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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강 사단칠정이란 무엇인가?
1. 七情
四端이라는 말은 孟子라는 책에서 온 것이다.
七情이라는 말은 中庸에서 온 것이다. 정확하게는 禮記에서 온 것이다. 七이라는 숫자는 사실 의미가 없다. 인간의 감정을 7개로 나누든, 10개로 나누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칠정이라는 표현이 처음 나타나는 곳은 《예기》, <예운>편으로 인간의 여러 감정들을 기쁨(희,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두려움(구,懼), 사랑(애,愛), 싫어함(오,惡), 바람(욕, 欲)의 일곱으로 묶어 나타내었다. 후대에서는 대개《중용》에서 말하는 기쁨(희,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즐거움(락,樂)을 가리켜 칠정이라 하였다.
七情이 中庸에서는 四情이 된다. 喜怒哀樂이 그것이다.
여기서 哀怒는 인간의 감정 가운데, 비극적 감정이고, 喜樂는 희극적 감정이다.
哀怒 : pessimistic sentiments(비극적 감정)
喜樂 : optimistic sentiments(희극적 감정)
동양 사람한테는 뇌라는 개념이 없다. 감정은 배(腹)에서 생긴다고 여겼다. 생명의 중추가 모두 복부에 있다고 여겼다. 臟器라는 말의 臟은 氣를 저장하는 곳이다. 臟에 藏하는 것이 바로 喜怒哀樂이라고 여겼다.
藏 : 감출 장, 간직한다는 뜻
臟 : organ(신체의 장기)
장기는 희노애락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뇌(Brain)의 명령체계만은 아니다.
몸을 중간으로 나누어, 위를 上焦라 하고, 아래를 下焦라 한다.
상초는 肺脾이고, 肝腎은 하초에 들어간다.(이제마)
腎을 피를 거르고, 오줌을 생산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데, 동양에서 말하는 腎은 인간의 성적 기능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腎(신)은 현대말의 신장(Kidney)가 아니라, 인간의 생식기능(Reproductive Function)과 하초의 기운 전체를 포괄하는 특수 개념이다.
한의사가 신장이 나쁘다는 말은 Kidney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서양의학과 개념이 다르다. 서양 사람한테 간은 피가 들어가서, 효소를 만들고, 영양소를 저장하고, 독소를 없애는 곳으로 여기며, 피를 우리 몸에 맞게 재조합하는 장소로 본다. 하지만 동양인의 간은 그런 것과 다르다. 간과 Liver는 다른 것이다. 현대에 와서 같이 쓰고 있는 것이다.
肝은 간(liver)이 아니다.
肝은 木氣의 저장소일 뿐이다.
肺도 마찬가지다. 폐는 호흡을 통해, CO2와 O2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는데, 동양인의 폐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개념이 전혀 다른 것이다
肺는 폐(Lung)가 아니다. 그것은 상초의 기운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金氣를 저장한다.
腎은 水氣을 저장한다. 脾는 土氣를 저장한다.
이런 臟器에 감정이 저장된다. 肺가 哀, 脾가 怒, 肝은 喜, 腎이 樂을 저장하고 있다.
上焦 : 肺 - 哀(事務)
脾 - 怒(交遇)
下焦 : 肝 - 喜(黨與)
腎 - 樂(居處)
李濟馬(1837-1900)
喜樂, 기쁘다와 즐겁다는 어떻게 다른가? 위의 구분에서 보듯이, 樂은 섹슈얼하게 즐거운 것이다. 喜는 黨與, 즉 사람을 사귀면서 즐거운 것이다. 간이 큰 사람이 사교성이 좋다.
밑에서부터 보면, 공간적으로 위로 갈수록 넓어진다.
신이 발달한 사람은 세계가 좁다. 폐가 발달한 사람이 세계가 넓다. 이상주의자들이다. 신이 발달하면, 色을 밝힌다. 자기 세계가 좁다. 간이 발달한 사람을 잘 먹는다. 상초가 발달한 사람들은 어깨가 떡 벌어져 있고, 이상주의자가 많고, 괴벽한 사람들이 많다. 매사에 슬퍼하길 잘 한다. 哀情이 발달한다. 비위가 좋은 사람들이 화를 잘 낸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근거도 있다. 이것도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런 것은 이제마 선생의 인간을 바라보는 위대한 방식이다.
七情은 감성의 세계이다.
2. 四端
四端은 仁義禮智를 말한다.
주리론자들은 인간을 사단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주기론자는 인간을 칠정 중심으로 본다.
主理論者 : 인간은 四端 중심으로 본다.
主氣論者 : 인간은 七情 중심으로 본다.
四端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맹자에서 말하길, 惻隱之心은 仁之端也이라고 했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측은지심 인지단야)
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
辭讓之心 禮之端也 (사양지심 예지단야)
是非之心 智之端也 (시비지심 지지단야)
-맹자-
뒤쪽의 端이 4개라서 四端이라고 한다.
3. 心性
동양 사상을 논할 때, 心性이라는 말을 알아야 하는데, 心은 발현된 상태이다. 心은 이미 情의 세계이다. 性이 본체적인 세계이다.
心 : 발현된 현상적 측면
性 : 발현되기 전의 본체적 측면
性은 本性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本心은 내 감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心과 性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心은 氣의 차원이고, 性은 理의 차원이다.
4. 四七論爭의 단서
문제가 된 것은 사단과 칠정이 완전히 레벨이 달랐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惻隱之心은 仁之端也이라고 했다. 즉 心이 端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仁은 端이 아니라는 것이다. 仁이 발현된 단초로서의 마음(心)이 된다.
四端의 端은 이미 性이 아닌, 心의 차원이다.
그것은 이미 발현된 마음이요, 감정일 뿐이다.
맹자의 논리적 구조로 보면, 四端도 이렇게 七情이 된다. 心이 된다. 情感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갈 때, 발현되는 마음이 측은지심이다. 그것은 이미 감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仁이 발현된 단초이다.
예를 들어, 큰 빙산이 있다면, 물 밖으로 조금 나와 있는 것이 바로 端이다.
端 = Tip(끝, 단초)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측은지심이고, 물 속에 있는 큰 덩어리가 바로 仁이다.
즉 측은지심은 仁의 端이다.
사단과 칠정이 나누어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맹자 원문에 따르면, 四端이 모두 七情 속에 들어가 버린다. 측은지심은 인이 발현된 단초로서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은 性이 아닌 것이다. 측은지심은 理의 레벨이 아니고, 氣의 레벨이 되는 것이다.
기고봉이 편지를 써서, 이퇴계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퇴계는 ‘四端은 理之發이고, 七情은 氣之發’이라고 했지만, 기고봉은 그렇게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사단도 칠정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좋은 감정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다.
사단도 칠정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 기고봉-
기고봉은 사단을 칠정에서 분리할 길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확한 이야기였다. 사단칠정논쟁은 논리적으로 주기론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四七論爭은 主氣論者가 논리적으로 우세한 틀 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만일, 맹자의 문장 자체가 惻隱之德은 仁也라고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惻隱之心이라고 했으며, 성리학적 논쟁에서 心(마음)은 性에 비해 한 단계 아래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기고봉은 첫 편지에서, 未發 상태가 四端이고 理이며, 발현되면 그것이 七情이고 氣라고 말하고 있다.
人心未發則謂之性
己發則謂之情
- 기고봉
사단과 칠정은 논리적으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5. 퇴계의 생각
우리말에 꼴린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欲이라는 것이다. 꼴린다는 말에는 지향성이 있다. 움직이는 것이다. 명예, 돈, 色에도 꼴린다. 주기론자의 명제는 ‘꼴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꼴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주기론자의 제1명제-
주리론자는 주체 없이 아무것에나 다 꼴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꼴리는 것을 주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주기론자는 중용에서 말하듯이, 상황에 맞게 제대로 꼴리면, 그것이 바로 도덕이라고 보는 것이다.
퇴계는 상황에 맞게 꼴릴 때, 제대로 꼴렸다고 해도, 그렇게 상황에 따라 변조되는 도덕은 불안하다고 보았다. 마음대로 해석이 되는 도덕이므로, 그런 말초적인 도덕을 理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논쟁거리가 된다. 아주 치밀한 논쟁이 일어난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몇 백년간 이런 논쟁을 했을까?
요즘의 심리학, 철학의 모든 문제는 우리 조상들이 논쟁한 학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의 과거 문화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그들은 이미 20세기, 21세기 학문을 모든 섭렵했다. 이 모두가 조선조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이다.
사단과 칠정 모두 꼴리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이미 심(마음)이기 때문에 꼴린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꼴린 것이다. 색에 꼴리면 인간 악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은 전부 꼴리는 것이다. 돈, 여자 등에 꼴리는 것이다.
정치가가 잘못 꼴려서 우리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칠정논쟁과 현재의 사회 논쟁은 똑같은 것이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꼴리는 건데, 사단이 도덕적 꼴림이고, 칠정이 감정적인 꼴림이라면, 그렇게 꼴리게 하는 근원인 어떠한 마음의 원천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을 所從來라고 하였다.
四端 ----->本然之性(理)
(所從來)
七情 ----->氣質之性(氣)
사단은 純善으로 순수하게 선한 것이고, 칠정은 雜스러워서 때론 도덕적으로 꼴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雜하기 때문에 잘못 꼴릴 위험성이 많다는 것이다.
四端 : 純(순수하다)
七情 : 雜(잡스럽다)
인간에서 칠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사단의 순수한 뿌리가 있어야, 비로소 인간은 도덕적인 주체가 된다고 보았다.
6. 의미와 과제
조선초기부터 사대부 질서가 형성되었다. 하루아침에 과거를 통해 벼슬을 얻게 되는데, 조선조에서 볼만한 관직은 약 200개정도였다. 과거에 급제를 해도, 제대로 된 포스트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리를 놓고 서로 싸웠다.
사대부 양반 관료 체제를 성립함에 있어서, 문제가 된 것은 이 사람들의 도덕적인 질서와 기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관료의 도덕적인 질서와 기강을 어떤 식을 잡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四七논쟁은 기본적으로 조선조 士大夫들의 도덕적 기강에 관한 것이다.
전라도 광주는 奇高鄭朴氏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퇴계는 영남 사람이었다. 이 사단칠정론은 묘하게도 우리나라의 영호남의 대립과 연결된다. 신라, 백제부터 이어온 다툼이 조선조까지 연결된다.
경상도 쪽의 안동권, 안동김씨 등 도학자들을 보면, 철저하게 아직도 종법 사상에 빠져있다. 전라도 쪽은 그래도 융통성이 있다. 전라도는 예술적이다. 판소리꾼도 경상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경상도 시집살이가 더 힘들다.
전라도 사람들은 주기론적 성향이 강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주리론적 성향이 강하다.
주리론자들은 본래 이념적인 인간에게는 순수한, 꼴림에 좌우되지 않는, 본연적인 도덕질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이 맹자가 말한 성선의 본이며, 그것이 없으면 금수라고 여겼다.
주기론자들은 감정이 제대로만 돌아가면, 만사가 다 잘 된다고 보았다.
이 둘은 살아가는 인생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퇴계는 四端의 所從來로서의 理를 독자적으로 확보함으로써 孟子의 性善의 의미를 완성했다고 믿었다.
내용적으로 보면, 나이 많은 퇴계는 여당이고, 젊은 기고봉은 야당 성향이 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도덕적인 질서로 억누르려고 하는 것에 대응한 싸움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퇴계는 현실 관료 정치에서 물러나 있는 사람이었으며, 기고봉은 서울에서 관직에 몸 담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보면, 기고봉이 여당일 수 있다. 현직 관료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자고 하는 말일 수 있다. 퇴계는 야당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선비로서의 도덕적인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상황적인 윤리로 처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퇴계가 무서운 야당일 수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主理 : 여(?) 야(?)
主氣 : 야(?) 여(?)
이 사람들의 계급 배경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당시 조선조는 사족 간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이런 분파가 나중에 당쟁이 된다. 이 사람들이 어떤 입장이고, 무엇을 대변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바로 조선사를 규명하는 열쇠이다.
이것은 나중에 젊은 사람들이 진실하게 따져 봐야할 문제이다.
퇴계의 입장과 기고봉의 입장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주기론과 주리론은 사회체제론까지 연결된다.
7. 퇴계의 理氣互發設(이기호발설)
우리는 주리론자인 이퇴계를 정통 주자학자로 생각하기 쉽다. 주기론자인 기고봉은 그 정통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깊게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이퇴계를 朱子學의 적통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주자학의 이단이다.
주자는 太極動而生陽이라고 했다. 태극에는 動하게 하는 理만 있고, 태극 자체는 작위가 없고, 철저하게 무위라고 했다. 작위가 있으면 그 자체가 꼴리는 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氣에 종속이 된다. 純하지 않고, 雜하게 된다.
太極動而生陽 - 주렴계 -
태극에 動性을 부여할 수 없다.
태극은 수구한 理며, 作爲가 없으며, 無爲다.
- 주자 -
作爲 : 꼴림
주자의 입장은 태극에 動性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퇴계가 말하길, 四端은 理之發이라고 했다. 즉 리가 꼴린다는 말이다.
주자 : 理는 꼴리지 않는다 : 정통
퇴계 : 理는 꼴린다 : 이단
퇴계의 理之發은 기고봉에게 지독한 비판을 받는다. 기고봉이 논리적으로 절대로 꿇리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보면, 기고봉이 맞다. 그런데 퇴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억지를 쓰고 있다. 칠정으로 사단이 결코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뭔가 사단의 뿌리는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퇴계는 기고봉의 비판에 따라 나중에 주장을 바꾼다. ‘四端은 理가 발현되고, 氣가 거기에 따라가고, 七情은 氣가 발현되고, 理가 그것을 탄다는’ 이야기를 한다.
‘탄다’은 말을 타는 것과 같다. 말은 꼴리는 놈이고, 말을 탄 사람은 말을 조정한다. 그 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성이다. 말 자체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꼴리는 것이다.
四端 : 理發而氣隨之
七情 : 氣發而理乘之
이것을 퇴계의 理氣互發設(이기호발설)이라 한다.
퇴계는 이기호발설로 기고봉의 주장에 대답을 한다. 그 후에도 기고봉이 집요하게 논쟁을 이끌자,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무리하게 말하는 게 아니고, 다 받아주고, 최종적으로 여기는 내가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8. 사칠논쟁의 영향
퇴계는 理를 움직이는 주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주자학에 대한 최대의 이단이다. 주자에 따르면, 理는 작위가 없고, 무위이므로 발하면 안 된다. 그런데 퇴계는 기고봉과의 싸움에서, 理는 소극적인 도덕성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적극적인 도덕의 주체이며, 그것이 발현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理가 발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이퇴계를 이율곡이 부정한다.
@ 이율곡(李栗谷, 1536~1584)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장,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부정했다.
그 이율곡을 이어가는 것이 노론파인 우암 송시열이다.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이율곡의 학동을 잇고, 이퇴계를 이단으로 배격했다. 老論의 거장
이런 논쟁은 복잡하게 이어지며, 당쟁과 연결이 된다.
나중에 효종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복상문제를 가지고 싸우는데, 이것 역시 이 논쟁과 연결이 된다.
기해예송(己亥禮訟)때 朞年服(1년만에 복상)을 주장하여 南人들을 거세하였다.
조선의 법제 문제까지 모두 이 논쟁과 관련이 있다. 사칠논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理의 작위를 인정하지 않고, 순수한 원리로 인정을 하고, 氣發만 인정하게 되면, 왕권을 억제하기가 더 쉽다. 체제론으로 가서, 왕은 추상적인 원리로 남겨두고, 왕은 움직이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왕은 꼴리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꼴리는 건 밑에 있는 관료라고 말한다. 즉 관료가 백성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면 귀족정치가 되는 것이다.
suggestion : 암시
이건 하나의 암시일 뿐이다. 실제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사실 우암 송시열의 노론파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노론은 리발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퇴계를 비판한다.
이퇴계라고 하면 조선 왕조에서 하나의 주류파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역사의 철저한 야당일 수 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자신들이 살려는 세계를 어떻게 구성해야 되고, 자신의 이론적 입장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리고 우리 후손들을 어떠한 가치관에 의해 길러내야 할지 매일매일 노심초사 고심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예전 유생들은 그냥저냥 책이나 읽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깊이가 있는 훌륭한 선인들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