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의 기억] 남궁원, 기억을 더듬어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 보아 1991년 하반기 어느 날 오후인가보다. 큰 키와 인상 좋은 얼굴에 학구열이 왕성하게 보이는 큰 가방을 메고 지금의 서울 공덕동 로터리 부근 당시 「민중회의」 마포지부 사무실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이것이 남궁원 동지와 나와의 첫 만남이다. 그날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었고 그 이후로 나와는 동지로 때론 후배로 어떨 땐 형제처럼 인연이 되었다.
처음 볼 때는 속없이 덩치 큰 사내로 보였지만, 시간과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속이 꽉 찬 논리와 행동에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믿음직스런 동지였다. 특히 1992년 하반기 「백기완 선거대책본부」 활동을 할 때는 서울 서부지역의 실무를 도맡아 빈틈없이 수행해 내었다. 정말 주변 동지들이 깜짝 놀랐다.
이후 「민중정치연합(이하 민정련)」활동을 할 때는 은평지부 살림을 다 챙기면서 도시락을 들고 출퇴근하면 실무를 다 했고, 작은 시간, 틈만 나면 국립 중앙도서관을 찾아 이론에 의문점을 파헤치며 스스로를 단련 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것도 알게 되는 조언도 많았고, 은평지부 내에 학습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선후배 사이 그리고 동지 사이에 신뢰와 믿음이 확고하게 형성된 계기는 「민정련」 말기 정치. 조직 노선과 관련된 마지막 총회로 기억된다. 그 총회는 내 기억으로 정말 별난 총회였다.
1안 <민정련 혁신안- 실제는 사민주의 노선>안과 2안<사회주의 고수안>을 갖고 마지막 총회 의사결정 방식은 줄서기 방식이었다. 각 지부별 사전 토론과정에서 1안은 다수로 나타났고, 은평지부 내에서도 2안은 소수로 나와 남궁원 동지뿐이었다. 총회 줄서기 표결 결과 참석회원 2/3 이상 득표에서 2표가 모자라 1안이 부결되면서 민정련은 자동 해산되었다. 그야말로 민정련 전체가 통째로 사민주의 노선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은평지부 내 남궁원 동지와 나, 두 명의 결단은 이후 공개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을 부여잡고 다음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노동정치연대」 활동에서부터 97, 98년 「정치연대」 시기를 지나 「노동자의 힘」 → 「사회주의정치연합(준)」 + 「노동자평의회를 향한 전국회의」 → 「사노련」 → 「사노위」를 거쳐 「노혁추」를 지나 마지막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활동 속에서 불의의 사고가 있기까지 늘 나와 함께 하며 더욱 발전적인 다음 운동을 고민하는 동지였다.
초장기 얼마 되지 않는 단기간의 활동 속에서의 믿음과 신뢰 관계는 사적인 삶의 고민과 생활까지도 속속들이 알게 해 주었다. 백영화 동지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을까 싶다. 한 번은 나와 단둘이 술 한잔하자고 해서 나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자리를 했다. 심각한 고민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너무 힘들어, 잠시도 아닌 영원히 운동 자체를 그만두고 싶어 했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경험상의 별의별 이야기를 한다 해도 특별한 뾰족한 해결책은 없어 보였다. 나는 할 말도 잃어버렸다. 그냥 밥만 꾸역꾸역 먹었다. 그러는데 괜히 화가 치밀었다. 나는 수저를 놓고 못 먹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럴 거면 애초부터 이 일을 왜 시작했느냐, 힘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고” 친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심하게 화를 퍼부었다. 아무 말 없이 술만 들이켜고 있던 남궁원 동지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살길을 찾아보자고 했다. 나는 몇 날, 며칠을 뭐 도움 될 일이 없을까 생각에 골몰했다. 적게나마 교통비와 담뱃값이라도 어디서 어떻게 좀 마련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닌 오랜 동안을... ..., 그래서 남궁원 동지를 잘 아는 선배나 후배 중에 그래도 생활이 크게 힘들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1년 이상의 후원을 요청했다. 어렵지 않게 모두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이 지면을 빌어서 그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표한다. 이 후원을 통해 남궁원동지가 사노련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노련 활동 중에 정권과 자본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고, 이후 사노위를 통해 큰 틀의 사회주의 혁명 정당을 만들고자 했으나 내부 강령상의 이견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다시 노혁추를 결성했으나 선거 전술의 이견으로 갈라지고,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만들었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 조직의 발전을 위한 수련회를 마치고 귀가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었다.
남궁원 동지는 길지 않은 삶 속에서 이 땅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명망가의 삶이 아닌 험난한 코뮤니스트 혁명가의 길에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쳤고, 이런 동지의 삶에 다시 한번 깊은 조의를 표하며 동지의 정신 계승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할 것임을 밝힌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