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유난히 사랑한 퇴계 이황
獨倚山窓夜色寒(독의산창야색한) 홀로 山窓에 기대어 서니 밤 빛 싸늘한데
梅梢月上正團團(매초월상정단단) 매화 가지 끝에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불수갱환미풍지) 다시금 부르지 않았음에도 微風이 불어와
自有淸香滿院間(자유청한만원간) 절로 맑은 향기가 뜰안을 가득 채우는구나
'도산 달밤에 매화를 노래함(陶山月夜詠梅)' 이란 제하의 제1수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대표적인 절창이지요. 사실 퇴계 선생은 감수성 높은 예술가의 재질을 타고 났으나 공부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 하여 일부러 시를 짓는 것을 자제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한시를 남겼으며, 더욱이 매화를 읊은 것(詠梅)만도 백수가 넘는다고 합니다.
步躡中庭月趁人(보섭중정월진인) 뜰 안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따라오네
梅邊行繞幾回巡(매변행요기회순) 매화 곁에 나가 그 주위를 몇번이나 돌았던고
夜深坐久渾忘起(야심좌구혼망기) 밤 깊도록 내처 앉아 일어나는 걸 잊고 있노라니
香滿衣布影滿身(향만의포영만신) 매화 향기 옷에 가득하고 달 그리매 몸에 그득하여라
위 시도 陶山月夜詠梅 중 한수인데, 단지 노인네가 잠이 오지 않아 달밤에 밖에 나가 매화나무 주위를 서성이는 건 아닌듯 싶습니다. 매화를 유달리 사랑하여 백곡이 넘는 자작 매화타령(?)을 한 것도 모자라 임종시 제자를 불러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유언처럼 남기고 가셨을까(죄송!). 속좁은 필자의 소견으로는 매화같은 여인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여인은 정비석의 명기열전 뿐만 아니라, 최인호의 소설(유림)에도 등장하는 단양 관기 두향!
단양 기생 두향(杜香)과의 인연
花光迎暮月昇東(화광영모월승동) 꽃 풍경 저녁을 맞아 동녘에 달 떠오르니
花月淸宵意不窮(화월청소의불궁) 꽃과 달 청량한 밤 생각은 끝이 없구나
但得月圓花未謝(단득월원화미사) 다만 달이 둥굴고 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莫憂花下酒杯空(막우화하주배공) 꽃 아래서 술잔이 비었다고 걱정하지 않을 텐데
*통상 짧은 한시(絶句)에서는 같은 자를 중복해서 쓰지 않는 게 보통인데, 이 시에서는 4구에 모두 꽃 花자를 넣었네요~~
퇴계의 봄을 노래한 4수 중 '밤(夜)' 입니다. 선생의 시문집이나 후학들의 글에도 구체적으로 두향과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언급된 바가 없다네요.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여러 방증으로 보아 그 혐의(?)를 벋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선 관기는 관물(?)임에도 불구하고 곧은 선비께서 단양군수를 마치고 두향을 기적에서 빼내준 사실과 두향은 이후 평생을 수절한 것만 봐도... 더욱이 선생의 10대손으로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바 있는 이휘영은 뜬금없이 두향의 묘를 찾아 술을 부어 참배했으며, 한성 부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그의 동생 휘재는 시를 써서 두향의 묘에 바쳤을까요? 한번 헤어진 후 다시 찾지 않은 조상 어른을 대신하여 '달이 뜨면 응당 학(퇴계의 혼?)이 날아 들거라고' 읊조리며 두향의 넋을 위로한 건 아닌지.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 청산은 북쪽 성곽을 빗겨 있고
白水繞東城(백수요동성) 맑은 물은 동편 성을 둘러 흐르네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 이 곳에서 한번 헤어지면
孤蓬萬里征(고봉만리정) 외로운 다북쑥 만리를 가리 --(퇴계)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 뜬 구름은 나그네 마음이요
落日故人情(낙일고인정) 지는 해는 보내는 사람 정이지요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 손을 저으며 이렇게 떠나가시니
蕭蕭斑馬鳴(소소반마명) 쓸쓸합니다, 말 울음 소리 --(두향)
이백의 '送友人'이란 시인데, 1년도 안되는 단양에서의 만남을 끝으로 헤어지면서 퇴계 선생이 이백의 시 전반부를 빌어 다시 못 만날 인연임을 암시합니다. 이에 두향이 같은 시의 후반부로 화답합니다
黃券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옛 경전 가운데에서 성현을 마주하고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텅 빈 방에 초연히 앉아 있겠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창가에 다시 봄 소식 오면
莫向瑤琴歎絶絃*(막향요금탄절현) 거문고를 두고 줄 끊어졌다 한탄하지 않으리 *絶絃 : 이별을 뜻함
위 시는 선생이 말년에 지은 걸로 알려졌지만, 단양 군수를 마치고 두향과 헤어지며 썼다고도 합니다. 어떻든 두향을 염두에 두고 지은 시임에는 틀림이 없을 듯 하네요. 내용은 다소 난해한데, 1, 2구는 이제 너와 헤어지면 쓸쓸한 텅 빈 방에서 누렇게 바랜 경전(黃券)이나 읽으면서 지내겠지, 3, 4구는 그래도 봄이 와서 네가 준 홍매분에 꽃이 피면 너 인양 하고 보면서 마음을 달래리라는 내용이 아닐런지요.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져 가시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찌할까
거의 유일한 두향의 시조로 선생과의 이별을 아파하며 지은 것이지요. 이후 강선대 부근에 초막을 짓고 수절하다 선생이 칠십의 나이로 돌아가시자 한동안 슬피울다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지고...
암튼 향리로 돌아간 후에 지은 매화시를 제외한다면 단양에서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에 지은 한시가 많은 걸 보면, 선생이 상처한 후 외로움과 이곳에서 만난 두향과 무관치 않겠지요.
一點孤墳是杜香(일점고분시두향) 외로운 무덤 하나 바로 두향
降仙臺下楚江頭(강선대하초강두) 강선대 아래 강 언덕에 있네
芳魂償得風流價(방혼상득풍류가) 향기로운 넋 풍류의 대가런가
絶勝眞娘葬虎丘*(절승진랑장호구) 경치 좋은 길지에 묻어 주었네
*虎丘 : 중국 강소성 소주에 있는 지명으로 오나라 왕 합려를 장사지낸 명당으로, 이곳엔 중국 4대미인 서시의 별궁터가 있어
미인이라면 누구나 묻히고 싶어하는 곳으로 유명
송시열 문하로 단양군수를 지낸 임방(任傍)이 두향 무덤에 지어 바친 시(杜香墓詩)입니다. 그외에도 양명학의 대가로 출사하지 않은 선비 이광려(李匡呂)도 '외로운 무덤 관도에 곁에 있네(孤墳臨官道)...' 라고 읊었구요.
물러나 鄕里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
선생은 출사한 후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하지만, 조광조와는 달리 성리학을 정치에 적용하기 보다는 순수한 학문으로 탐구하는 쪽을 택합니다. 중종 말년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벗인 하서 김인후가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자신도 낙향을 결심합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몸이 병약하다는 핑계로 모든 관직에서 사퇴하고, 46세 때(명종 원년,1546년)에는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로 내려가 독서하며 은거생활에 들어가지요.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로 개칭하고 본인의 호로 정했다고 하네요. 그러나 명종의 부름을 마냥 거절할 수 없어 48세에 단양 군주로 일년간 봉직하고 다음 해에 이웃 풍기 군수를 끝으로 온전히 향리로 퇴거합니다(50회 이상 퇴직 상소하셨다니..). 이후 전임 군수 주세붕(朱世鵬)이 세운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리모델링하고 임금으로 부터 현판(賜額)을 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영남 제일의 사학으로 키웁니다. 물론 성리학의 심오한 이론도 완성하구요.
<성리학의 계보>
우리나라 성리학의 큰 물줄기는 고려시대 안향으로 부터 발원하여 이재현과 이색을 거쳐 정몽주로 이어집니다. 조선조에는 김종직, 김굉필 등을 거쳐 조광조에 이르지만 성리학의 정치적인 적용에 실패하여 잠시 멈칫하지요. 그러나 거유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등장으로 宋나라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큰 족적을 남기며 수출국(?)인 중국을 놀라게 하고 일본에도 학명을 크게 떨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