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보다 배꼽이 크다 / 양선례
지인들이 하나둘 교단을 떠나고 있다. 친한 친구 둘은 작년에, 만든 지 30년이 된 ‘미운 오리 새끼’ 모임 일곱 명의 회원 중 넷도 몇 년 사이에 명예퇴직했다. 남은 둘도 올해까지만 한다고 선포했다. 아이들이 더 이상 이쁘지 않아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 해서, 건강이 나빠져서 등 이유도 다양하다. 결국 유일하게 승진한 나만, 정년까지 채울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수석 언니와는 만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교직에서 만난 지인 대부분이 몇십 년씩 된 것에 비하면 그리 긴 편은 아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함께 근무한 기간도 짧았으나 생각이 비슷하고, 느린 학습자 공부를 함께하면서 짧은 시간에 꽤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언니조차 정년 2년을 남겨 놓고 퇴직을 신청했다.
언니의 엄마는 몇 년째 투병 중이다. 나란히 아파트를 얻어 한 집엔 자신의 가족이, 바로 옆집에는 미혼인 여동생과 엄마가 살았다. 퇴근 후에는 언니가 장을 봐서 저녁을 준비하면, 여동생이 설거지까지 마치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살림을 꾸렸다. 그런데 엄마가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되면서는 그조차 어려워졌다. 할 수 없이 언니와 여동생이 출근하는 낮에는 사람을 써서 간병을 이어갔다. 그런데 간병인도 7일내내 근무할 수는 없기에 주말에는 가족들이 돌아가면 엄마를 보살폈다. 서울에 사는 오빠와 여동생이 다녀갔지만 어쩌다 한 번이었다. 사람을 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조금만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일이 힘들면 관두기 일쑤여서 속상한 일이 많았다. 엄마는 입퇴원을 반복했고, 그러는 사이 상태도 조금씩 나빠져 갔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자, 비록 몸놀림은 자유롭지 못하나 의식은 또렷한 엄마는 집으로 가기를 희망하였고, 그런 엄마의 바람을 차마 못 본 체 할 수 없어 이번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아침 일곱 시에 엄마 집으로 출근한다. 식사를 챙기고, 엄마 운동과 목욕 시키고, 퇴근한 여동생과 저녁까지 먹고 오후 여덟 시가 되면 벽 하나 차이인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주중에는 수석 언니가, 주말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엄마의 보호자가 된다. 그 생활이 벌써 3개월째다. 하루 열세 시간의 노동에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편하단다.
지난 주말에 수석 언니와의 모임이 있었다. 갇혀 지내다가 오랜만에 나왔다며 즐거워했다. 엄마의 근황을 물었더니 “지난 1년 동안 엄마가 1억을 까먹었어.” 한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언니는 자신의 엄마도 3년 투병에 1억 가까이 들었다며 거든다. 수석 언니는 매월 간병인 월급으로 5백만 원, 병원에서 받는 재활 치료비로 4백만 원씩 들었단다. 엄마가 저금한 돈에 아버지의 연금이 있어서 자녀들이 치료비 보탤 걱정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보통의 서민은 엄두도 못 낼 액수다. 부모가 아무리 귀해도 한 번도 아니고, 연 1억씩 들여 부모를 부양할 수 있는 자식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이다. 낮은 수가로 의사들은 불만일지 모르지만 병원 문턱이 낮기에 누구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그런데 의료보험 혜택이 안 되는 간병비는 고스란히 환자 가족의 몫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부모의 간병으로 지친 가족, 가정이 깨질 정도의 위기에 처한 이도 자주 본다. 사회보장책은 선진국처럼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는데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니, 걱정이다. 마음은 있으나 생업에 바빠 부모의 간병에 매달릴 수 없는 자식의 처지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그른 것 하나 없다는 걸 주위에서 심심찮게 본다. 모든 생명체는 소멸한다. 조금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을 뿐, 영원할 수는 없다.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늘어간다. 가슴이 아프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게 현실이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용기를 낸 수석 언니 같은 이는 그래서 더 귀하다.
부디 그녀의 엄마가 조금 더 오래 버텨 주시길 기도할 뿐이다.
첫댓글 오늘 유튜브에서 봤는데 투병하면 일년에 1억 까먹는건 일도 아니라고 인터뷰 한 장면을 봤어요. 실제 그렇네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마침 교수님이 적절한 글감을 주시기에 써 봤습니다.
@이팝나무 간병비를 무시 못해서 자녀가 직장을 그만 두고 간병하는 것을 봤어요.
아... 나는 수석 언니처럼 못 할 것 같아요.
저도요.
그래도 한편으론 그런 엄마가 계셔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간병 보험을 하나 들까 합니다. 부모 간병도 5060세대가 마지막이지 싶어요.
저랑 같이 들어요. 선배님!
의무는 다하나, 권리는 누리지 못하는 "낀 세대"가 바로 우리인 듯합니다.
노인 모시는 건 사회가 많이 도와 줬으면 좋겠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리 되겠지요.
우리나라가 조금 더 국력이 튼튼해진 다음에요.
고맙습니다.
와, 1년에 1억 병원비? 오래 살면 않되겠네요.
'열 자식 한 부모도 못 모신다.'는 말 공감, 공감합니다. 몇 달도 모시지 않는 시대가 된 것 같아 씁쓸합니다.
오래 산만큼 건강 수명도 그만큼 늘어나면 되겠지요.
저도 공감이 많이 됩니다.
키울 때의 정성과 노력에 비하면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석 언니분께서 정말 대단하시네요. 빨리 제도가 뒷받침되었으면 좋겠어요.
제 친구도 이번에 명퇴했는데 가장 큰 이유가 어머니를 돌보고 싶은 것이었어요.
병원비가 그렇게나 많이 든다니, 서민들은 그냥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맘 아파하고 죄스러워하며 살 수밖에 요.
오래만 사는 것은 정말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맘 아파하고 죄스러워하며.... 그러니 기를 쓰로 건강해야겠어요.
간병비를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정부 정책이 한심스럽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도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저도 양가 맏이다 보니 충분히 공감되네요.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요양병원에 모시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아프답니다. 현재 겪고 있는 숙제라 무거운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수석 언니의 엄마 그나마 복 있는 양반이네요.
간병인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가까이에서 자녀들이 돌봐드리니까요.
더 늦기 전에 나라에서 어떤 제도나 지원이 획기적으로 마련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수석 언니 같은 분이 얼마나 있을까요. 효녀인 딸 덕분에 그녀의 어머니는 호강합니다. 대단한 수석언니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