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62)
2부(12)
한양 광교 다리 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잠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어느덧 거리는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어디선가 종(鐘)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저마다 도망(逃亡)이라도
치듯이 황급(遑急)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야단스럽던 한양(漢陽)의 거리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김삿갓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조금 전(前)들렸던 종소리는 통행 금지(通行 禁止)를 알리는 인정(人定) 소리였다.
人定(인정) : [歷史(역사)] 성안에서 밤에 다니는것 을 금지(禁止)하기 위하여 밤마다 이경(二更)에 쇠 북을 28번씩 치던 일.
이경(二更) :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눈 둘째 부분. 대개 밤 9시부터 11시 사이.
그러나 한양(漢陽) 도성(都城)에 통행(通行) 금지(禁止)가 있다는 것을
알 턱 없는 김삿갓은,(그 많던 사람들이 별안간 어디로 가버렸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어둠이 깔린
거리를 혼자서 유유(悠悠)히 걷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서 순라군
(巡羅軍)인 듯한 사람 네 댓이 김삿갓 쪽으로 비호(飛虎)같이 달려와 둘러싸며
"이 도둑놈아! 통행(通行) 금지시간
(禁止時間)에 네 놈은 어디로 무엇을 훔치러 가는 길이냐!"
하고 벼락같이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도둑이 아니오.“
"이놈아! 네가 도둑이 아니라면 어째서
통행 금지시간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냐?"
"통행 금지(通行 禁止)라뇨?
한양에 통행을 금하는 시간이 있단 말이오?“
"허 허! 이런 촌놈을 보았나! 너는 도대체
어디서 굴러왔기에 통행 금지도 모른단 말이냐?"
"나는 시골서 조금 전에 한양에 올라온 사람이오. 한양 땅에 통행 금지
(通行 禁止)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
(今時初聞)이오."
그러자 순라군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했다. "통행 금지도 모르는 이런 시골뜨기를 잡아다 가둘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 좋지?"
그러자 두목일 듯싶은 순라군이 말하는데,
"아무 생길 것도 없는 놈을 잡아다
가두면 뭘 해! 숫제 광교 다리 밑에
움막 아이들한테 갖다 맡기지."
그러면서 김삿갓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이놈아! 한양에는 통행 금지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녀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본시, 하늘과
땅이란 남녀노소(男女老少), 귀천(貴賤)을 불문(不問)하고 만인(萬人)이 공유(共有)하는 소유물일진데,
누구나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땅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렇듯 황당(荒唐)한 경우(境遇)를 당하고 보니 땅을 마음대로 밟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러나 잠자리를 구하고 있던 차에
순라군(巡邏軍) 이야기로 짐작하기에,
잠자리를 구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참 다행이다.)
김삿갓은 광교 다리 밑 움막이라는 곳이 궁금해 "지금 나를 데려가는 곳이 어떤 곳이지요?“하고 광교(廣橋) 다리 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 순라군(巡邏軍)에게 물어보았다.
"이놈아! 통행 금지도 모르는 놈이 그런 건
알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감옥(監獄) 속에서 자는 것 보다. 백번 낳을 것이니 잠자코 따라오너라. 그리고 오늘 밤은 움막에서 자고 내일 아침 파루(罷漏)가 울리거든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란 말이다.“
罷漏(파루) : [歷史(역사)] 조선 때, 큰 도시에서 통행 금지를 풀던 시간인 오경
삼 점에 쇠 북을 서른세 번씩 치던 일.
김삿갓이 광교 다리까지 끌려와 보니,
다리 아래 개천가에는 제법 큰 움막이 쳐있고 그 움막 속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巡邏軍(순라군)은 김삿갓을 다리 위에
세워 놓고 움막에 대고 소리를 크게 질러댔다.
"애들아! 통행 금지(通行 禁止)도 모르는 촌사람 하나 데려왔다. 오늘 밤 너희 틈에 재우고 내일 아침에 보내 주도록 하려무나."
그러자 움막 속에서 네댓 아이들이 날치기처럼 잽싸게 달려 나오더니
김삿갓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순라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오늘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비단구렁이 한 놈을 잡아 왔어요. 그놈을 고아 먹으면 아저씨 가운데 다리가 "뻘떡뻘떡" 일어설테니, 한번 써 보세요. 아저씨한테는 특별히 싸게 드릴게요."
구렁이를 팔아먹으려고 덤비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瞬間)
(아하, 이놈들이 광교 다리 밑에 사는
땅꾼 놈 들이로구나!) 하고 아이놈들의
정체를 대뜸 알아낼 수 있었다.
순라군(巡邏軍)이 웃으며 대답(對答)했다.
"예끼, 이놈들아! 나는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밤마다 육봉(肉棒)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못 견딜 지경(地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내고
그런 것을 사서 먹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라!"
"아저씨가 안 쓰시려거든 돈 많은 부자(富者)양반(兩班)들한테 좀 팔아 주세요. 삼백 냥만 받아 주시면 이번에는 섭섭하지 않게 구문(口文)으로 일백 냥 드릴게요.“
口文(구문) : 팔고 사는 두 편의 사이에 들어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알았다, 알았어. 장사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
"네, 손님은 받을 테니까.
이번 구렁이는 아저씨가 꼭 좀 팔아 주세요.
우리는 이번에도 아저씨만 믿어요."
순라군과는 예전부터 어떤 거래(去來)가 있었든지 땅꾼 아이들은 그렇게 당부(當付)를 하고 김삿갓을 움막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끌려 오셨소?
한양 도성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셨던가요?"
"나는 한양이 초행이라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인데,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김삿갓은 무심결에 통행 금지에 대한 비난(非難)을 한마디 지껄였다.
그러자 땅꾼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그것참 옳은 말씀입니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인데,
대감이니 영감이니 하는 날도둑들을 보호하려고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웃기는 얘기지요."
광교 다리 밑에 있는 땅꾼들의 움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김삿갓이 이곳에 와서 움막 안을 두루 살펴보니 아이들의 살림살이가 놀랄 만큼 풍성(豊盛)하였다.
"오늘 밤은 아저씨도 우리와 한 식구요.
밥은 넉넉하니까 많이 잡수세요." 하며
늦은 저녁을 차려 내는데 개다리소반에 얹힌 저녁 반찬만 하여도 호박볶음에
낙지 젓갈이 차려져 있고 돼지고기
구운 것과 훈제(燻製) 오리고기며,
부추 무침에 각종 쌈 채소조차 있는
것이, 정승댁 잔칫상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김삿갓은 땅꾼 아이들이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조차 스스럼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을 보니, 그들의 인간성(人間性)은 대문(大門)을 겹겹이 걸어 잠그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한양(漢陽) 양반님네와는 비교(比較)가 안 될 만큼 다정다감
(多情多感)하였다.
"그럼 나도 자네들과 같이 먹기로 하겠네!"
김삿갓은 몹시 허기지던 판인지라 염치불구
(廉恥不拘)하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슬며시 말을 걸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니
장사가 잘되는 모양(模樣)일세.“
하며 그들의 생활상(生活相)을 떠보았다.
그러자 우두머리인 듯싶은 땅꾼 아이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우리들의 장사는 언제나 잘됩니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장담(壯談)할 수 있지요."
"이 사람아! 장사란 경기(景氣)를 타는 법인데 자네는 어디에 근거(根據)를 두고 그런 장담 (壯談)을 하는가?"
"물론 다른 장사라면 시세(時勢=時價)와
물량(物量)에 따라 굴곡(屈曲)이 있겠지요.
그러나 뱀 장사만은 땅 짚고 헤엄치기인걸요."
"어째서 땅 짚고 헤엄치기란 말인가?
얼핏 들어서는 알 수 없네."
"생각해 보세요. 사내들치고 계집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아하는 계집을 만날 기회(機會)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 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하초가 영 신통(神通)치 못한 법이지요.
젊고 아름다운 소실(小室)이 있어도 배꼽 아래 물건(物件)이 영 신통(神通)치 못하니까 값은 고하간에 뱀을 사 먹지 않을 수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네 장사는 경기(景氣)도 안타고
땅 짚고 헤엄치기이지요."
김삿갓이 듣고 보니 과연 그럴듯한 소리였다.
"아까 잠깐 듣자 하니 구렁이 한 마리에
삼백 냥이라 하던데 뱀의 값이 그렇게나
비싼 것인가?"
"아저씨도 참! 뱀의 값이 너무 싸 버리면 뱀을 사려는 사람이 효과(效果)를 의심(疑心)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처음부터 높은 가격(價格)을
불러 놓고, 흥정할 때 못 이기는 척하고 조금 깎아주면 인심(人心)도 얻고 뱀도
팔 수 있고,서로 좋은 일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뱀 한 마리가 삼 백 냥이면
너무 비싸군. 이건 일종(一種)의 사기(詐欺)로구먼, 안 그래?"
김삿갓이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하자,
땅꾼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저씨는 잘 모르시는가 본데 한양(漢陽)
장안(長安)에 부자(富者) 양반(兩班)들은
모두가 백성(百姓)의 등을 쳐서 부자(富者)가 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 돈을 좀 나눠 먹기로 무슨
죄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하! 하! 하!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그려. 그러고 보면 세상만사
(世上萬事)가 돌고 돌아가며 절로 균형(均衡)을 이루게 되는 모양(模樣)일세!"
"우리는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몰라요. 아무튼 뱀이라는 것은 값을 비싸게 부를수록 잘 팔리는 법이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돈이 썩어나는
양반(兩班)들에게는 돈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정력(精力)을 왕성(旺盛)하게 하는 것 만이 대단히 중요(重要)하거든요."
"음! 그렇기도 하겠네."
다음 날 아침, 땅꾼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무섭게 제각기 꼬챙이와 자루를 하나씩 들고 움막을 나서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산으로 뱀을 잡으러 갈 거예요. 아저씨는 서울 구경을 다니다가 잠자리가 없거든 우리한테 또 오세요."
밤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고맙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 덕분에 신세를 많이 지고 가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이니, 섭섭하지만 이만 작별
(作別)하세. 그리고 앞으로 건강(健康)
하고 일 열심히 하면서 돈도 많이 벌게
되기를 빌어줌세!"
"그래요? 이거, 섭섭해서 어떡하죠?"
그러면서 땅꾼 아이들은 저희끼리 눈짓을 하더니,한 아이가 엽전 열 냥을 불쑥 내밀면서, "이거 몇 푼 아니 되지만, 가시다가 술이라도 한잔 사드세요."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밤새 신세를 진 것도 고마운 일인데
돈까지 내밀다니. 너무도 고마운 인정(人情)을 만났기에
김삿갓은 눈시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본시 돈이 필요치 않은 사람인데, 자네들이 정으로 주는 돈이니 이 돈을 고맙게 받겠네."
김삿갓은 엽전(葉錢)을 주머니 깊이 간직하고 다시 서울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오늘은 풍수지리(風水地理)상 백호(白虎)의 기(氣)를 담고 있는 인왕산(仁王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왕산(仁王山)에서 굽어보는 장안(長安)의 풍경(風景)은 글자
그대로 장관(壯觀)이었다.
만호 장안(萬戶 長安)을 굽어보던 김삿갓은 어제 겪은 일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양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쓰고 살면서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 그릇 먹이려 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런 일에 비한다면 양반님네들이 멸시(蔑視)하고 더럽다 여기는 땅꾼 아이들의 고마움은 상대적(相對的)으로 크게 비교(比較)가 되는 것이었다.
(한양(漢陽)이란 매우 극(極)과 극(極)의 삶이 서로 섞여 돌아가는 곳이군.)
이런 생각으로 장안(長安)을 내려다보던 김삿갓 갑자기 뒤가 마려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바위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장안(長安)을 내려다보며 뒤를 보려는데 별안간(瞥眼間) 방귀 한 방이 요란(搖亂)스레 소리를 내며 나왔다.
어젯밤 땅꾼 움막에서 과식(過食) 한 탓인지, 방귀 냄새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요란(搖亂)스레 방귀 한 방을 뀌고 나니, 속이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뒤를 보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卽興詩) 한 수를 읊어댔다.
방분인왕 제일성 (放糞仁旺 第一聲) 원문(原文)
방분인왕 제일성 (放糞仁王 第一聲) 수정(修訂)
인왕산에서 똥을 누려니
방귀가 먼저 터져 나와,
향진장안 억만가 (香震長安 億萬家)
향기로운 냄새로
온 장안이 진동했다.
이 시는 김삿갓이 인심(人心) 사나운 한양(漢陽)도성(都城)을 떠나는
"이별의 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