻗어있는 베이징의 구도심, 신채호는 이회영 등 민족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1900년대 초반, 베이징의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던 베이징 대학교의 도서관 건물, 이곳은 마오쩌둥이 사서로 근무했던 곳으로 중국 신문화운동인, 5.4운동도 여기서 태동했다.
홍성림: 베이징 대학교 일원이었던 장소고요. 지금은 흔하게 사람들이 별칭으로 ‘북대홍루’ 라고 많이 부르는데 이유는 붉은 벽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일관되게 역사저술에 심혈을 기울이셨잖아요. 역사서를 저술할 때 필요한 고서들 연구를 여기서 주로 하셨어요.
신채호가 일반인들의 출입이 쉽지않은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장 등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이곳에서 집필에 필요한 자료들을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었다.
홍성림: 신채호 선생님이 ‘북대홍루’를 다니실 때 여기가 그때도 신문 구독실이었는지 지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만약 당시에도 신문 구독실이었다면 반드시 오실 때 마다 들렀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우리의 역사서를 집필하는 한편, 중국신문에 글을 기고했던 신채호, 일제의 침략주의와 야만성을 중국인들에게 폭로해 한국과 중국이 일제에 공동 대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순한문 잡지 천고를 발행했는데 (天鼓-신채호가 베이징에서 발행한 한문 항일잡지), 한문으로 잡지를 발행한 것도 중국 지식인들과의 연결을 바랐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베이징에서의 생활,
홍성림: 베이징 어디에서 살았는지, 그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곳 석등암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전한다. (스떵안(석등암)-신채호가 거주하며 집필활동을 했던 곳), 암자의 빈방 하나를 빌려 생활했던 신채호, 햇빛도 잘 들지않는 토굴 같은 방에서 굶기를 밥 먹듯하며 쏟아부은 집필의 의지, 중국신문에 기고해 번 원고료와 주변 독립운동가 동지들이 몰래 놓고간 돈으로 겨우 연명하면서도 신채호는 밤낮으로 우리 역사서적을 집필하는데 몰두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고한 생각으로 베이징에서 신채호는 우리나라 상고시대를 기록한 조선상고사 집필을 구상하고 자주적인 민족의식과 항일독립의식을 형상화한 여러 창작품을 써나갔다. 베이징에서 처절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해나가던 신채호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오래된 건물들이 다닥 다닥 붙어있는 낡은 주택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골목,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베이징의 서민주택에서 신채호는 박자혜(朴慈惠)와 신혼살림을 차린다.
홍성림: 안녕하세요. 저희가 들어가서 좀 봐도 될까요?
집주인: 네, 들어오세요. 여기서 산지 64년이 되었습니다.
홍성림: 64년이요?
집주인: 저는 올해 64세입니다. 여기서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홍성림: 어린 시절을 기억했을 때 이곳이 그때 그대로 인가요?
집주인: 아니요, 그때는 복도가 이렇게 있었어요.
홍성림: 복도요.
집주인: 그때는 베이퐝(베이징의 전통가옥 중 북쪽의 정면 가옥)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방을 다 나눠 버렸어요. 91년도에 다시 방을 또 나눠버렸죠. 원래 살던 곳은 다른 모양인데 베이퐝으로 나눠버렸지요.
허름했지만 그래도 이 집이 신채호가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살아본 제대로 된 집이었다고 합니다. 베이징에서 홀로 지내던 신채호와 박자혜가 만난 것은 1920년, 신채호의 나이 마흔 무렵이었다.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신채호와 박자혜는 열 다섯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부부가 되었다. (신채호와 박자혜의 결혼기념사진, 1920년 4월), 두 사람의 결혼은 남녀의 만남 이전에 독립운동가와 동지의 결합이기도 했다. 1919년 베이징으로 망명한 박자혜는 북경연합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신채호를 만났다. 결혼 후 남편 못지않게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던 박자혜, 그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박자혜에 관해 자료를 찾던중 오래된 신문에서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신채호와 2년 남짓 결혼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박자혜는 생계유지를 위해서 산파를 하며 신문에 광고를 냈던 것이다. 4살 때 아기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가 15년간 궁녀생활을 한 박자혜, 한일강제 병합 이후 궁에서 나온 그녀는 숙명여학교에 들어간다. 숙명여학교는 1906년 고종의 계비에 의해서 설립된 여학교로 당시 궁에서 나온 궁녀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직원: 박자혜 학생은 명치 44년(1922년)에 기예과 1학년
기자: 그 당시 어떤 가문은?
직원: 가문은 중인(中人) 출신입니다.
숙명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박자혜, 하지만 당시에는 여성이 근대교육을 받는다 해도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돈을 벌려면 보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박자혜는 조산부 양성소 간호부과에 지원한다. 이후 그녀는 조선총독부 병원 간호사로 취업한다.
이자형/대한간호협회 간호역사 뿌리찾기 특별위원장: 저 건물이 조선총독부 병원 자리입니다.
근대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 박자혜는 전문직업인으로 안정적인 삶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간호사로 일한지 3년 만에 그녀에게 또 한번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1919년 3월,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쳐서 병원으로 밀려들어올 때, 그들을 치료하던 박자혜의 마음 속에서는 뜨거운 민족애가 솟구친다.
이자형: 박자혜가 간우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활동이 길지는 못했어도 그 일로 일경에 잡혔고 고문당하였던 것이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우회를 결성한 박자혜는 병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배포하며 만세시위 군중들을 이끈다.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가 신채호와 결혼한 후 다시 한국에 온 그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생계수단으로 조산원을 개업한다. 벌이가 시원찮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독립운동을 이어 나간다. 벅자혜의 적극적인 독립활동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 나석주 의거다. (나석주 의거기념회-서울특별시 종로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원이 된 나석주는 동양척식 주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해서 서울로 잠입한다.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며 남편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박자혜는 나석주의 서울 잠입 소식을 듣고 의거를 뒤에서 돕기를 시작한다. 서울지리를 잘 모르던 나석주에게 길을 알려주며 거사계획을 점검해 주는 등 남편을 도와 의열단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했던 것이다. 일제의 수탈로 신음하는 민족을 대신해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거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26년 12월 28일 동아일보 나석주 동양척식회사 투탄의거), 그리고 나석주 의거 뒤에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가교역활을 했던 신채호의 아내이자, 당당한 독립운동가 박자혜가 있었다.
이자형: 민족이 다치고 부상당하면서 그분들의 치료와 함께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가 더 투철해지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눈물과 아픔이 서려있는 장소, 서대문 형무소, 지난(2019년) 5월,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기념공원으로 문을 연 전시회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세명의 삶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었다. 베이징에서 무장 투쟁을 벌인 우당 이회영, 심산 김창숙과 함께 베이징의 뜨거운 불꽃 중의 하나였던 단재 신채호,
관객!: 옛날에 우리가 힘들었던 시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찡한 일들이 많이 있어요.
관객2: 그분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죄수 아닌 죄수로서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들죠.
오늘 이 자리에는 특별히 시간을 내서 찾아온 노부인이 한 명 있다. 신채호와 관련된 행사에는 빠지지않고 참석한다는 그녀는 신채호의 장남, 신수범의 아내이자 신채호와 박자혜의 하나뿐인 며느리다. 신채호의 둘째 아들은 어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덕남/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그 시대를 생각하면 이곳이 형무소잖아요. 가슴이 아프고 찢어지지요. 피가 거꾸로 솟아도 후세들이 공부하기엔 이 감옥만 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과 사별하고 중국으로 갔다가 올초 16년만에 돌아온 이덕남 여사, 남편이 모아놓은 신채호에 관한 자료와 책들, 일제가 만든 호적에는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신채호는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무국적자에다 독립운동까지 한 아버지 때문에 험난한 일도 많았지만 남편은 아버지 업적을 기리는데 평생을 바쳤다.
이덕남: 이것 乙支文德 책 이것도 우리 아버님 작품이에요. 이게 재미있는 건 맨 뒤에 이것이에요. 융희 2년 출판, 융희 2년이면 1908년 이라고요. 필사는 우리 남편 신수범이 했어요.
박자혜는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이덕남: 아버지를 위해서는 안하는 일이 없었다고요. 여기 ‘부’가 없잖아요. ‘모’가 박자혜잖아요.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이었던 남편의 이름을 아들에게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덕남: 싸릿대 회초리를 한 주먹 해왔대요. 그리고 식칼을 준비하고 양푼에 냉수를 가득 떠다놓고, 회초리로 매를 맞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워도 아버지 이름을 알고 싶냐’ 물어보니 알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 준다. 그러나 ‘내가 가르쳐줬다고 이후로 네 아버지 이름을 네 입으로 내뱉었을 때는 혓바닥을 자르겠다’ 그래서 칼을 가져다 놨다는 거 아니에요.
신채호와 그의 아들 신수범은 2009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주로 망명생활을 했지만 상하이에도 몇 차례 다녀간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던 상하이, 1911년경, 신채호는 상하이에 온다. 상하이 남창로 100롱(弄) 골목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8년전인 1911년, 예관 신규식이 상하이에 망명해서 지내던 거주지가 이곳에 있다. 신규식이 살았던 집은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중국인1: 원래부터 여기 계속 살았어요.
중국인2: 그래, 맞아.
독립운동 단체의 동제사를 운영하던 신규식은 이 집에 살면서 중국 산해혁명의 주역들과 교류한다. 당시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 활동을 하던 신채호도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서는 신해혁명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역사의 거대한 물결을 목격한다. (신해혁명 (1911년)-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설립한 혁명),
박찬승: 1911년 이후에 상해와 남경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혁명운동을 옆에서 잘 지켜볼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신채호 선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현대사에 휘몰아치는 변혁의 현장에 늘 있었던 신채호,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설 때부터 신채호는 그 현장에 있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해 하며 상하이에 온 신채호, 그 무렵 상하이에는 신채호 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군국주의의 광기가 세력을 점점 확장해 갈수록 독립의 열망은 더욱 간절해 지는 법, 신채호는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발기인 29명중 한 명으로 참여한다.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설립되고 국호를 대한민국,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정부구성안이 합의됐다. 하지만 이승만(1875~1965)이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신채호(1880~1936)는 임정을 박차고 나간다. 무력강경으로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자신과 달리 이승만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박걸순/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시정부 수립 당시부터 신채호는 굉장히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임시정부에 참여했지만 곧 임시정부를 뛰쳐 나오게 됩니다. 임시정부 존재가치를 부정하거나 비판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임시정부를 끌고가고 있던 이승만과의 독립운동론에 대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독립운동론의 차이가 신채호가 임시정부를 뛰쳐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일제의 만주침략 거점 도시였던 중국 다롄, 1930년 5월, 신채호는 법정에서 10년형을 언도받는다.
주우진/칭다오 농업대학교 교수: 이 건물은 다롄 지방법원이 1923년 뤼순에서 다롄으로 이전한 이후에 쭉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임시로 사용하던 건물이었고요. 신채호 선생님께서는 여기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1928년 5월, 타이완 기륭우체국, 방금 우편국에서 업무를 보고 나오는 신채호를 경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체포한다. 유령회사를 만들어 凡槪念의 위체(爲替)를 위조한 죄었다. 신채호는 왜 위체를 위조한 걸까. 그 무렵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스트가 된 신채호는 보다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결의한다. 잡지를 발간하고 폭탄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던 상황, 신채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위체를 생각했던 것이다. 다롄 법정에서 10년형이 확정되고 신채호는 뤼순 감옥으로 이감된다. 알려지지 않았던 신채호의 수감생활을 처음 세상에 공개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다롄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한국의 취재진을 보자 책상 깊숙히 넣어두었던 수첩을 꺼내든다. 수첩에서 발견한 낯 익은 이름,
중국인: 여기 申采浩입니다. 신채호, 신채호 1882년 46岁(세) 지번 411 288
신채호와 어떤 인연이 있는걸까. 뤼순 감옥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그는 신채호의 수의 입은 사진을 발견하여 처음 세상에 공개했다.
중국인: 제가 다롄 기록보관소에서 일람표를 보고 있는데 목록을 뒤져서 보다 이건 신채호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신채호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사진 이외에 다른 기록들도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겠지만 그 부분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사진의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의 연구자에게 줬습니다. 신채호의 사진은 이렇게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10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됐던 뤼순 감옥은 어떤 곳일까. 뤼순 감옥은 1902년 제정 러시아가 건설한 감옥으로 일본의 손에 넘어가면서 큰 규모로 확장됐다. 일제는 280여개의 감방을 만들어 2천명 이상을 한번에 수감 할 수 있도록 했다. 감옥 안에는 고문실, 교수형실, 그리고 15개의 작업장이 있었으며 수많은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들이 수감되어 고통을 당했다.
김월배/하얼빈 이공대학 교수: 바로 여기가 안중근 선생이 돌아가신 사형장인데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1909년 11월 3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듬해 3월 26일 감옥내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신채호는 어디에 수감되어 있었을까.
김월배: 바로 여기는 1995년에 뤼순 인민법원에서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정치범의 명단입니다. 그중에 신채호 선생님이 계십니다. 申菜浩
신채호는 수감되었을 때 정치범으로 분리되어 일반 죄수들보다 더 혹독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김월배: 여기가 여러명이 함께 수용된 장소라면 2층과 1층은 정치범 수용소입니다. 정치범은 독방에 수감됐습니다. 지금 뤼순 감옥에서 공개하진 않지만 신채호 선생이 뤼순 감옥에 수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독방에 수감돼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채호, 매일 계속되는 고된 노역이 끝나고 그가 쉴 수 있는 공간은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독방 안, 그런 생활이 6년 넘게 이어졌다. 원래 허약한 체질인데다 장시간의 감옥생활로 신채호의 몸은 점점 상해갔다. 어쩌면 신채호는 위조위체 사건을 계획할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예고했던 것은 아닐까.
형에게 한 마디 말을 올리려고 하니
이 붓이 뜁니다
그러나 억지로 참습니다
참자니 가슴이 아픕니다만
말을 하려니 뼈가 저립니다
그래서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운명이 정한 길로 갑니다.------------------친구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날씨 속에서 추위에 시달리던 신채호는 결국 뇌일혈로 쓰러지고 만다
김월배: 1936년 2월 21일날 정확하게는 1936년 2월 20일이죠. 신채호 선생님의 아들 신수범하고 부인 박자혜 여사가 같아 옵니다. 같이 와서 21일 날 오후 3시에 신채호 선생님을 면회를 해요. 이미 신채호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실 것을 통보받은 상태로 오신 거죠. 3시에 왔는데 신채호 선생님이 바로 이 의무실 바닥 시멘트 바닥 위에 멍석을 올려놓고 누워있는 상태였습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바닥, 홑이불 정도 되는 얇은 이부자리 속에 신채호는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김월배: 그 추운 날이 차가운 시멭트 바닥에서 사랑하는 부인, 아들이 왔는데도 보지 못하고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돌아가신 역사적인 현장이 바로 여기입니다.
형무소로부터 전보를 받고 달려온 아내 박자혜와 큰 아들 수범, 신채호는 오루 4시경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채 숨을 거뒀다. (1936년 2월 21일), 향년 57세, 망명길에 오른지 26년만이었다. 신채호는 사망한 다음날 감옥 인근 화장터에서 화장됐다. 유해는 낯선 땅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변해 가족 품에 안겨 고국으로 돌아왔다. 형무소 당국이 병보석을 제안 했을 때도 보증인이었던 친지가 친일인사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절했던 신채호 (1936년 2월 25일 동아일보 박자혜 품에 안겨 조선으로 돌아온 신채호 유골), 그래서 그의 죽음에 더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해온 선비의 투사는 민족의 가슴에서 영원한 별이 됐다.
박찬승: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보면 가장 원칙을 지킨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학자: 광활하고 웅장했던 고대사를 통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식민지 하에서 일제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채호의 우리 고대사 인식체계를 심어줬다는 것이죠.
행동하는 시대정신,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던 57년의 삶이었다. (KBS 특집다큐 단재 신채호 1화에서 정리).
①신채호(1880~1936)는 충남 대덕군에서 출생했으며 8살때에 이미 한시를 지었다. 신동으로 통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을지문덕 장군, 최영 장군, 이순신 장군 이 세 사람을 가장 중요한 영웅호걸로 선정하고 이들의 전기를 집필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훗날 국권을 되찾는 영웅호걸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언론인, 사상가, 역사학자로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그런 부분들을 연구하고 실천하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② 신채호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 입학, 1905년에 정7품 관직인 성균관 박사가 된다. 신채호는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여 대중집회와 만민공동회를 열고 국정개혁안을 발표한다. 1910년 강제병합이 되고 일제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다. 신채호는 신민회에도 가담했는데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고 국내에서의 활동은 불가능하여 중국으로 망명한다.
③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주로 망명생활을 했지만 상하이에도 몇 차례 다녀간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던 상하이, 1911년경, 신채호는 상하이에 온다. 상하이 남창로 100롱(弄) 골목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8년전인 1911년, 예관 신규식이 상하이에 망명해서 지내던 거주지가 이곳에 있다. 베이징에서 홀로 지내던 신채호가 나이 마흔에 1920년에 박자혜와 결혼한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신채호와 박자혜는 열 다섯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부부가 되었다.(1920년 4월 결혼), 두 사람의 결혼은 남녀의 만남 이전에 독립운동가와 동지의 결합이기도 했다.
④ 1919년 베이징으로 망명한 박자혜는 북경연합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신채호를 만났다. 결혼 후 남편 못지않게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던 박자혜, 그녀는 4살 때 아기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가 15년간 궁녀생활을 한 후 한일강제 병합 이후 궁에서 나와 숙명여학교에 들어간다. 박자혜는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이었던 남편의 이름을 아들에게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신채호와 그의 아들 신수범은 2009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는 신채호 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신채호는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발기인 29명중 한 명으로 참여한다.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설립되고 국호를 대한민국,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정부구성안이 합의됐다. 하지만 이승만(1875~1965)이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신채호(1880~1936)는 임정을 박차고 나간다. 독립운동노선이 서로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⑥ 1928년 5월, 타이완 기륭우체국, 방금 우편국에서 업무를 보고 나오는 신채호를 경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체포한다. 유령회사를 만들어 범개념의 위체(爲替)를 위조한 죄었다. 신채호는 왜 위체를 위조한 걸까. 신채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위체를 생각했던 것이다. 다롄 법정에서 10년형이 확정되고 신채호는 뤼순 감옥으로 이감된다. 뤼순 감옥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1월 3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수감됐던 곳이고, 이듬해 3월 26일 교수형을 당한 곳이다.
⑦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경 신채호는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은채 아내와 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57세, 망명길에 오른지 26년만이었다. 신채호 시신은 화장되어 한 줌 재로 변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형무소 당국이 병보석을 제안 했을 때도 보증인이었던 친지가 친일인사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절했던 신채호,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그는 죽어서 민족의 가슴에서 영원한 별이 됐다.
⑧ 일제 40년간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 3개노선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무실독립론, 이동휘의 무장독립론, 당시 이승만은 우리나라 최초 미국대학 국제정치학 박사에다 미국 제28대 우드로 윌슨(1856~1924) 대통령과 같은 프린스턴 대학출신 동문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 대통령의 힘을 빌리는데 아주 유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