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통일신라 흥덕왕3년(828년)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선종(禪宗)은 신라 혜공왕 때 처음 전래되었지만 발전을 못하다 도의(道義)와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고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중 으뜸 사찰로 발전였다. 도의는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숙종26년(1700년) 침허조사에 의해 중창 36동의 웅장한 규모의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대적광전, 약사전, 무생전, 십불전, 오백전, 장육전, 원통전, 미타전, 적묵전, 미륵전, 명부전, 만화당, 현묘당, 청심당, 보응당, 자운당, 탐진당, 정성당, 금당, 향로각, 대동고, 환재각, 종각, 향적소, 만세루, 능허각, 불이문, 천왕문, 해탈문, 조계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전각과 누각이 고종20년(1883년) 스님들을 몰아내고 실상사의 너른 땅을 차지하려 했던 양재묵 일당의 방화로 인해 대부분 불타고 요사 1채와 전각 3동만이 남았다. 그때 불탄 대적광전은 단층 건물로는 조선에서 제일이라고 부르던 건물이었다 한다.
현재의 실상사에는 보광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칠성각, 종각, 천왕문, 화엄학림 학사와 강당, 요사채, 해우소 등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석등 (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 3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실상사 약수암 목각탱(보물 제421호), 실상사 위토개량성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상원주장군 석장승(민속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
▲천왕문(天王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9년에 세운 것이다.
정면에는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천왕문(天王門) 편액이 걸려 있다.
천왕문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된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동방에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에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배치했다
▲보광전(寶光殿)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고종21년(1884년)에 월송(月松)스님이 본래의 넓은 금당 터 기단 위에
다시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보광전 주변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본래의 금당이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보광전 아미타삼존상
삼존상 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좌우의 관음ㆍ대세지 두 보살입상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 왔다고도 한다.
좌우의 보살입상은 종이로 만들어진 지불(紙佛)로 보살상 1구가 과거 분실되어 남은 1구를 대칭적으로 복원하여 모신 것이다.
1981년에 조성한 신중탱ㆍ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전북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실상사 동종(實相寺 銅鍾)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조선시대 범종이다.
용뉴에는 여의주가 없는 용이 종천판(鍾天板)을 딛고 있는 형상이며, 용통은 간략화된 용의 꼬리가 휘감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상대(上帶)와 천판(天板) 사이의 입화식(立花飾) 및 하대문양(下帶紋樣)이 없어지고, 상대문양을 범자문(梵字文)으로 대치하여
간략화 되었으나, 용통의 존재는 한국종의 전통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에는 종신(鍾身)보다 한단 높게 원형 단을 만들고, 그 안에 한 자씩 범문을 12곳에 양각하였다.
칠성각(七星閣)..
보광전옆에 위치한 칠성각은 정면과 측면 각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32년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세운 것이다.
정면에 달려있는 ‘칠성각’ 편액은 거암(居巖) 김봉관(金奉官)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1981년에 조성한 칠성탱을 봉안하였다.
▲명부전(冥府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맞배지붕으로 장육전 동쪽에 있던 길선당의 옛터에
건립된 것을 1821년(순조21)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명부전
정면과 측면 각3칸의 맞배지붕으로 장육전 동쪽에 있던 길선당의 옛터에 건립된 것을
1821년(순조21)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명부전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 조성한 지장시왕탱이 모셔져 있다.
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 조성한 지장시왕탱이 모셔져 있다.
시왕상ㆍ판관상ㆍ인왕상의 명부 권속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極樂殿,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 옆의 요사
▲범종각(梵鐘閣)
정면과 측면 각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1991년에 건립한 것이다.
종각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지리산실상사호국범종(智異山實相寺護國梵鐘)’이 걸려 있다.
1967년 실상사에서 파손된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을 발견하였는데, 현재 범종각이 서 있는 자리가 그곳이다.
파손된 통일신라 범종은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범종각에 봉안된 범종은 이 종을 모델로 하여 새로 조성한 것이다.
▲ 3층석탑(보물 제37호)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두 탑의 수법과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가 있으며, 높이는 8.4m이다.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의 정형을 보이며, 각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면의 받침은 4단이며, 살짝 위로 들려진 네 귀퉁이는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등으로 높이가 5m나 된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 모양 조각을 얹었으며,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 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