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오덕홍·김일언·정래의 선생 선정
"구국의 일념으로 일제에 맞서 의병 활동 헌신"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한 독립유공자, 오덕홍(1997년 애족장), 김일언(2010년 애족장), 정래의(2022년 건국포장)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907년 8월 일제가 강제한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국가 존망의 기로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오덕홍(1885년, 전남 나주 출생)선생은 1909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부대원 20여 명과 나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7년 9월 기삼연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전남 장성에서 봉기해 호남지역 의병부대들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활발히 활동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군이 1908년 4월부터 대대적인 의병탄압을 시작했다.
하지만,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위축되자, 오덕홍 선생은 일본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모집한 의병으로 소규모 유격부대를 창설해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고 배신자를 처단하는 등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성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의병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치열했던 전장지(戰場地)에서 유격전술을 전개한 의병장인 선생은 9월 나주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했다.
김일언 선생(1859년생 추정, 본적 미상)과 경북 영일 출생의 정래의 선생(1872년생)이 함께 참여한 산남의진(山南義陳)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측근이었던 정환직이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아 대규모 의병봉기를 계획한 것에서 시작됐다.
1907년 봄, 제2차 산남의병 총대장에 정용기(정환직의 아들)를 추대하고, 김일언 선생은 우포장(右砲將)에, 정래의 선생은 우익장(右翼將)에 임명돼 본격적으로 산남의진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김일언 선생은 1907년 8월 청하군 죽장면에서 일본군 척후(斥候) 1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유인하여 일본군 1명을 처단했다. 이에 일본군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가 보복작전에 나섰지만 오히려 산남의진이 청하읍을 공격하여 분파소 및 부속 건물 등을 소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07년 10월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참패하고,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자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영일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이동해 도포장에 김일언 선생을 좌익장에 정래의 선생을 각각 임명하고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때부터 청송의 보현산과 영일의 북동대산 일대에서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청하분파소를 공격해 경찰 1명을 처단하고 분파소를 소각했으며, 11월에는 신녕분파소를 공격하여 총기 등 60여 점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산남의병은 13도창의군(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의병부대)이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한다는 소식에 북상하여 관동으로 집결하다가 정환직 총대장이 1907년 11월(양력 12월) 죽장면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하고, 후대 총대장으로 추대된 최세윤(1968년 독립장)이 김일언, 정래의 선생과 논의 끝에 서울진공작전을 토벌하고 남하하는 일본군을 경상도 일대에서 저지하기 위해 장기전(長期戰)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이에 부대를 소규모 유격대로 나눠 남동대산을 근거지로 보현산, 팔공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1908년 8월 최세윤 의병장이 체포되고, 이세기, 서종락 등 주요 인물이 전사하면서 산남의진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이때 김일언 선생의 의병활동도 산남의진과 운명을 함께했다.
정래의 선생은 산남의진이 해산되었으나 조성목, 정순기 등과 산남의진의 재건과 의병을 잇는 구국항일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순국한 의병을 추모하는 단체로 위장한 참동계(參同契)를 조직했다.
참동계는 영천 등 영남 일대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어 선생은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체포됐다. 일제 경찰의 자백 강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선생은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오덕홍 선생에게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일언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정래의 선생에게는 2022년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