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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J. G. 피히테(1762~1814):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동녘 1989
독일 고전 철학의 대표자. 지식학(Wissenschaftslehre)의 창시자. 부르주아적인 혁명적 행동주의의 성격을 지닌 주관적 관념론 철학의 창시자. 이 주관적 관념론 철학은 전체 현실을 인류의 사행(事行: Tathandlung)의 결과로서 파악하려 한다. 피히테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이 칸트 선험 철학의 완성이라고 평가하였다.(대사전1386)
피히테는 아주 궁색한 리본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주의 일시적인 재정적 후원을 받아 가면서 가까스로 학교 교육을 마쳤다. 1774년에서 1780년 사이에 그는 슐포르타(Schulpforta)의 군주가 창립한 학교에 다니면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예나와 라이프치히에서도 계속하여 신학 연구를 했으나 경제적 궁핍으로 학업을 끝마치지는 못했다. 그는 12년 동안 가정 교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직업을 구하여 독일을 두루 방랑하던 중에 그는 인민의 사회적 빈곤상을 알게 되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이런 시각은 후에 그의 철학 및 사회 이론의 입장에 대해서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대사전1386)
그는 1791년 쾨니히스베르크로 칸트를 방문하여 그에게 자신의 작품인 계시 비판 시론 Versuch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을 보이면서 평가를 부탁했다. 이 저작은 칸트의 소개로 출판되어서 피히테가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793년에 그는 클로프슈토크의 조카딸인 요하나 란(Johanna Rahn)과 결혼했다. 같은 해에(프랑스 혁명중 자코뱅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피히테는 익명으로 저술된 두 권의 저서([유럽의 제후들이 현재까지 탄압해 온 사상의 자유에 대한 반환 요구 Zurückforderung der Denkfreiheit von den Fürsten Europens, die sie bisher unterdrückten]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기고 Beiträge zu Berichtigung der Urteile des Publikums über die Französische Revolution]에서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다는 생각을 용감하게 공표했다. 1794년 피히테는 예나 대학의 철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다수의 초고를 통해 ‘지식학’을 완성해서 1798년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도덕론의 체계 Das System der Sittenlehre nach den Prinzipien der Wissenschaftslehre]를 발간했다. 예나 시기에 그는 자식인의 사명에 관한 강의로 유명해졌으며, 그 강의에서 그는 사회적 진보를 지향하는 인간 중심적인 학문 활동을 요청하고 정초했다.(대사전1386)
1799년 피히테는 소위 무신론 논쟁에 휩쓸렸다.^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근거에 관하여 Über den Grund unseres Glaubens an dine göttliche Weltregierung](이것은 포르베르크 [종교 개념의 발전]에 관한 논문의 서론으로서 미리 쓰여졌으며 1798년 예나에서 간행된 철학 잡지 제1권에 발표됐다)라는 그의 논문은 그가 도덕적 세계 질서와 신의 이념을 동일시했다는 이유로 [피히테와 포르베르크의 무신론에 관하여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라는 익명의 논문에서 비판받았다. 또한 여기서 피히테의 민주주의적인 신념도 공격받았다. 그로 인해 작센 제후국 정부는 그 잡지의 출판을 금지했으며 피히테는 대학 평의원회로부터 질책당하고 교수직을 받탈당했다. 1805년 에어랑엔에서 교수직을 다시 얻을 때까지 수년 동안 그는 베를린에서 재야 학자로 활동했다. 1806년 그는 나폴레옹 군대의 진군과 발맞춰서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거기에서 그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807년에는 마침내 베를린으로 가서 프랑스 군대에 점령당한 도시에서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연설했다. 1809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철학 교수가 되었고 1811년에서 1812년 사이에 그는 최초의 선출된 총장으로서 재직하였다. 이런 활동 가운데서도 그는 대학생 조합에서 내려오는 악습(결투 등)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1813년에 피히테는 나폴레옹에 의한 외국 지배에 대항하는 해방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서 결성된 국민군의 훈련에 참가했다. 그는 종군 간호원으로 활동했던 부인을 통해 감염된 전염병(아마도 티푸스)으로 죽었다. 하이네는 피히테를 사상과 신념이 일치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자면 피히테의 체계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가 자유와 평등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신기원이라고 해석하는 프랑스 혁명의 진보적 성과를 염두에 두고 인민의 자치 능력과 자기 입법 능력을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나의 체계는 자유의 제1체계이다. 국가가 인간을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구해 내는 것처럼 나의 체계는 인간을 물자체, 즉 외적인 영향의 질곡으로부터 구해 낸다…내가 이런 혁명에 관해서 썼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나의 체계에 대한 충고와 비난이 동시에 나에게 주어졌다.”(대사전1387)
피히테에 있어서 철학이란 세계관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과정에의 실천적인 태도, 신념, 인격에 관한 자기 고백이다. “그가 어떤 철학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데 달려 있다.” 우선 객관을 출발점으로 삼고 주관을 객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자유는 결국 부정된다. 이것은 주어진 것에의 순응, 보수주의, 독단론의 관점이다. 다음으로 세계를 이성의 원리에 따라 선천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절대적인 주관의 창조적 행위로부터 출발해서 객관을 이 주관에 의해 산출되고 지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해 보자. 이것은 지식학이라는 완성된 선험적 관념론의 관점이며 진정한 자유의 체계이다. 이로써 피히테는 주관적 관념론의 관점을 취한다. 하지만 이 관점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자아Ich라는 범주로 표현되는) 인류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입장은 뚜렷한 사회 정치적인 목표를 갖는 혁명적인 부르주아적 행동주의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혁명적 저술인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기고]에서 피히테는 이성적인 인류의 능동적 주체성을 정초한다. 즉 그는 기존의 전통과 제도를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헌법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모든 세대의 능력과 권리를 강조하고 있다. 피히테에 의하면 국가나 교회같이 예로부터 전래되어 역사적으로 정당화된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법적 제도들과 농노제 같은 사회 상황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동시에 자유, 평등과 같은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와 모순되는 것이므로 그것들은 극복되어야 한다.(대사전1387)
피히테는 오직 자신의 노동에 의거하는 소유를 통해 확보되는 자유와 평등의 기초로 고도로 발전된 문화를 가진 만인의 인류적 공동체−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적 이상−를 꿈꾸었다. 여태까지의 역사에서 인류는 그런 이상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거나 끌어낼 수 없었다. 여기서 피히테는 그의 철학을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형성한다. 즉 역사란 인류의 활동이 매개가 되어 주어진 상황을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극복해 내는 과정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란 활동적인 인간에게만 주어진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철학이 아직 보여 주지 못한, 이성을 가진 인류의 환경 지배, 자기 변혁, 자기 형성에 대한 정열이 피히테의 전저작을 꿰뚫고 있으며 이미 1794년 그의 연설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비로소 인간이 그리고 유일하게 인간만이 세계 안에 조화와 질서, 그리고 규칙성을 가져왔다. 인간은 문화를 발전시키고 세계 전체를 개척해 나간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이상에 의거하여 가공되지 않은 소재를 조직해 나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명에 관한 피히테의 이런 생각은 지식학에서 철학적인 체계로 완성된다.(대사전1387)
‘지식학’의 방법적인 출발점과 기본 사상은 선험적(선천적으로 이성적인) 주관인데, 그것은 원초적인 사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그 자신의 존재)을 정립하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객관 세계를 그의 대상과 산물로서 산출한다. 왜냐하면 대상 없는 행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와 행위는 동일하며 인식 활동은 이 통일적인 전체 과정의 한 측면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이렇게 주관과 객관을 전체로서, 하지만 자체 내 구별된 것으로서 산출해 내는 통일적인 사행 내에 또한 의식의 통일성과 의식의 체계적인 인식 능력이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지식학은 이런 계^속적인 자기 생산에 대한 지(知)의 체계일 따름이다. 즉 지식학은 인류의 절대적인 자기 의식이다. 이런 활동태(Tätigsein)와 법칙들의 총체성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배에 이르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의미로 피히테에서는 지식이란 자유와 동일하며 자유는 지식과 동일하다. “다음과 같은 것이 선험적 관념론의 진정한 정신이다. 즉 모든 존재가 지식이다.” 이렇게 함에 있어 물론 피히테가 세계를 정신적인 원리로 해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유는 이런 자기 의식을 거쳐서 비로소 도달되며 동시에 인간의 사명도 달성된다고 하는 계몽 사상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대사전1387-1388)
그러나 이성의 힘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피히테는 항상 실천 개념을 파악하고자 한다. 지식학의 첫 번째 ‘절대적으로 확실한, 도출될 수 없는 원리’는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 행동이다. 피히테의 전제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행동하므로 존재한다”(Ich bin, da ich handle)이다. 물론 자아(주관)는 동시에 지성(Intelligenz)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행동하는 중에 나 자신을 주시한다는 사실이 견지되어야 한다. 자아는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자아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어 행동하므로, 자아의 행동 법칙은 동시에 인식의 대상이며 인식의 체계적 특성을 규정한다. 이런 근본 사상은 세 가지 명제로 완성된다. 제1명제: 자아(Ich)는 근원적으로 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이것은 동일성의 명제이며 절대적인 주체의 자기 정립이다. 제2명제: 자아에게는 단적으로 비아(Nicht-Ich)가 대립된다. 이것은 부정의 명제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자기의 대상으로서의) 비아와의 대립을 통해서만 활동하고 스스로를 확증할 수 있으므로 자아는 비아를 통해서 제한된다. 자아-비아(주관-객관)의 관계는 피히테에 의하면 대립물들의 변증법적 통일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이런 관계는 항상 하나의 과정으로서, 즉 활동태로서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순들의 계속적인 정립 및 지양으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이런 과정에 대한 계속적인 기술은 다음과 같은 제3명제에서 이루어진다. 제3명제: 자아는 자아 속에서 가분적(可分的) 자아(ein teilbares Ich)에 가분적 비아를 대립시킨다. 이것은 제한(Limitation, Begrenzung)의 명제인데 이 명제에서 주체-객체 세계의 산출 과정의 다양성이, 즉 상호 의존성과 양적 능력(Quantitätsfähigkeit: 피히테가 명명한 바 있음)이 파악되어야 한다.(대사전1388)
주체의 창조적 행위로서의 이런 산출 과정을 더욱 폭넓게 근거짓기 위해서 피히테는 칸트의 생산적 구상력(produktive Einbildungskraft) 개념을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변화된 의미로 사용한다. 즉 그 개념은 세계의 근원적이고 실천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무의식적인 산출 과정을 의미하며 그 근거 위에서 비로소 오성의 활동이 나타날 수 있다. 피히테는 인류의 여러 활동의 특수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자아의 두 가지 원칙적인 실현 방식을 구별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주로 도덕적으로 규정하는 실천적인 실현 방식에서 자아는 객관 세계를 제한한다. 즉 자아는 도덕적 자기 규정을 통해서 환경의 영향에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그 영향을 극복하고 자기를 고양시킨다. 그에 반해서 이론적인(인식적인) 실현 방식에서 자아는 비아를 통해서 제한된다. 왜냐하면 인식하는 주관은 객관 세계의 법칙들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관은 궁극적으로는 객관 세계도 마찬가지로 자아의 산물로, 즉 자아의 고유한 활동의 산물로 파악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피히테가 아무리 객관적인 것의 자립성을 주장하려고 해도 그의 극단적인 기투(Entwurf) 개념 내에서 결국 주관과 객관은 절대적으로 일치하며, 단순한 주체-객체 변증법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주관적 변증법의 특수성이, 다른 한편으로 객관적 변증법의 특수성이 올바로 파악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대상 획득 과정에서 성립하는 복잡한 상호 관계도 올바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현 방식의 구별에 상응해서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을 실천적인 지식학(도덕론)과 이론적인 지식학(인식론)으로 구분한다. 그에게 있어서 실천적인 능력이 이론적인 능력의 전제를 이루며 후자보다 전자가 더 고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식학의 서술에 있어서는 실천적인 철학을 근거지을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인식의 조건이 논구되어야 한다.(대사전1388)
‘이론적인 지식학’에는 피히테로 하여금 칸트를 능가하게 만드는 중요한 맹아가 들어 있다. 첫째로 피히테에 있어서 인식은 무전제적인 것이 아니다. 실천적인 정립이 인식에 선행한다. 따라서 칸트의 비역사적인 선험주의는 애초부터 제거된다. 왜냐하면 피히테에 있어서는 판단의 범주와 원리들은 자아의 활동 과정의 산물로서 파악되며 따라서 칸트의 범주표와 같은 몇 가지의 것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피히테에 있어서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은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이며 진행 과정의 두 측면이다. 즉 우리 자신에 의해서 산출되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선천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법칙과 범주들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도 존재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필연적인 표상 체계 혹은 전체적인 경험을 형성한다. 이로써 인류의 역사적 활동 및 경험과 인식활동이 일치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한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동시에 위에서 언급한 주관과 객관의 절대적 동일시로 인해 자연의 고유한 법칙성의 문제가 소홀히 취급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발전되면 종합의 문제 즉 분석적 사고와 종합의 상호 관계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즉 피히테에 따르면 오성을 매개로 한 종합은 그것이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라는 실재적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실제로 정립되어 있는 것이 반성적으로 추구될 따름이다. 이미 행위가 정립과 반정립을 포함하^기 때문에 분석적 인식도, 종합적 인식도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피히테에 있어서 분석은 (칸트에서처럼) 단순한 개념 분류 이상의 것이다. 즉 분석은 객관 세계의 여러 측면을 이론적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이며 객관 세계를 경험하는 방법, 따라서 진정한 지식 확대의 방법이며 지식을 종합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대사전1388-1389)
피히테는 인식을 다음과 같은 단계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즉 감각과 직관을 거쳐서 오성지에 이르고 다시 이를 거쳐 최고의 단계로서 이성지, 즉 자기 의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우리가 객관 세계에 대해서 우리의 고유한 산물로가 아니라 마치 우리에게 낯선 것, 이질적인 것과 관계 맺는 것처럼 생각했던 착각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를 기초로 삼아 피히테는 학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경험적인 학−이는 저차원적인 단계를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그 학문의 객관 세계의 부분적인 영역에 대한 부분적인 인식만을 매개하며 통일적인 것을 분할하기 때문이다(이런 학문들은 모두 객관과 주관의 관계를 한층 더 추상해 갈 뿐이다). 2) 본래적으로 이론적인 학−주체-객체 변증법의 총체성에 대한 지로서의 지식학. 이런방식으로 사회적인 인식 과정은 자유롭게 산출하는 자기 의식적인 인류로서의 자아의 이상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지만, 그 이상의 실현은 오직 실천적으로, 즉 도덕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실천적인 지식학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놓여 있다.(대사전1389)
‘실천적 지식학’에서는 피히테가 한편으로는 아직 철학사에 있어서 도덕의 지성적인 영웅에 속한다는 것이 드러나긴 하지만 다른 한편 그가 근본적으로 계몽과 교화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사회 변혁을 목표로 하는 실천적 행동을 고취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다. 피히테의 저술에서 정언 명령은 선의지뿐 아니라 실제의 행동을 요청한다. 즉 “정언 명법−‘너는 오로지 해야만 한다’…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행동하기 위해서, 달리 말해 절대적인 자기 규정에 의거하여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한다. 행동의 전적인 근거와 모든 조건은 행동 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히테는 사회의 새로운 도덕적 질서가 인류의 자기 완성을 가능케 해주는 회전축이 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피히테에 있어서 도덕 원리(도덕 법칙)의 필연성은 유한한 경험적인 자아(개인)와, 자아의 이념(유로서의 자아성)에 대해 경험적 자아가 부적합하다는 이 양자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산출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적합성은 유한한 자아가 전인류의 도덕적 상태를 목표로 하면서 도덕 법칙에 상응하는 자유롭고 자립적인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폐지되어야 한다. 완성된 도덕적인 공통체란 물론 완전히 실현될 수 없으며 다만 무한한 과정 속에서 추구될 수 있는 이상일 따름이다. 따라서 피히테에서는 추상적인 원리인 칸트의 당위 개념이 고수되지만 또한 의무 요청의 엄격성도 주장된다. 아니 오히려 후자가 더욱 강조된다. 즉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각자는 “그의 개체성이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는” 식으로 도덕 법칙과 동일화되어야 하며 따라서 공동체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렇게 공동체를 겨냥하는 행동의 목적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놓여 있다. 즉 도덕 법칙은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 이미 목적일 수 없다. 이때 수단이란 바로 이 모든 타자의 도덕성, 즉 공동체의 도덕성을 건립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여기서 피히테는 인간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주의주의).(대사전1389)
피히테는 다양한 사회적 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 의무를 구분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해 나가면서 의무 윤리학을 완성시켰다(예컨대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과 인류의 교화에 대한 인류의 무제약적인 의미들 그리고 결혼, 국가 등과 같은 공동체, 신체, 지성의 제약적 의무들).(대사전1389)
피히테의 종교 철학은 그의 도덕 철학적 구상으로부터 마련된다. 그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의 이념을 인간의 결단의 자유와 합치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거부하고, 신의 이념을 도덕적인 세계 질서와 동일시한다. “도덕적인 질서라는 개념에 ‘모순되는’ 모든 신앙은…배척되어야 할 미신이며 ‘인간을 철저히 멸망시키는’ 미신이다.” 하지만 후기 저작에서는 종교 특히 기독교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의 종교 이론에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기도 했는데, 피히테는 이것이 그의 도덕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입장을 유포시키기 위한 출발점인 민족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유 방식을 이용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대사전1389)
피히테는 그의 생애에 걸쳐서 몇 개의 초고 속에서 정치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해석에 몰두했다. 그는 역사적인 진행 과정과 시대적 사건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화시켰다. 1800년에 피히테는 [폐쇄적 상업 국가]라는 저술에서 소부르주아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 저술에서는, 노동과 스스로의 노동력에 의거한 소유권이 확보되어야 하고, 국가는 직업의 자유, 자유 무역의 제한을 통해서 그리고 화폐 제도의 규제를 통해서 치부욕에 제동을 가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나폴레옹의 억압적 점령 정책하에서 피히테는 [독일 민족에게 고함]을 통해 보편적인 인류 문화에서 독일 민족이 갖는 특별한 과제를 강조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프랑스 혁명의 업적에 대해서는 계속 찬미한다. 1804년 피히테는 [현시대의 특징]에 대한 강의에서 역사의 시대 구분에 착수한다.(대사전1389)
피히테의 영향은 우선 그의 체계를 통하여 그가 셸링뿐 아니라 헤겔에게 가했던 여^러 가지 자극을 들 수 있겠다. 즉 그는 한편으로는 칸트를 넘어서 나아가는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에 빠짐으로써 셸링과 헤겔로 하여금 독창적으로 객관적 관념론적 체계를 수립하여 피히테 철학의 불만족한 점을 극복케 했다. 그러나 피히테의 의의를 칸트와 셸링(및 헤겔) 사이의 중간항으로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치적인 행동주의와 참여를 기초로 해서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면서 고유한 입장을 구축함으로써 그는 독자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피히테의 기본 사상인 행동주의와 주의주의는 3월 혁명 이전(Vormärz)의 청년 헤겔 운동, 특히 자기 의식의 철학(브루노 바우어의 철학)과 직접적인 연결 가능성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피히테의 철학은 당시의 혁명적인 정치 운동의 위치를 규정하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명제들과의 연관 속에서 의식적으로 형성된 것이었기에, 이런 철학의 요소를 반동화되어 가는 부르주아 철학의 방향 및 구상 속에 집어넣으려는 그 모든 시도는 피히테의 이념을 변조, 악용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리케르트의 신칸트 학파에서, 더구나 에밀 라스크와 뮌스터베르크에서 명백하게 등장했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자들은 피히테의 사행 사상과 특히 독일의 민족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을 악용함으로써 피히테의 관심사를 심하게 변조시켰다.(대사전1389-1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