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1840~1866년)
“토마스 목사”로 잘 알려진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는 1840년 9월7일, 잉글랜드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Rhyader Radnoshire)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1863년 5월, 24세의 토마스는 런던대학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6월4일, 자신의 고향인 “하노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7월21일,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의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상선 폴메이스 호(Polmaise)를 타고 중국(청나라) 상하이에 도착한 12월, 매서운 한파가 몰아 쳤습니다. 상하이를 기점으로 선교를 시작할 무렵 동료 선교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이 아기를 유산하고 감염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1864년 4월5일, 런던선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선교보고는 아내의 사망보고로 시작하였습니다.
런던선교회 중국지부장 “무어 헤드”(W.Muirhead)는 고통과 실의에 빠져 있는 토마스에게 “앵글로 차이니즈” 사립학교의 교장을 추천하였습니다. 토마스는 선교사로서 영리적인 활동을 하는 무어 헤드와 마찰을 빚고 있었습니다. 24세의 혈기왕성한 젊은 선교사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865년 1월, 산동성 해상세관에서 통역사로 취직을 하였습니다. 산동성 지푸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엄스”(Alexander Williamson) 선교사로부터 선교사역에 관한 소명과 비전을 듣고 회개한 토마스는 9월 세관 통역사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본분인 선교사역자로 복귀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온 목선 한쌍이 지푸에 정박했습니다.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성에 까지 도착한 두사람의 조선인은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발견한 윌리엄스 선교사는 이들이 천주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지식에는 너무나 무지하였다는 사실에 당황하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 상황과 현실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토마스는 조선선교에 대한 확신을 갖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1865년 9월4일, 산동성으로 온 두명의 조선 천주교인을 동반하고 그들이 도망쳐온 조선을 향하였는데 이것이 토마스의 조선에 대한 1차 전도여행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스코틀랜드 바이블협회 에이전트) 소속 선교사로 9월13일,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한 후 그해 12월까지 연평도 등 서해안 일대에서 윌리엄스가 준 한문성경을 전달하고 한국어를 배우며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선교상황은 매우 열악하였습니다. 조선인들은 참수형을 각오하고 성경을 받아야 했으며 조선조정은 쉴틈없이 천주교인에 대한 체포와 박해를 일삼았습니다. 토마스가 안전하게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조정의 허가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65년 12월, 조선을 떠난 토마스는 만주해안에서 극심한 태풍을 만나 장기간 표류하였으며 1866년 1월, 구사일생으로 우장과 산해관을 경유하여 베이징으로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토마스는 베이징 선교회 산하교육기관인 “북경대학”에서 “학장서리”로 일하며 조선선교의 꿈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조선에서 동지사 일행이 베이징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토마스는 “예부회동관”을 찾아가 개화파의 거장이며 평양감사인 “박규수”를 만났습니다. 함께 온 동지사 가운데 한사람이 토마스에게 일전에 전해준 마태복음 1권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함으로서 자신의 1차 전도여행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조선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진 토마스는 기도하며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1866년 조선에서는 “병인박해”((고종3년),丙寅迫害,병인사옥,천주교4대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쇄국정책을 취하던 조선의 악명높은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유화정책을 거두고 조선전국에서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씨를 말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로서 프랑스 신부 12명이 순교하는 등 대대적인 처형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박해를 피해 피신중인 프랑스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1866년 7월에 조선을 극적으로 탈출, 청나라 텐진으로 이동하여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토마스는 리델과 함께 가이드겸 통역사로 로즈의 동양함대에 승선하려 하였으나 인도차이나 지역의 폭동으로 인하여 함대 일정이 10월로 연기되어 승선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을 열망하는 토마스 선교사는 다른 항로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인 “프레스톤”(W.B.Preston) 소유의 상선이며 순양함인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중국 체푸(Chefoo,현,옌타이)에서 조선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제너럴 셔먼호에는 선박 소유주인 프레스톤과 선장 페이지(Page)와 1등 항해사 윌슨(Willson)과 영국인 호가스(Hogarth),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 16명이 승선하였으며 항해사겸 통역관으로 토마스 선교사도 함께 승선하였습니다.
1866년(고종3년) 8월9일, 체푸항을 출발한 제너럴 셔먼호는 8월16일 조선 대동강어귀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 근해에 정박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프랑스 신부의 처형으로 프랑스 군함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상선인 셔먼호가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하여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군함으로 여겨 경계 하였습니다. 이에 황주목사 “정대식”를 비롯하여 우후 “신영한”, 통역관 “이용숙” 등 지방관리가 셔먼호에 승선하여 조선입국 목적을 탐문하였습니다. 통상무역을 하려고 온 페이지 선장은 그 입국 목적을 밝혔지만 당시 조선은 외국과의 무역이 국법으로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주목사는 배를 돌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관료의 요구를 간과한 셔먼호는 8월19일, 황주 송림리 연봉포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8월21일, 대동강 입구인 용강군 다미면 상칠리 주영포를 경유하여 8월25일에는 평앙부 초리방 일리 신장포에 정박하였습니다. 이미 황주목사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올라온 셔먼호의 태도에 대하여 평앙 감사 “박규수”와 중군 “이현익”, 군관 “방익진” 등 조선조정은 매우 긴장하였고 재차 입국 경위를 조사하였습니다. 통역관인 토마스 선교사가 입국목적이 통상과 선교임을 밝히며 자신들은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교”라고 밝혔습니다. 야소교에 대해 생소한 관리들에게 “야소교는 백성에 덕이 되고 인성에 선이 되는 진도가 야소교에 있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정국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여기며 외국과의 통상을 일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정관은 배를 돌려 출국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에도 조선관료들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다시 항해를 하여 8월27일, 만경대 아래 두로섬까지 올라와 정박을 하였습니다. 개화주의자인 동시에 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던 평양감사 박규수는 이현익과 평양부 신태정을 셔먼호에 보내 철수를 명하며 거절할 경우 체포의 불가피성을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퇴각할 경우 승무원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보급품을 공급해 주겠다는 배려의 약속도 함께 전달하였습니다. 미국의 힘을 믿었던 것이었을까요? 그들은 조선관리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그들을 추적하던 중군 이현익을 나포하고 인질로 잡는 등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습니다. 다음날 평양부 신태정이 셔먼호에 가서 이현익을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9월1일에는 황강정까지 항해를 계속하는 한편 총기류까지 사용하는 대치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평양부민 7명이 죽고, 5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박춘권이 억류한 이현익을 구출하고 양각도 서편에 정박한 셔먼호와 불가피한 전투가 발생하였습니다. 양각도 토사위에 좌초된 셔먼호는 군관민들과의 일전을 거듭하다가 완전 침몰되었으며 화염속에서 대부분 사망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토마스 선교사와 중국인 조능봉이 갑판위에서 구명을 요청하였을 때 박규수가 이들을 강안으로 탈출시켰지만 이미 분노한 평양부민들이 폭력으로 그들을 비참하게 살육하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자 칭호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사포에서 어린 소년 “홍신길”에게 성경을 전달해 주는 것을 시작으로, 석정호에서 “김영섭”과 “김종권”에게 전달하고, 만경대에서 “최치량”에게 전달한 이후 이들에 의해 강서와 평양 “판동교회”가 설립 되었습니다. 강안 광장으로 인도된 토마스를 죽이는데 일조한 “박춘권”은 귀가길에 땅에 떨어진 성경을 주워 돌아가 읽은 후 예수를 믿고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토마스의 순교가 평양복음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셔먼호가 화염에 휩쌓였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하던 12세 소년의 “최치량”의 손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3권의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어린 소년은 겁에 질린 나머지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전달하였고, 무엇인지 잘 몰랐던 박영식은 성경종이를 찢어 자기 집 큰 방 벽지로 사용하였습니다. 최치량은 성경책으로 집안을 도배한 박영식의 집에서 벽에 붙어 있는 성경책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찢어 벽지로 사용한 박영식의 집은 훗날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 예배당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1927년 5월8일, 토마스의 순교를 기념하는 추모예배가 쑥섬에서 거행되었고, 1933년 10월14일에는 장로교 총회가 순교지에 토마스 기념예배당을 건립하여 봉헌하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이 조선땅에 온 목적을 상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져온 성경책을 이름모를 조선인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후 그는 어떤 열매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채 유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1차 전도여행기에서 누군가가 전해받은 마태복음 1권이 희망서가 되었듯이 2차 전도여행 또한 그러한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순교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태이후 조선조정은 더욱더 강력한 종교탄압을 강구하였으며 프랑스의 원정도 시차를 두고 접근해 오고 있었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사태를 정벌한 로즈 사령관이 10월경 7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에 도착, 무력시위를 강행함으로서 “병인양요”(丙寅洋擾,병인사옥)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로즈 사령관은 10월16일, 강화부를 점령하고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의 학살에 대한 강경한 보복응징을 선포하였습니다. 군함 7척, 함재 대포10문, 총병력 1천명 등 군사력을 압도하는 프랑스군의 화력앞에 조선군은 일시에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제주목사 “양헌수”가 천총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복작전을 성공시킴으로서 11월10일, 프랑스군은 함대 철수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외규장각과 20만프랑의 금은보화, 조선시대 의궤 300여권을 약탈해 감으로서 리델 신부가 조선에 온 근본적인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던 천주교 신앙의 정신은 의심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료 선교사들과 천주교인을 잃은 리델 신부의 심경은 백번 이해하지만 무력으로 선교를 동원하는 정책은 결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갖게 한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