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때까지는 북태평양, 일본 또는 동남아 항로(航路)를 왕래했었는데, 냉동‧냉장 화물 전용선(專用船) 선장으로 픽업됨과 동시에 전혀 생소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의 라고스항까지 가게 되었다. 내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일본 ㈜도쿠마루(德丸)해운 소속 히로시마마루(宏島丸 : 3,000톤)에 승선하기 위해서였다.
1977년 3월 10일(목). 김해공항을 출발, 일본 오오사카, 도쿄(東京) 하네다(羽田), 미국 알라스카의 앵크리지 공항, 유럽 네델란드의 암스텔담 공항을 거쳐 라고스 공항까지 장장 33시간의 비행 일정이었다. 초행(初行)인데다 동료 선원 열다섯 명과 함께 가야 했기에 정신적 부담과 더불어 무척 긴장도 되었다.
처음 가보는 유럽과 아프리카! 과연 어떤 곳일까? 새로운 곳에 대한 내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람 사는 곳인데 별것 있을라고…’. 하지만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기야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어선(漁船)들은 이미 아프리카 연안에 진출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려웠던 지역이기도 했다.
일본 도쿄에서는 네델란드 국영 항공사(KLM : Royal Dutch Line)의 DC-10기(機)을 이용했다. 그때는 일본 오사카(大阪)도 바다를 메워 만든 지금의 간사이(關西) 공항이 매립 중이어서 육지의 이타미(伊丹)공항, 도쿄 나리타(成田) 공항도 완공되기 전이었기에 하네다(羽田) 공항을 이용해야 했다.
다음날 새벽 5시, 북극지방(極地方)은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만년설이 뒤덮힌 알라스카의 앵커리지 공항에 내렸다. 급유(給油)를 위해서다. 미·소 냉전시대라 소련상공을 비행할 수 없어 한국‧일본 등지에서 유럽으로 가려면 북극(北極) 상공을 경유해야 했는데 거리상 중간지점인 미국의 알라스카(Alaska)의 앵크리지(Anchorage) 공항에서 급유를 해야만 했다.
북극권 동토에 거창하게 지은 엥커리지 국제공항(Ted Stevens Anchorage International Airport)! 그 규모와 기술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눈과 얼음덩이 세상이면서도 거대한 활주로에는 눈이 하나도 없이 말끔히 녹아 있어 보잉 747 등 거체(巨體)들의 비행기가 사뿐히 뜨고 앉는다.
때마침 일본의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시점이라 유럽행 항공기는 늘 제펜니스로 만원이었고, 가는 곳마다 싹쓸이 쇼핑이 유행하고 있었다. 상점마다 일본인 점원이 모자라 현지 영사관직원 가족들까지 알바로 채용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곳 특산인 털옷이 탐났다. 하나 사다가 아담 사이즈인 마누라에게 걸쳐주면 포옥 싸여 마치 귀여운, 요즘 표현으로, 팻(pet) 같을 것이라는 상상만 했지 실상은 그림의 떡이었다. 언필칭 우리네 사정으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비구름이 짙게 깔린 사이로 반듯반듯하게 잘 정리된 평화스러운 농촌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네델란드의 암스텔담 국제공항에 내렸다. 곳곳의 푸른 잔디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부산출발 후 27시간 걸린 셈이다. 공항의 모든 시설이 Computer System이라 높은 수준을 보인다.
구내 서점에서는 Sex 잡지와 사진을 공개적으로 팔고 있는 것 또한 보지 못한 광경의 하나다. 우리는 물론 대부분의 후진국에서는 그 잡지나 사진을 소지(所持)만 하고 있어도 처벌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세상의 문화차이가 엄청 크다는 것을 느꼈다. 환율이 1미(美)달러에 2.5Gillder.
전원(全員)이 낯선 식사를 더듬거리며 찾아 먹었다. 처음 대하는 뷔페식이었다. 목적지인 Lagos행인 KLM(네델란드국영 항공) 587편으로 환승하기 위해 기다렸다. 검은색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억세고 무서워 보인다. 우선 남녀불문하고 우람한 덩치에서 기가 한풀 꺾인다.
라고스까지 아프리카 대륙 중앙부를 북에서 정남으로 6시간 직항(直航)한다고 한다. 끝없는 사하라 사막의 정경이 감탄스럽다. 사막! 참말로 그것은 인간을 외면할 것인가? 그곳에 비만 내리게 한다면…. 기내에서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오후 5시 40분, 훅 하고 덮치는 후리터분한 바람이 숨을 탁탁 막는 무더위 속을 내렸다.
아프리카 황금해안으로 알려진 기니만에서 가장 큰 나라, 나이지리아(Nigeria)의 해상관문인 라고스(Lagos) 공항이다. 출입국 수속이 한심스럽다. 후진국일수록 그렇듯 거창한 제복에 오만과 독선이 가득한 직원들, 개항(開港)한지 얼마되지 않는 듯 포장도 안 된, 바깥은 ‘도떼기시장’ 같다.
모두가 검다. 검은 숲이요 물결이고 벽이다. 몰려다니는 검은 녀석들의 떼거리에 아연할 뿐이다. 구할 수가 없으니 이것만은 꼭 가져오라고 하여 수화물로 가져간 귀중한 된장 양철통이 공항 광장에서 터져 그곳 사람들에게 ‘똥’으로 오인 받은 사건은 자서전에서 자세히 밝힌 바가 있다.
마중 나온 2등기관사와 기관장(機關長)에게 대강의 상황은 들었다. 출항일자가 내일이란 말은 있지만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녹초가 된 느낌이다. 호텔에 투숙. 몸은 파김치인데 눈은 말똥말똥했다. 긴장을 풀어서일까? 암튼 잠부터 한숨 자기로 하고, 막 잠이 드려는데 기어이 내일 출항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다. 제기랄.
아침 식사 중 기어이 코피가 터진다. 긴 시간 항공기 여행으로 인한 과로와 긴장 탓인듯하다. 오전 중 허겁지겁 인수인계를 마치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너무 질서가 없다. 검은 정글 같은 항만 사정이 그렇고 마치 해상창고 같은 선박 자체도 그렇다. 해상운송의 기본질서도 없다. Hatch Cover(화물창 덮개)를 덮기도 전에 출항하란다. 서류도 없다. 출항허가증(Clearance)이라는 구겨진 종이 한 장뿐이다. Pilot(導船士)가 승선, 무조건 나가자는 데 어쩔 수 없다. 귀국자들이 부두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볼 겨를도 없이 도선사의 Order에 따라 외항을 벗어났다.
부딪쳐 보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은 차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 외항 멀찌감치에 닻을 내리고 확인하고 정리를 하면서 차근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외항(外港)에는 수백 척의 배가 기다린다. 교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조타수(操舵手)들이 있어 조언을 들을 수가 있어 대강의 사정은 알았다.
개중에는 1년 이상 닻을 내린 체 기다리는 배도 있다고 한다. 알만하지 않은가. 이놈의 나라! Radar(레이더) 2대가 모두 고장이라도 고칠 수가 없는 곳이라니, 장님이 지팡이로 더듬듯 해야 했다. 눈꺼풀이 바위처럼 무겁던 잠이 어디로 간 것일까. 물어물어 찾아간다. Lome항이라던가, 가야 할 항구 이름이? 나라 이름은 뭐꼬? 덥다. 기분 나쁘게 덥다.
Lome항의 등대마져 꺼졌다. ‘불 꺼진 등대는 고무줄 없는 빤쓰’ 라더니-. 그래도 밝고 많은 불빛이 한결 위안이 된다. 21:30. 외항에 닻을 던지고 Lome Port Control에 입항을 알렸다. 현지 시간으로 20시라고 상냥한 목소리의 아가씨가 정정해준다. 그렇지. 이곳 시간이 바로 GMT(세계표준시간)와 같다.
그렇게 시작된 Lagos항을 1년 동안에 두어 차례 더 들락거렸고 어떤 때는 3개월을 머문 적도 있었다.
이 당시의 Nigeria의 관문인 Lagos항은 석유의 힘으로 겨우 개발이 시작된 때였다. 항만 전체를 독일의 유럽 최대의 복합기술업체인 지멘스(Siemens)사가 전면적으로 현대적 항만시설로 만드는 중이었다.
아프리카 황금해안에 자리잡은 나이제리아는 1960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했다고 하다. 지금은 아프리카 중에서는 비교적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남아공 다음으로 많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과 수교(修交)도 없었고 한국인은 기업에서 파견된 직원, 유엔 직원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프리카에선 좋건 나쁜 의미로든 인지도가 높은 나라다.
이곳에서 겪은 일들 중 잊혀지지 않은 사연들을 남겨 보고자 한다.
부두 시설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각 선박들은 현지 사람(인부)의 본선 선원거주지역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선측(船側)에다 나무로 임시 간의 화장실을 만들고 용무를 보면 바로 바다에 떨어지게 조치를 했다. 여차하면 사람도 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부두에 접안해 있는 선박 옆으로 지나다 보면 맑은 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듯 똥물을 집어쓰기도 했다. 부두길에서는 개똥이든 사람 똥이든 밟기는 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높다란 배 밑을 지나가다 보면 뭔가 물에 풍덩하고 떨어지고 나서 종이가 휙휙 날며 내려온다. 배 위에서 종이를 깔고 볼일을 보고는 종이 채로 바다로 던진 것인데 중량의 차이로 그 놈의 똥과 종이가 따로따로 놀아난 것이다.
외항과의 통선(通船)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선박 자체의 구명정(救命艇)을 이용하여 외항에서 내항으로 왕래하였기에 그것이 안 되는 선박은 꼼짝하기도 힘들었다. 마침 우리 ‘히로시마마루’는 옛날 전성시에 공모선(工母船)이었기에 큼직한 엔진이 달린 구명정이 있어 편리했다.
부두시설이 이러한 데다 항만 운영 시스템도 미숙하여 화물의 적(積) · 양(揚)하가 제대로 이루어 질 수가 없다. 한창 검은 황금(석유)의 덕분에 내다 팔 것은 없어도 들여오는 것은 많아 외항에 수백 척이 대기하고 있다.
썩는 곳에는 파리떼가 끓듯이 사람 많은 데는 언제나 도둑이 있다. 밤이면 이들 선박에도 도둑이 기어오른다. 희한한 것은 선내에 총(銃)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난 배는 근처에 도둑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실은 세관당국 이외는 아무도 모르는 기밀사항인데 용케도 도둑님(?)들은 알고 있다. 기밀이 유출된다는 뜻이다.
항만 당국이나 현지 대리점과의 연락은 VHF(Very High Frequency: 초단파) 무선기로 해야 함으로 선교에는 24시간 당직자가 있어야 한다. 한 밤중에라도 닻을 감고 들어오라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연락이 제대로 안 되면 입항 순서가 바뀌어 버린다. 한 밤중에는 괴상하고 이상한 소리들이 나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무슨 말들인지를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뭔 말들이 그리 많은가 싶어 선교(船橋, Bridge) 무전기 옆에서 며칠간 들었다. 한 주일을 지나자 감이 잡힌다. “한국 사람 있으면 나오세요” 하는 방송이 들리기도 한다. 고향 까마귀를 만난 듯 얘기가 오간다.
공적(公的) · 사적(私的)인 내용들이 뒤섞였다. 항만국과 도선사, 각 선사(船社) 대리점들 간에 오가는 대화 가운데는 제3자가 들어서는 안 될 사항도 있어, 이 놈의 항만 사정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그래서 터득한 것이 와이로(뇌물)가 중요한 몫을 한다는 것이었다. 적당한 루트를 통하면 출입항의 순서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선박이나 외항에 도착하면 맨 먼저 항만국에 신고를 한다. 선명(船名)과 톤수, 위치, 출항지 등등 필요한 사항을 알리고 묻는 것에 대답해 줘야 한다. 입항 순서는 규정이 없는 듯했다. 대강 식품류가 우선이고 시멘트나 건축자재 등 일반화물은 늦어진다. 독일 시멘스사의 선박은 도착하자마자 입항하는 걸 보면 아마도 부두 건설공사에 필요한 자재나 장비인 듯 여겨진다.
특히 우리와 같이 냉동생선 혹은 육류를 싣고 있는 선박들이 많았지만 이들은 대개 중·소형선으로 한국인 선원이 승선하고 있는 것이거나, 일본 국적선들도 많은 편이었다.
이곳에서 인도 출신 상인들이 이 사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인도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더 새카맣고 반질반질하기까지 한데 흑인으로 취급받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도 영국 통치시절의 영향탓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인도 사업가들은 자기들의 용도에 알맞은 전문냉동선들을 주로 일본이나 한국에서 싼 값으로 용선(傭船)하여, 영국의 북쪽 북해에서 잡히는 잡어(雜魚)들, 사료나 비료로 사용될 고기들을 아주 헐값에 사서 아프리카에서 금값으로 팔아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들 생선은 무작위로 종이상자(box)에 넣어 얼린 것이다. 현지에 냉동보관시설이 없기 때문에 선박 자체를 해상창고로 외항에 띄워두고 시중의 어가(魚價)를 조정하며 양륙(揚陸)하곤 했다.
그러다 기간내에 양하를 마치지 못하면 무조건 그 부두에서 외항으로 쫓겨나는 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기관과도 수월찮은 로비가 필요한듯했다. 그들은 한국선원들이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간혹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도 있게 마련이었지만….
통상 세계 어느 항(港)이나 입항한 선박이 청수(淸水)를 청구하면 물 만큼은 원하는 대로 공급해 주는 것이 정상이다. 양상(洋上)에서 식수는 절대적인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는 부두에 수도관이 설치되어 있어 관계자가 호수만 가지고 나와 선박과 연결하고는 관(管)을 열어줌으로 공급하고 계량기를 본선 담장자와 확인하고 사인(sign)을 받아간다.
그렇지 못한 지역은 대부분 급수선(給水船)이 따로 있어서 물을 싣고 와 원하는 양만큼 공급하고 확인 사인을 받아간다.
그런데 이곳 라고스항은 어쩐 셈인지 정식으로 청수(淸水)를 청구해도 시설이나 식수선 등의 부족이란 조건을 빌미로 어느 선박이나 한 번에 50톤 이상의 식수는 공급하지 않았다.
급수선(給水船) 책임자를 살짝 선장실로 불렀다.
“고기 몇 상자 줄테니 물 좀 많이 줄 수 없냐?”
“모두 150톤으로 3척에 나누어 주기로 되어 있는데 고기 준다면 70톤 주마”한다.
다른 선박은 어쩌고 하고 물으니,
“당신 한테 20톤 더 주면 다른 두 척에는 40톤씩 주면 된다.” 그렇군.
“그러면 며칠 있다가 한 번 더 오너라.” 오케이란다. 비공식적으로 하는 수가 있었다.
“대리점(Agent)에선 내일 온다던데 어찌 알고 오늘 왔냐?” Order에 나와 있는 것은 그렇고 갖다 주는 것은 자기가 할 일이란다.
“고기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너라”.
우리 문자로 ‘현금 박치기’로 하면 150톤 몽땅 받을 수도 있을 듯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박들은 이웃 토고(Togo)의 로메(Lome)항에서 청수(淸水)를 보급받고 떠났다. 목욕탕에 가득 받아둔 청수를 보기만 해도 시원스럽다. 지금이야 바닷물을 증류하여 식수로 만드는 시설이 있다.(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