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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록 제4권 / 1761년(영조37, 신사) / 3일(계유) 맑다
북경에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아침진지를 반 그릇 드셨다. 짧은 편지를 호거인(胡擧人 호소일(胡少逸))에게 보내 먼저 안부를 물은 다음 《광비지(廣轡誌)》를 보기를 요청하였다. 또 어제 화답한 시〔和章〕를 돌려달라고 청하였는데 시에 잘못 중첩된 부분이 있어서였다. 아버지께서 건거(巾車)를 몰고 나가 보마(步馬) 놀이를 구경하려고 하시기에 나는 군복을 입은 채 말을 타고 뒤따라 정양문을 나섰다. 천단과 지단을 지나는데 익숙한 길이었다. 천단 남쪽 담장 밖이 바로 대열교장(大閱敎場)이었다.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건아(健兒) 수십이 명마를 타고 돌진해 왔다. 사람들마다 손에 채찍 하나를 들었는데 채찍 끝에 붉은 코끼리 털이 흐트러진 채 늘어져 있어 좌우로 휘두르니 말이 나는 듯이 빨리 달렸다. 그 뒤에 두 관인이 말을 몰고 왔는데 한 사람은 청보석(靑寶石) 정자(頂子)를 달았고 한 사람은 담백옥(淡白玉) 정자를 달았다. 또 두 늙은 내시〔老璫〕가 뒤따라 왔다. 내가 말을 세우고 물었다.
“보마는 벌써 끝났습니까?”
“끝났습니다.”
“멀리 해외에 사는 사람이 한번 놀이를 구경하려 길을 멀다 않고 왔으니 나를 위해 다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왕의 명이 있어야 하므로 다시 할 수 없습니다. 9일 뒤에 와서 구경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작별인사를 하고 서둘러 갔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몇 마장(馬場)을 들렀으나 오직 말발굽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담장 북쪽은 천단 담장의 남쪽이다. 모래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는데 그 꼭대기에 올라 천단을 굽어보니 송백(松栢)이 뒤섞여 비치고 전각(殿閣)이 은은히 비쳤다. 또 넓은 땅이 많아 사람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하였다.
아버지께서 미타탑의 승경을 듣고 나에게 명하여 길을 앞장서라 하셨다. 법장사에 도착해서 승사에 머물렀다. 역관 박달손(朴達孫)이 뒤쫓아 이르렀다. 화로를 끼고 앉아 차를 끓여 마시고 나자 아버지께서 또 나에게 앞장서라 명하셨다. 미타탑 제1층에 오르니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사방이 탁 트여 더욱 상쾌하였다. 아버지께서 장관(壯觀)이라며 매우 칭찬하셨다.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승사로 돌아왔다. 승려에게 청심환 2개를 주고 장차 나가려 하면서 천녕사(天寧寺)가 있는 곳을 물으니, “서좌문(西左門) 밖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절문으로 나가서 남쪽으로 몇 리쯤 가니 작은 사찰이〔梵宮〕이 있었는데 편액하여 이르기를, ‘칙건오호묘(勅建五虎廟)’라 하였다. 아버지께서 수레를 놓아두고 들어가시기에 나도 따라갔다. 정전에 4좌의 금불을 모셔놓고 불상 앞에 도금해서 용을 새긴 패를 세우고 겉면에 ‘문수보살(文殊菩薩)’, ‘관음보살(觀音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이라고 써 놓았다. 또 앞에 솟은 작은 오산 3좌 윗면에는 구리로 종을 주조하였는데 좌우로 나는 용이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형상이 섞여있었다. 가운데에 불상 하나가 있는데 부처가 작은 사슴을 타고 사슴이 연꽃을 밟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모두 도금하였다. 동서로 또 금신(金身) 13개를 벌여 놓았는데 무슨 신인지 알 수 없었다. 주지승에게 “오호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말하였다.
“20여 년 전 이곳에 오호묘를 세웠습니다. 오호(五虎)는 한나라의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황충(黃忠), 마초(馬超)입니다. 그 후 사당이 훼손되어 지금 그 터에 절을 세우고 편액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우리는 나와서 몇 리를 가 큰길을 지나니 정양문 밖 4거리〔四衢〕였다. 수레와 말이 가득 메웠고 사람과 물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서쪽으로 5, 6리를 가니 남북으로 시장과 시사의 처마가 서로 잇닿아 하나의 틈도 없었다. 길가에는 남녀의 의복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호인 장사치〔商胡〕가 차례로 옷자락을 끌고 서서는 사람을 보면 문득 고함을 치는 것이 우리나라 종로 거리〔鐘街〕 시전 상인의 행동과 같았다.
몇 리쯤 가서 외성(外城)을 나갔는데 성 높이가 우리나라 도성 만하였다. 성 위에 1층 누각이 있었는데 누각 바깥 돌에는 ‘광녕(廣寧)’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금나라 때 창의문(彰義門)으로 명나라 가정 연간에 신성(新城)을 쌓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또 두 개의 겹문을 나갔는데 모두 누각이 없었으니 이것이 옹성이다. 우뚝 솟은 탑을 바라보니 허공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요양(遼陽)의 백탑 같았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1리쯤 가니 주문 3칸이 있고 가운데에 편액을 걸었는데 이르기를, ‘칙건천녕사(勅建天寧寺)’라 하였다. 문 안에 한 쌍의 누각이 동서로 마주하여 서 있었으니 이것이 종고루이다. 내가 붉은 사다리 14계단을 따라 종루에 오르니 종루 위에 큰 종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황명 가정 을유년(1525)에 주조한 것이다. 가운데에 한 전각이 있고 ‘각로자연(覺路慈緣)’이라는 편액이 있는데 건륭이 쓴 것이었다. 전각 안에 1장 남짓 되는 금신 소상이 있는데 금 쟁반을 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옆에는 큰솥 하나를 두었으니 또한 가정 연간에 주조한 것이다.
또 홍살문〔朱箭門〕을 따라 들어가니 방대(方臺)가 있었다. 넓이와 길이가 각각 12척이고 높이가 6척 정도였으며 담으로 주위를 두르고 남북으로 문을 세웠다. 방대 위에 높이가 4척 정도 되는 팔각 단(壇)을 만들고 그 위에 탑을 세웠는데 광녕문(廣寧門)에서 바라다본 것이었다. 탑의 모서리는 단의 수와 같았다. 아래의 6층은 모서리에 귀신을 새기고 겉면에 큰 사자를 그렸다. 위의 3층은 팔각을 빙 둘러 각각 다섯 보살과 사천왕을 세우기도 하고 사방을 에워싸 난간을 만들기도 하였다. 난간 시렁의 철등(鐵燈)은 기름을 부어 불을 밝혔다. 또 8개의 기둥을 세워 용을 휘감아 놓고 천엽연화봉(千葉蓮花峰)을 3겹으로 새기기도 하였는데 불좌(佛座)와 대략 비슷하였지만 매우 공교하고 치밀하였다. 다시 세 층을 올라가서 여덟 창을 내었는데 위에는 늙은 신선이 사자를 타고 구름 위에 올라 있는 형상을 그렸고, 아래에는 흰 연꽃이 향기를 내며 꽃받침을 뒤집은 형상을 새겼다. 좌우로는 창을 든 선비를 사이에 끼워서 세워 놓았는데 질그릇과 벽돌로 만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니 아마도 연산(燕山)에게 옥석(玉石)을 빼앗긴 것인 듯하다. 또 그 위에 연화봉 2겹을 만들고 그 꼭대기에 상륜(相輪) 화주(火珠 유리구슬)를 올려놓았는데 높이가 몇백 척인지 알지 못하겠다. 어떤 이는 20장 5척 5촌이라고 한다. 탑의 주춧돌에서부터 기둥 꼭대기에 이르기까지가 하단부의 한 층인데 그 높이가 대략 탑 전체의 3분의 1이다. 여기서부터 위로 높은 처마〔飛檐〕와 겹겹이 쌓인 받침목〔疊栱〕이 또 열두 층인데 매 층마다 원앙 기와로 덮었고 맨 위층만 청색 기와로 덮었다. 또 팔각이 서로 만나는 곳을 따라 큰 방울 하나를 달았고 또 서까래 끝을 따라 작은 방울을 엮었는데 크고 작은 방울이 통틀어 3천 4백여 개라고 한다. 바람이 불 때 일제히 울리니 편종(編鍾)과 편경(編磬)이 서로 화답하는 듯하였다. 탑 아래 단 위에 쇠솥〔鐵鼎〕 하나를 안치하였는데 높이가 1장 남짓이다. 솥의 배 부분을 살펴보니 8방에 8괘(八卦)를 그려 놓았다. 만력 연간에 주조한 것이다. 옛날에는 8좌가 있고 각각 8면으로 눌렀는데 지금은 오직 하나만 있으니, 혹자는 탑이 수나라 개황 말에 세워졌다고도 말한다. 규모와 제도가 특이하여 가운데는 계단 없이도 오를 수 있으나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곳이지 올라가 구경하는 곳이 아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쳤으며 지금 황제(건륭제)가 또 칙서(勅書)를 내려 이번에 단청〔丹雘〕을 새로 칠하였다고 한다.
북문으로 들어가니 금색 단청을 칠한 높은 누각이 있었다. 벽을 올려다보니 용이 서린 형상을 새겼는데 매우 생기가 있었다. 가운데에 큰 부처 하나가 앉아있고 좌우에 또 두 금신과 일곱 낭랑(娘娘)이 있었다. 우협문(右夾門)으로 들어가니 편액하여 이르기를, ‘종사부(宗師府)’라 하였다. 가운데에 큰 전우가 있는데 매우 널찍하였고, 동서의 익랑 또한 탁 트였다. 동쪽 익랑에서 잠시 쉬는데 수승(守僧)이 와서 알현하였다. 복색이 여러 승려들과 같았으나 오로지 수염을 깎지 않았다. 고양이처럼 작은 점박이 개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발발(勃勃)’이었다. 이 개는 사람의 정강이를 보고는 짖으면서 옷자락을 물어뜯기도 하였는데 쫓아내도 가지 않아 종인이 크게 고생하였다. 잠시 후 상사의 주방에서 율무〔薏苡〕와 말린 전복〔脯鰒〕을 올리고 부사의 주방에서 약밥〔藥飯〕을 올렸다. 아버지께서 지키고 있는 중에게 남은 음식을 주자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고기라서 먹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더니 알아채고는 끝내 맛보지 않았다. 청심환을 얻길 원하기에 3개를 주었다.
잠시 후 정전에 나아갔다. 원앙 기와로 덮었는데 원앙의 등과 머리에 황색과 청색의 벽돌로 만든 작은 단환(團丸)을 끼워 넣었으니 다른 절에는 없는 것이었다. 문미에 편액하기를, ‘청련유법(靑蓮諭法)’이라 하였다. 정전 안에 큰 부처 3좌를 모시고 부처 앞에 백동향로(白銅香爐) 4좌 벌여 놓았으며 또 그 앞에 백동방로(白銅方爐)를 두고 겉면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새겼다. 좌우로 18나한을 벌여 놓았는데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 그 뒤는 동서로 나누어 두 소상을 벌여 놓았다. 또 서쪽 벽 아래에 꼭두각시〔傀儡〕가 팔을 베고〔曲肱〕 있는 형상을 만들었는데 날개옷을 입고 방울을 단 기괴한 용모에다 한 손가락으로 부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 보아서 진흙을 빚어 만든 소상인 줄 몰랐다. 정전 뒤를 따라 들어가니 청색 벽돌 2조각을 벽에 기대어 세워 놓았는데 하나는 ‘청(淸)’ 자를 새겼고 하나는 ‘규(規)’ 자를 새겼다. 그러나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하겠다.
또 대전 하나가 있는데 밖에 편액하기를, ‘대비단(大悲壇)’이라 하였고 안에는 ‘대비자항(大悲慈航)’이라 하였다. 세팔이 앞장서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안에 있던 한 호인이 청심환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하자 갑자기 성을 내며 빰을 때리니 세팔이도 그를 때렸다. 지키던 중이 급히 들어와 두 사람이 화해하였다. 전각 안에 작은 금신 소상 셋이 있는데 그 밖은 붉은 살로 두르고 청사(靑紗)로 만든 병풍으로 가렸으며, 밖에 큰 백동방로를 두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새겼다. 다 보고 나서 우익랑(右翼廊)에 들어갔다. 3개의 큰 소상이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가사(袈裟)를 입고 주벽에 앉아 있었고 또 두 개의 신장 소상이 동서로 나뉘어 호위하고 서 있었다. 앞에 각각 탁자 두 개를 놓고 탁자 위에 불경 〔梵經〕 수천 권 정도를 쌓아 놓았다. 좌익랑(左翼廊)은 들어갈 겨를이 없었다.
우협문을 따라 들어가니 2층짜리 높은 누각이 있어 13계단의 사다리를 따라 올라갔는데 한 석가(釋迦)를 모셨을 뿐이었다. 서쪽 벽에 2개의 둥근 창을 내어 멀리 아득한 벌판을 굽어볼 수 있었다. 제2전을 둘러보니 뜰에 ‘중수천녕사기(重修天寧寺記)’라는 비석이 있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경사 광녕문 밖에 초제(招提)가 있으니 ‘천녕사’라고 한다. 중간에 부도(浮圖)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10여 장이다. 《도지(圖志)》를 상고해보니, 수나라 때 홍업사(弘業寺)를 세웠는데 괴이한 승려〔異僧〕가 사리(舍利)를 탑 속에 보관해 넣었다. 당나라 때 이름을 ‘천왕(天王)’으로 고쳤다. 명나라 성조(成祖)가 경계를 나누어 특별히 넓히고 높이 세웠다. 선덕 연간에 이름을 ‘천녕(天寧)’으로 고치고 정통 을축년(1445)에 이름을 ‘광선(廣善)’으로 바꿨다. 계단(戒壇)에 종사(宗師) 10인을 세워 놓고 해마다 4월 하순이면 승려들〔緇流〕을 모아 도(度)를 듣는데 이것을 ‘원계(圓戒)’라고 한다. 사후(嗣後)에야 지금의 이름을 회복하였다. 정덕 을해년(1515)에 한번 중수하고 가정 갑신년(1525)에 재차 중수하였는데 모두 내관감(內官監)에서 하였다. 지금 또 200여 년이 지나 원래 세워진 건물은 하자가 있고 새로 지은 건물은 부서져서 수리하지 않으면 장차 무너질 것이었다. 이에 명하여 다시 보수하게 하니 무릇 문무(門廡), 전우, 재당(齋堂), 장실(丈室)의 규모와 제도가 새로워졌다고 하였다. 건륭 21년 병자년(1756) 정월에 황제가 짓고 아울러 쓰다.
내가 일찍이 《일하구문》을 살펴보니, 절에 한나라 명제 때 만든 경쇠〔磬〕가 있는데 경(經)을 욀 때마다 경쇠에 이름을 써서 붙이면 경쇠가 저절로 울린다고 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이상히 여겼는데, 이곳에 와서 지키는 중에게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경경물략》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수나라 문제가 아라한(阿羅漢)을 만나 사리 한 주머니를 받아서 법사(法師) 담천(曇遷)과 함께 그 수를 세었으나 많고 적음을 정하지 못하였다. 이에 칠보함(七寶函)에 넣어 옹주(雍州), 기주(岐州) 등 30주에 보내고 각각 탑 하나를 세웠다. 천녕사 탑이 그중 하나이다. 탑은 높이가 13길〔尋〕이고 네 둘레로 방울을 엮은 것이 만 개는 되어 바람이 그칠 때나 불 때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절의 승려가 말하기를, ‘소리가 모이면 빛이 난다.’고 하였다.
또 《속고승전(續高僧傳)》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석(釋) 보암(寶岩)은 유주 사람이다. 북경의 인각사(仁覺寺)에 살면서 도를 지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인수(仁壽)가 칙서를 내려 불러서 본주(本州)의 홍업사에 사리를 보내게 하였으니, 곧 원래 위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지은 것으로, 옛 이름은 ‘광림(光林)’이다. 산봉우리에 기대어 계곡을 끼고 있어 절의 형세가 높고 시원하다. 개황 말부터 사리가 이르렀다. 전에는 산이 항상 기울고 흔들려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는데 탑에 안치하자 마침내 진동하던 산이 저절로 멈췄다. 또 인수 초년에 하늘에서 체도(剃刀 머리털을 깎을 때 쓰는 칼) 33매(枚)가 내려왔는데 쓰기가 매우 날카로웠으나 형태는 각기 달랐다. 또 처음 돌함〔石函〕을 만들었는데 밝기가 물과 거울 같고 무늬가 마노(瑪瑙 광택이 있는 옥의 종류)와 같았으며 광택이 유리와 비슷하여 안팎을 비추어 관통하였다. 빛이 돌함 바깥에 일어나 무늬를 만드는데 보살상(菩薩像) 및 중선(衆仙), 금수(禽獸), 사자(師子), 나무숲〔林樹〕과 같은 것이 뒤섞여 한 가지가 아니었다. 4월 초3일 밤에 큰 빛을 발하여 천지를 밝게 비추어 눈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보았으나 지금은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또 《장안객화(長安客話)》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절은 원나라 말 병화(兵火)에 다 없어졌는데 문황(文皇 당나라 태종(太宗))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 담당 관리〔所司〕에게 명하여 중수하게 하였다. 요광효(姚廣孝)가 경수사(慶壽寺)에서 물러나 일찍이 이 절에 살았다. 선덕 연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절문을 나와 동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니 옛 부도 2좌가 있었는데 하나는 7층이고 하나는 2층으로 이곳이 홍화사(弘化寺)의 옛 터이다. 또 서북쪽 모퉁이 나무숲 속에 겹겹이 쌓인 무덤이 있었는데 혹 황명의 태감이 묻힌 곳이라고 한다. 서북쪽으로 몇 마장을 가니 금벽 패루 하나가 솟아 있는데 밖에는 편액하기를, ‘동천승경(洞天勝境)’이라 하였고 안에는 ‘경림낭원(瓊林閬苑)’이라 하였다. 패루를 지나니 주문 3개가 있고 ‘칙건백운관(勅建白雲觀)’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문에 들어가니 무지개 돌다리가 있어 작은 해자를 건너갔다. 다리 옆에 비갈 하나가 있는데 그 앞머리에 ‘황제성지(皇帝聖旨)’라 쓰고 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짐이 천지에 백성을 보호하는 마음을 체득하여 황증조고(皇曾祖考)의 뜻을 삼가 이루어 도장(道莊)의 경전(經典)을 간행〔刊印〕해서 천하에 반사(頒賜)하여 널리 전하게 하노라. 이에 일장(一莊)을 백운관(白雲觀)에 봉안(奉安)하여 길이 공양(供養)을 채우게 하니, 이곳에 있는 도관(道官)과 도사(道士)에게 듣고 읽고 외우고 찬양하면서 위로는 나라를 위해 공업을 축원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함께 복을 기원하여 힘써 공경하고 받들어 지키도록 하라. 속되고 한잡(閑雜)한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으리니 사사로이 빌려 보고 완상하며 가벼이 여기고 더럽혀서 손상시키는 데 이르는 자는 반드시 추궁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
도사 3, 4인이 다리 위에서 맞이하여 절하였는데 모두 청면포(靑綿布)로 만든 직령(直領)을 입었으며 머리에 쓴 것은 흡사 우리나라 백부(栢府 사헌부(司憲府))의 관리가 쓰는 청건(靑巾) 모양과 비슷하였으나 작정모(鵲頂帽), 마제수(馬蹄袖)와 비교하면 현단복(玄端服)이 쇠코잠방이〔犢鼻〕에 비할 뿐만이 아니니, 정자(程子)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예의(禮儀)가 선방(禪房)에 있다.〔三代禮儀在禪房〕”고 한 말을 믿을 수 있겠다.
제1전에는 편액하여 이르기를, ‘보소함광전(葆素含光殿)’이라 하였으며, 가운데에 한 도인을 모셨고 다른 소상은 없었다. 전의 계단을 나오니 도사 7, 8명이 늘어서서 절을 하기에 그 수를 묻자 300이라고 말하였다. 앞장서서 들어가니 전 뒷벽에 큰 글씨로 ‘단하유경(丹霞流慶)’이라 쓰고 그 옆에 ‘강우(江右) 한송(韓松)이 쓰다.〔江右韓松書〕’라고 적었는데 멀리서 보니 새긴 듯 분명하였다. 음양(陰陽)의 획법(畫法)을 사용한 것이다.
제2전은 바로 옥력장춘지전(玉曆長春之殿)이다. 전 안에 작은 소상 하나가 있는데 용모가 희고 훤칠하며 수염과 눈썹이 없었다. 사람들이 구진인(丘眞人)이라고 하였다.
《원사(元史)》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진인은 이름이 처기(處機)이고, 자가 통밀(通密), 호가 장춘자(長春子)로 등주(登州) 서하(棲霞) 사람이다. 19세 때 전진(全眞)을 위해 영해(寧海)의 곤륜산(崑崙山)에서 배우면서 여섯 진인들과 함께 왕철(王嚞)을 스승으로 모셨다. 금ㆍ송(金宋) 두 나라에서 모두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년(1219)에 태조가 내만(乃蠻 몽고의 별부(別部))으로부터 근신(近臣) 찰팔아(札八兒), 유중록(劉仲祿)에게 명하여 특별히 조서를 보내 초청하게 하였다. 처기가 하루는 갑자기 문도〔徒〕에게 채비를 재촉하게 하며 말하기를, “천사(天使)가 와서 나를 부르니 내가 마땅히 가야겠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두 사람이 이르자 처기가 제자 18인과 함께 갔다. 이듬해 산북(山北)에 유숙(留宿)하였는데 먼저 표(表)를 올려 사례하고 정성을 다해 황제에게 살인을 멈출 것을 권하였다. 또 이듬해 사신을 보내 재차 이르자 무주(撫州)로 떠나 수십 국을 거쳐 만여 리를 걸어가서야 비로소 설산(雪山)에 도달하였다. 태조가 그때 서쪽을 정벌하여 날마다 전쟁을 일삼았는데, 처기가 매양 “천하를 통일하려는 방법에는 반드시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다스림의 요체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함을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수〔長春〕하여 오래 보는 도리를 물으니,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을 요체로 삼으십시오.”라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굳게 약속하고는 호부(虎符)를 하사하고 옥새(玉璽)를 찍은 문서〔璽書〕도 내렸는데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신선(神仙)이라고만 하였다. 계미년(1223) 태조가 산동(山東)에 사냥하러 가다가 말이 넘어졌다. 처기가 청하기를, “하늘의 도는 살리기를 좋아합니다. 폐하께서 봄, 가을이 장차 깊어지려할 때 사냥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라 하니 태조가 사냥을 그만두었다. 이때 전쟁으로 중원 땅을 유린하여,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이 더욱 심하였다.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죽음을 당해도 목숨을 피할 곳이 없었다. 처기가 연경으로 돌아와서 그 문도를 시켜 통첩을 가지고 전쟁 중에 유랑하는 자들을 불러 구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의 종이 되었던 자가 양민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자도 무려 2, 3만 인이나 되었다. 갑신년(1224) 연경에 와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태극궁(太極宮)에 거처하였고 정해년(1227) 특별히 태극(太極)을 장춘(長春)으로 고쳤다. 7월 9일에 송(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80세였다. 원나라 기사년(1269)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장춘연도주교진인(長春演道主敎眞人)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소상의 앞에 큰 표주박 하나를 두었는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뾰족하며 둘레가 두 아름〔把〕 정도이고 높이가 그 절반이었다. 껍질이 검은 팽나무에 기생(寄生)하는 듯하였으나 모양과 바탕이 크고 오래되었으며 무늬와 결이 기괴하였다. 적금(赤金)을 녹여 그 안을 도금하고 또 황금으로 네 둘레를 두르고 안에 글자를 새겨서 이청(二靑 일반 청색보다 약간 짙은 청색)으로 채웠다. 건륭이 짓고 쓴 어제시에,
절〔琳宮〕을 우연히 지나가다 쉬니 날은 긴데 / 琳宮偶過憩天長
진인은 표주박 들고 소상 옆에 있네 / 眞率大瓢小像傍
모두가 들고서 막북(漠北 북쪽변방)으로 오니 / 都是提携來漠北
누가 양양(襄陽)에서 길 잡아 갈 줄 알겠는가 / 誰知津逮自襄陽
라 하였다. 도사가 말하기를, “황상께서 내탕금〔內帑〕으로 단장해 보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안의 들보 좌우 기둥에 “바람이 도사의 골격에 불어와 천 리가 향기롭고, 구름이 신선의 용모를 감싸 만년토록 제사 지내네.〔風吹道骨香千里, 雲護仙容祀萬年.〕”라 씌어있고 밖의 들보 안팎 기둥에 “만고(萬古)에 장생(長生)함에 노을 먹는 것으로 비결을 구하지 않는다.〔萬古長生, 不用餐霞求秘訣.〕”라 씌어있는데 한 마디 말로 살인을 멈추었으니 비로소 세상을 구제함에 뛰어난 공로가 있음을 알았다.
제3전에 들어가니 ‘재당(齋堂)’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바로 도사가 법도를 강론하고 재계하며 기거하는 곳이다. 뜰에는 만력이 세운 비가 있었는데 비갈 안을 살펴보니 글자가 모두 벗겨져 있었다. 황명의 연호가 이 무슨 뜻인가. 전각의 동쪽 익랑이 칠보전(七寶殿)인데 전 안에 칠진상(七眞像)을 벌여 놓았다. 《곡성산방필진(穀城山房筆塵)》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석(釋)에는 두 종(宗)이 있다. 하나는 금나라 왕철(王嚞)에 전수하였고, 왕철은 7명의 제자에게 전수하였는데, 구처기(丘處機), 담처단(譚處端), 유처원(劉處元), 왕처일(王處一), 학대통(郝大通), 마옥(馬鈺), 마옥의 처 손불이(孫不二)는 세상에서 ‘칠진(七眞)’이라 말하는데 이것이 북종(北宗)이다.
뜰에 2개의 비석이 있었는데 하나는 앞머리에 ‘장춘전칠진선범기(長春殿七眞仙範記)’라고 씌어 있으나 기(記)를 지은 사람의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나는 한림 편수(翰林編修) 호영(胡濙)이 짓고 한림 편수 주공이(朱孔易)가 썼으며 연법진인(演法眞人) 장무승(張懋承)이 새겼다. 서쪽 익랑은 ‘선유전(儒仙殿)’으로 가운데에 소상이 있는데 붉은 얼굴에 검은 구레나룻을 하고서 두건을 쓰고 단화포(團花袍)를 입고 옥대(玉帶)를 차고 곤룡포를 입었다. 이도겸(李道謙)의 《감수선원록(甘水仙源錄)》을 살펴보니, “관진(觀津) 사람 장본(張本)이라는 자가 정대(正大) 9년(1232)에 한림 학사(翰林學士)로서 북쪽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다. 드디어 숨어서 황관(黃冠 도사가 쓰는 관, 즉 도교)이 되었다. 연경의 장춘궁(長春宮)에 거처하였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인 듯하다. 뜰에 비석이 있는데 통묘진인(通妙眞人) 여이정(郘以正)이 쓴 것이었다.
제4전에는 편액하여 이르기를, ‘주경장생(駐景長生)’이라 하였다. 뜰에 비석이 있는데 좌도어사(左都御使) 호남(湖南) 사람 안이수(安頤壽)가 짓고 중서사인(中書舍人) 동오(東吳) 사람 고경(顧經)이 썼으며 태자태부(太子太傅) 봉양(鳳陽) 사람 곽훈(郭勛)이 지었으니 모두 황명 사람이다. 다섯 번째는 삼층 처마에 다섯 기둥이 있는 전각이었다. 두 번째 층에 18개의 족자가 걸려 있고 족자에는 18종사상(十八宗師像)이 그려져 있었다. 종사는 바로 구진인(丘眞人 구처기(丘處機))의 제자들로, 포원종사(抱元宗師) 조도견(趙道堅), 태원종사(太元宗師) 송도안(宋道安), 청화종사(淸和宗師) 윤지평(尹志平), 태소종사(太素宗師) 손지견(孫志堅), 수일종사(守一宗師) 하지성(夏志誠), 명진종사(明眞宗師) 하지청(河志淸), 중화종사(中和宗師) 장지소(張志素), 숭진종사(崇眞宗師) 이지상(李志常), 동명종사(洞明宗師) 기지청(綦志淸), 부화종사(敷化宗師) 맹지온(孟志穩), 광교종사(光敎宗師) 정지수(鄭志修), 포박종사(抱朴宗師) 국지원(鞠志圓), 광범종사(光範宗師) 우지가(于志可)이다. 반득충(潘得沖), 왕지명(王志明), 장지원(張志遠), 양지정(楊志靜) 네 종사는 그 도호(道號)를 기록하지 않았다. 일찍이 칠보전 안에 걸려 있었는데 이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뜰에 비석이 있는데 원외랑(員外郞) 장찬(張瓚)이 짓고 징사랑(徵仕郞) 조사현(趙士賢)이 썼다. 전각의 오른쪽에 또 이층 처마의 누각이 있었다. 첫 번째 층 밖에는 ‘백운심처(白雲深處)’라는 편액이 있고 안에는 ‘도광중휘(道光重輝)’라는 편액이 있으며 가운데 관제(關帝 관우(關羽)) 소상을 모셨다. 두 번째 층은 반달모양으로 바퀴를 만들고 다시 ‘방장(方丈)’이라고 썼는데 필법이 매우 기이하였다. 붉은 사다리 13계단을 따라 무지개 돌문을 들어가니 밖에는 ‘자허진기(紫虛眞氣)’라는 편액이 있고 안에는 ‘득일이청(得一而淸)’이라는 편액이 있으며 왼쪽에는 ‘원자광운(元慈廣運)’이라는 편액이 있고 오른쪽에는 ‘만천사도(萬天師道)’라는 편액이 있었다. 가운데에 감실〔龕〕 하나를 만들고 단면(端冕 현단복(玄端服)과 면관(冕冠). 임금의 예복)을 갖춘 옥황상제의 소상을 모셨다. 동서의 소상 중에 선관이 많았다. 앞에는 칠등(漆燈)을 두고 불을 밝혔다. 이것이 제5전의 첫 번째 층이다.
또 우홍문(右虹門)을 따라 나가니 바로 백운루(白雲樓)였다. 내가 전각과 편액과 비석의 기록을 베끼려고 벼루와 종이를 빌려 달라 청하였더니 한 도사가 궁에서 쓰는 전지〔宮牋紙〕 반절을 받들어 올리고 또 도제(徒弟 제자, 문인)에게 명하여 벼루를 받들고 따르게 하였다. 내가 혜문을 시켜 교체하게 하였는데도 도제가 굳이 자기가 따르겠다고 청하였으니 사령(使令)을 오직 삼간 것이다. 내가 이곳을 지날 적에 사관이 많았는데 절의 승려와 도사가 우리 무리를 보면 반드시 면폐를 요구하였고, 주지 않으면 번번이 성난 기색으로 물 한 잔과 종이 반 조각을 더하여 반드시 비싼 값을 받았는데, 지금 백운관에 오니 많은 도사들이 늘어서서 절하는 모습이 이미 처음 보는 것인데다 한 번 입을 열자 미치지 못할 듯이 응접하였다. 비록 우리나라 승려들이라도 더할 수 없거니와,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백운관에 드물게 오기 때문이다. 드디어 큰 청심환 넷을 도사와 도제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경경물략》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이 이른다.
백운관은 원나라 태극궁의 옛 터이다. 서편문(西便門)을 나가 1리를 가면 백운관 안에 구진인의 소상이 있다. 매년 정월 19일은 진인의 탄신일이 된다. 도성 사람들이 사당 아래에 술을 올리니 이것을 ‘연구절(燕九節)’이라고 한다.
백운관 문을 나서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말을 채찍질하여 천녕사 북쪽 담장으로 갔다. 담장은 모두 3층인데 겉면에 재〔灰〕를 칠하여 천연적으로 벽이 되었다. 좌우에 있는 사관은 다 기록할 수 없다. 동북쪽으로 몇 마장을 가서 옹성의 두 겹문을 따라 들어가니 성과 누각이 모두 무너져 있었는데 문은 방제(方制)를 사용하였다. 성 꼭대기에 ‘서편문(西便門)’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문 안쪽으로 인가는 별로 없었으며 오직 긴 해자〔濠〕가 정양문 뒤로 곧장 이르러 끊이지 않고 이따금 긴 버들이 해자에 끼어있었다. 순치문(順治門) 밖에 이르렀는데 여러 호인들이 대나무처럼 빽빽이 서 있고 좌우 거리에 홍살문이 모두 닫혀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막 포졸이 형을 집행하려 한다고 하였다. 종인을 시켜 먼저 대로로 나가서 거리 위에 대자리를 깔고 관망하게 하였는데 칼을 잘 쓰는 참두수(斬頭手 죄인의 목을 베는 사람)가 서서 죄인을 기다리다가 감형관(監刑官)이 나오자 형을 집행하였다고 하였다. 세팔에게 전문(箭門)을 밀게 하여 대로를 간신히 지나는데 관인 5, 6명이 총마(驄馬)를 탄 채 말을 몰고 뛰어 나오는데 말이 나는 듯이 빨리 달렸다. 사나운 모습이 과연 살기(殺氣)가 있었다. 세팔이 말하기를, “외국인이기 때문에 대로를 지나가도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곳은 형을 집행할 때 감히 길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을 돌아보니 모두 길옆에서 숨죽이고 둘러서서 감히 왕래하는 자가 없었다.
정양문으로 들어가 관소로 돌아오니 해가 이미 졌다. 아버지께서 진지를 반 그릇 드셨다. 호거인의 답서를 책상에 두었기에 열어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제의 필담(筆談)과 시전(詩戰)은 가히 인생의 쾌사(快事)라 할 만합니다. 돌아오니 몹시 피로하였는데 정사와 윤송(輪誦)한 것 1질을 되풀이해서 보고 나니 정신이 왕성해졌습니다. 저 또한 이로부터 도학(道學)에 귀의할 것이니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름다운 시편〔瓊什〕은 돌려드리겠으니 하나하나 정정해 주십시오. 《광여기》 1본을 보여 주기를 바라시어 부쳐 보냅니다. 이것은 빌려온 물건이니 열람이 끝나면 돌려주시기를 꼭 바랍니다. 새로 알자마자 멀리 이별하게 되어 쓸쓸한 마음을 종이 조각에 다하기 어려우니 어찌합니까, 어찌합니까. 한 글자 적어 보냅니다. 대천 호소일은 절합니다.
안남 세 사신이 또 편지를 보냈다.
일전의 〈소상백영〉은 논할 만한 시가 아닙니다. 이미 한 자 한 자 칭찬을 받았지만 마음에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마땅히 미물(微物)이요 감히 윤필(潤筆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림)의 바탕이 아닌데도 다시 정중하게 지극한 정을 입었으니 많이 가지기를 탐내지는 않습니다. 【안남 사신이 명주와 향을 주어 내가 종이와 부채로 보답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물건을 보고 감회가 일어 꿈에서도 생각이 나는데, 지금은 동쪽으로 가는 말이 고삐와 재갈을 정비하고 남쪽으로 가는 깃발도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평녕(平寧)’ 두 글자는 진정 반으로 나누길 원하니 서로를 추억함에 오직 푸르고 붉은 안개 사이에 있을 뿐입니다. 이만 줄이고 한 글자 적어 보냅니다. 안남 공사 진휘밀, 여귀돈, 정춘주은 함께 절합니다.
사신 여귀돈이 《성모현범록(聖謨賢範錄)》 4권을 보냈다. 그 책은 경(經)ㆍ전(傳)ㆍ자(子)ㆍ사(史) 및 송나라 이후의 선정(先正)의 격언을 모은 것으로, 무리〔群〕대로 나누어 문(門)을 세우고, 종류〔類〕대로 모아서 목(目)을 세움이 진씨(陳氏)의 《자경편(自警篇)》의 체례〔例〕와 같으니 바로 그가 엮은 것이다. 또 따로 편지를 보냈다.
문자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천추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성작(盛作)은 지척에서 외고, 함께 약수에서 수레를 멈췄지〔誦盛作咫尺, 停車同弱水〕’라는 구절은 일찍이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보내주신 〈소상백영〉 서문을 받들어 보니 전아(典雅)하고 호상(豪爽)하여 참으로 명필이라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어찌 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지나치게 칭찬하고 허여해 주시어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제가 엮은 《성모현범록》 한 책은 12편으로 그 서인(序引)은 생략하였습니다. 도중에 가지고 보면서 거듭 서리를 시켜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베끼게 하였으나 잘못된 건이 매우 많습니다. 지금 한 본을 보내드리니 혹 조언을 남겨주실 수 있을는지요? 근일에 정사공이 보고 기뻐하여 편지를 썼기에 저는 다시 군자께 서문 하나, 발문 하나를 받고자 생각하였으나 행색이 급하여 겨를이 없을 듯하니 굳이 마음 쏟으실 것 없습니다. 붓 가는 대로 써서 부치니 이후에 동쪽과 남쪽에서 각기 다른 하늘에서 이별할 상황이 아쉬워 다 쓰지 못하겠습니다. 작은 정성을 공경히 우러러 태성(台星)이 비추길 삼가 빕니다. 몇 자 적어 보냅니다. 여귀돈은 절합니다.
아버지께서 등불 심지를 돋우고 나에게 붓을 잡으라 명하시고는 한번 불러서 서문을 완성하였다. 이날 대략 30여 리를 왕복하였다.
[주-D001] 광비지(廣轡誌) : 《광여기(廣輿記)》인 듯하나, 번역은 원문을 따른다.[주-D002] 상륜(相輪) : 불탑 꼭대기에 청동 등의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을 말한다.[주-D003] 초제(招提) : 사원이라는 뜻의 범어인 caturdeśa를 음역한 것으로, 관부에서 사액한 절을 가리킨다.[주-D004] 계단(戒壇) : 불교에서 계(戒 불교에 귀의한 자가 지켜야 할 계율)를 주는 의식을 행하는 단(壇)으로, 흙과 돌을 높이 쌓아서 만든다.[주-D005] 도(度) : 바라밀(波羅蜜, pāramitā)의 의역으로, 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에, 즉 고해(苦海)를 건너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계행(戒行)을 닦아 도를 얻는 것을 득도(得度)ㆍ득탈(得脫)ㆍ도탈(度脫)이라고 한다.[주-D006] 사후(嗣後) : 본래 후사를 이었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명나라 영종(英宗)인 정통제(正統帝)의 장남으로 뒤이어 왕위에 오른 헌종(憲宗), 즉 성화제(成化帝)를 가리킨다.[주-D007] 내관감(內官監) : 황궁 내의 토목, 건축 공사를 관리하며 각 지방을 다스리는 왕의 주거지인 번저(藩邸)와 제후들의 능묘를 수리하는 일을 담당한 관청. 황제가 사용하는 기구(器具)와 종이 등도 관리하였다.[주-D008] 요광효(姚廣孝) : 1335~1418. 자는 사도(斯道), 호는 천희(天禧)ㆍ도허(逃虛)ㆍ독암(獨庵)이며, 법명은 도연(道衍)이다. 14세에 승려가 되고 시화에 능하였다. 홍무 연간에 고승으로 뽑혔으며, 연왕(燕王)을 쫓아서 경수사(慶壽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정치를 도왔다. 1404년 태자소사(太子少師)의 관직에 올라 요 소사(姚少師)라고 불렸다.[주-D009] 직령(直領) : 곧은 옷깃. 소매가 넓고 깃이 곧은 남자의 겉옷〔袍〕도 직령이라고 한다.[주-D010] 장수하여 오래 보는 도리 : 원문의 ‘구시(久視)’는 장생(長生)이나 불사(不死)를 뜻한다. 《도덕경(道德經)》 제59장에 “나라를 소유한 어미는 장구할 수 있으니 이를 뿌리를 깊이 하고, 꼭지를 단단히 하여 길이 살아 오래 보는 도라고 한다.[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蔕, 長生久視之道.]”라고 하였다.[주-D011] 호부(虎符) : 군사를 발병할 때 사용하던 병부(兵符). 구리로 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주-D012] 석(釋)에는 …… 북종(北宗)이다 :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도교선서도경변증설(道敎仙書道經辨證說)〉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도가의 남ㆍ북종은 전수한 것이 근거가 있다. 동화(東華)의 소양군(少陽君)이 노담(老聃)의 도(道)를 얻어 한나라 종리권(鍾離權)에게 전수하였고, 종리권은 당나라 여암(呂巖)과 요나라 유조(劉操)에게 전수하였으며, 유조는 송나라 장백단(張伯湍)에게 전수하였고, 장백단은 석태(石泰)에게 전수했으며, 석태는 설도광(薛道光)에게, 설도광은 진남(陳枏)에게, 진남은 백옥섬(白玉蟾)에게, 백옥섬은 팽상(彭相)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남종이다. 여암은 금나라 왕철에게 전수하였고, 왕철은 일곱 제자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하나가 구장춘(丘長春)이며, 구장춘이 송도안(宋道安)ㆍ담처단(譚處端)ㆍ유처현(劉處玄)ㆍ왕처일(王處一)ㆍ학대통(郝大通)ㆍ마처옥(馬處鈺)ㆍ손불이(孫不二)에게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북종이다.”[주-D013] 약수(弱水) : 약수는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이 있는 섬으로부터 약 30만 리쯤 떨어져서 인간 세상과 격리시키며 그 섬을 둘러싸고 있다는 전설 속의 물 이름이다. 여기서 ‘약수’는 중국을 의미하며, 두 사신이 만나 교유하였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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