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내부 기둥에 새긴 사모 데레사의
조각상
로마 산타마조레성당 축복해주시는 성모자상
바티칸광장 앞 성천사의 성
2024. 4.11
1사무엘기 26장~31장
(1사무 29,5)
그가 바로 사람들이 춤을 추며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하고 노래하던 그 다윗이 아니오?”
묵상ㅡ
오늘 통독한 장면들 역시
주님의 오묘하신 뜻을
묵상할수 있는 꺼리가 많았다.
사울이 죽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다윗한테 벌써 죽었어야
했을 몸, 뭐가 그리 꽂혀서
착하디착한 다윗을
못죽여 안달이 났노.
바로 이거다.
사울의 아킬레스건,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솟고 열불이 나서
팔딱팔딱, 뒹굴게 하는,
시기질투심.
오죽하면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을까.
사울은 하느님의 힘도
아니고 사무엘의 힘도,
다윗의 힘도 아닌 오직
자기의 힘, 즉 다윗을
겨냥한 화살끝만 보고
한생을 불태운 사람,
미련하고 어리석기가
고층빌딩만큼 치솟아
그 누구의 말인들
들어먹겠는가 말이다.
대체 뮛이 중헌디.
나는 사울의 끈질기고
집착적인 추격전을
보면서,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토록
질기고 무섭다는 게
느껴져서 혀를 내둘렀다.
시기질투심은 뼈를
녹인다는 시편 말씀이
사울의 끝을 보니,
더 이해가 되었다.
다윗이 수만을 친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수천을 친게
더 화가 났을 거다.
비교가 되는 순간,
자신이 갖지 못한
능력과 대외적인
권력과 명예에 대한
열등감이 촉발된것이다.
사울에게 한마디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예수님이 죽은자의
장례를 지내고 오겠다는
베드로에게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라고 하신 말씀을 좀
알았더라면, 다윗이 수만을
친게 자기랑 무슨 상관인지
성찰을 했더라면...
구약의 사울은 드럽게 말을
안들었지만 신약의 베드로는
말을 안들을것처럼
생겼는데도 결국엔
잘 들어서 교회의
반석이 되었거늘!
사울의 끝이 비참할수록
더 빛나고 감탄스러운건
다윗의 충실한 덕행일터.
눈앞에서 죽일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또
주님께서도 사울을
너에게 넘겨줬으니
너 하고싶은 대로
처신하라고 했지만,
어찌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주님의 임금을
해칠수 있나며, 진짜
바보같은 면모를 보이곤 했다.
만일 드라마나 영화의
한장면이었다면 보는
사람들이, 아구 등신,
그렇게 사니까 맨날
당하고 가족도 뺏기고
도망다니고 그러잖아.
아구 내가 열받네.
시청자 댓글에 사울
욕 한바가지에 다윗에
대한 동정론과 응원,
아니면 이런 드라마
신경질나서 안본다고
협박하는 글들이 막
올라왔을 거다.
그럼에도 나는 다윗의
진국같은 성품과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망애 덕과 장수들을
대하는 고품격 배려심,
끝내 자기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주님 뜻이
근사하게 실현되도록
뒤로 후진할줄 아는
처신력에 감동받았다.
'그래, 주님께 사랑받는
자의 끝이 이러해야지.
다윗의 심지 깊은 그런맘,
나도 좀 배우고 싶으네.
이 어지러운 때에
다윗같은 사람, 어디
없을까. 기도해야겠어.
그런 주님의 낙출없는
사람을 보내주시라고.'
그 다음 내가 다윗에게
감동한 장면은,
필리스티아 임금이
백성들이 다윗을
믿지 못해서 싸움판에서
아웃시킨 대목이다.
한번 붙어보겠다던
전의를 상실하고,
자신의 존재가
거절당한것 같은
수치감을 느꼈을텐데,
쌈박하게 돌아서서
치클락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웬일!!!!
세상에나 치클락이
적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된데다,
백성은 물론 다윗의
두아내와 가족들마저
빼앗기고 만다.
주님께서 그러셨던듯,
'너 지금 남의 나라에서
싸울때가 아냐. 지금
치클락이 난리났다.
내 아내와 새끼들이
다 죽게 생겼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너 그거 모르남.'
이런 대목읽을 때면
캬..주님의 거시적인
계획에 기함해서
뒤로 넘어갈 지경이다.
그니까 인생은 모르는 거야.
다윗이 싸움에 나가
보기좋게 복수할랑가
싶었는데 어머, 창피하게
거절당했네. 상처입고
터벅터벅 돌아오니
옴마야, 내 집이 난리가
났네. 거절당하는 거
우리도 넘 좌절할거
없다니까. 한번 뒤돌아보자고.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상처받고, 내 선의가
외면당하고 거절의
쓴잔을 마셨던 그때,
그거 없었으면 지금
내가 없을거잖아.
나를 거절해주고
소외시켜준 게, 얼마나
로또같은 복이었냐고.
누군가에게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안달하지
말기를..왜냐 !!!
다윗도 그랬잖아.
치클락이 무너지고
두아내와 새끼들이
잡혀갔을때에도
다윗은, 목놓아 울면서
하느님께만 의지했거든
(1사무 30,6)
그러나 다윗은 주
자기의 하느님 덕분에
힘을 얻었다.
얼마나 기특하고 신심깊은
사람이냐고! 사람 믿어서
남는장사 한 적 있을까.
그 전쟁통에 누굴
믿을수 있었겠냐만!!!
오직, 주님께만 의탁하니
그 주님 덕분에 힘을
얻고 하던일을 할수
있었던 거다.
나 역시 어릴때부터
거절당하거나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릴까봐
잘하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한
방어기제이며, 보호수단
이었던 거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에게
소외되거나 배신당하거나
버려진것 같은 상황이
되면 죽을만큼 아파했었다.
그런데 다윗의 경우처럼
나를 거절하고 제외시킨
사건들이 결국엔 나를
이집트종살이에서
빼내시어, 진정 내가
있어야할 자리, 내가
맘껏 꽃을 피울수 있는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
해서 나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이 말씀이,
참 좋고 귀해서 계속
훈련하고 있다.
'잊혀지는것,
아무 쓸모없는것으로
여겨지는것, 그리고
예수님만이 보시기를
원합니다.'(아기예수 9일기도 중)
이렇게 하느님만 봐
주시기를 원하며,
하느님께만 의탁하면서
다윗은 모든것을 회복한다.
(1사무 30,19)
그리고 그들에게
빼앗겼던 모든 물건들
가운데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도로 찾아왔다.
다윗이라는 나무에는
커다란 기둥이 있었던
거다. 인간적인 나약함에
시편을 그리도 많이
써서 남긴것만 봐도
우리네와 같은 인간이고
사람이었던 거다.
하지만 커다란 기둥,
마음의 힘있는 중심판,
바로 그를 기가 막히게
구원하시며 이끄신
하느님의 존재,
그것만 있으면, 자신이
사울에게 미움받고
시기질투로 죽임을
당할수도 있었는데
아무리 쓸모없고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해도 나는
괜찮다. 모든것은 하느님
손에 달렸으니 오직
그분께서만 나를 봐주시고
내심정을 알아주시면
된다고 말이다.
주님이 심어주신
내안의 나무를
떠올려 본다.
나무기둥은 얼마만한
굵기가 되었을까.
주님,
제 구원의 나무는,
어찌 되었는지요.
첫댓글 묵상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