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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 (동작구)
명 칭 : 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72.05.25
소 재 지 : 서울 동작구 본동 10-30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동작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동작구 문화공보과 02-820-1261
정조(재위 1776∼1800)가
그의 부친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 화산의 현륭원을 찾을 때 잠시 쉬던 정자이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현륭원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한강에 배다리를 임시로 만들어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정조 13년(1789)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주정소라 불리기도 하였다. 지을 당시에는 정문과 누정 등 2∼3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의 정자만 남아있다.
용양 봉저정은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으로 퇴칸을 둔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바로옆에 건물의 주춧돌이 남아있다.
●용양봉저정[ 龍驤鳳翥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면 6칸, 측면 2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에 툇간을 두었고, 사방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오량구조, 겹처마집으로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현재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작은 언덕에 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양봉저정 [龍驤鳳翥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용양봉저정[ 龍驤鳳翥亭 ]-두산백과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1789년(정조 13) 이후에 지은 누정으로 추정된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초익공계(初翼工系) 양식인 정자 한 동(棟)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정문과 누정 등 2∼3채의 건물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툇간을 설치하였으며 사방에는 띠살 분합문을 단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겹처마집이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아버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여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경기 화성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참배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정조가 현륭원으로 거둥할 때마다 노들강(한강)을 건넜는데, 당시에는 배다리를 놓고 한강 나루를 건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러 쉬게 하려고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 정자에 쉬면서 점심을 먹었으므로 이곳을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양봉저정 (두산백과)
■ 효사정(孝思亭)
-소 재 지 : 동작구 흑석동 141-2번지(효사정공원)
효사정(孝思亭)은 세종조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대감(盧閈大監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 노한대감의 자는 유린(有隣)이며,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노한대감이 모친을 여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자리)에 정자를 짓고 북쪽 개성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바라보며 추모했던 곳이다. 당시 동서지간이던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孝思亭’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정자는 효사정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 정인지(鄭麟趾)·서거정(徐居正)등의 시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참고 하였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부득이 이 자리를 선정하여 신축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46.98㎡, 약 14평) 5량 집 구조와 검소한 민도리가구 구조의 팔작지붕에 온돌방 1칸을 겸한 정자형식으로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효사정의 유래는 조선 세종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이 어머니께서 돌아가신후 시묘살이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개성에 묘를 쓴 아버님을 그리워 했다는 데서 찾아봅니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그와 동서지간이었던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붙였고, 그의 아들 강희맹(姜希孟)의 효사정기(孝思亭記)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고,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인들인 정인지(鄭麟趾),서거정(徐居正),신숙주(申叔舟),김수온(金守溫)등도 효사정에 관련한 시와 글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에 신축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을 찾아 원위치 부근에 정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효사정은 넓이 46.98㎡의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온돌방 1칸을 들인 건물이며,서울 우수경관 조망명소로 지정되어 한강과 서울의 경관을 돌아보기 좋고, 효에 대해서도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는 곳입니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은 사람은 집에 못 간다.
<대인은 대인을 알아본다. 천재 실학자 정약용 한눈에 알아 본 성군 정조대왕>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영조의 뒤를 위어 왕이 됩니다.
왕이 되고 나서도 사도세자를 죽인 전범들이자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노론에게 끊임없이 암살위협을 받습니다.
실제로 정조가 홀로 책을 보고 있을때 자객 3명이 들이닥친적도 있었는데, 이런 때를 대비해 일찍이 무예를 출중히 닦아둔 정조께서 홀몸으로 자객들을 모두 베어버린 사건도 있었지요.
마침 내시들도 호위무관들을 살펴보러 자리를 비운 시간이였다고 합니다만,
이미 대비를 비롯한 궁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는 노론이 자신을 죽이려는 마당에
정조는 내시도 호위무관들도 궁녀들도 모두 자신의 암살에 개입했을거란걸
어렴풋 알고 있었겠지요.
정조는 늘 새벽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잠들었다고 하는데요
처마위에 내려앉는 자객의 발자국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시달렸을지....알만하죠 ㅜ.ㅜ)
그 축적된 독서량 덕분인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책을 편찬한 왕은 정조입니다...
보통 세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정조는 어의도 믿을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 몸은 스스로 치료하고자 의학까지 익혔습니다.
그래서 진단과 처방까지 스스로 내렸다고 하고, 때로 어의가 잘못된 탕약을
지어오면 꾸짖을 정도로 의학에도 수준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783년.
세자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증광감시에 합격한 이들의 연회를 위해 어전으로 합격자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여 막 성균관 유생이 된 22살의 정약용과 32살의 정조는 이날 선정전에서 처음 만납니다.
정약용을 처음 본 정조는 얼굴을 들으라고 말하며 네 나이가 몇이냐고 묻습니다.
사실 조선시대 국왕이
대과에 급제한 신하도 아닌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미관의 청년에게
자신의 용안을 보여 주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과거 선조 재위시
이항복이 대과에 합격, 조정의 조회에 참여했을 때
그 특유의 궁금증으로 국왕의 얼굴을 보고 싶어 살짝 얼굴을 들여
쳐다 보다 들켜 유배를 간 사실을 보면
국왕의 얼굴을 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였지요.
그런 상황에서 정조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며
나이를 물은 것은 무언인가 인연이 있음을 감지했을지도요
정약용은 “임오생이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임오생은 1762년.
바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해였습니다.
그 해를 잊을리 없는 정조에게 정약용은 잠시스침이라도 또렷한 기억이 되었겠죠.
(실제로 사도세자가 5월 말 뒤주에서 죽고,
이십여일 지난 6월 16일 정약용이 태어납니다.
마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사도세자가 하늘에서 내린 인연같지요..)
정조와 정약용의 인연은 성균관 교육에서 더 크게 빛을 봅니다.
성균관 유생들을 엄격히 교육시킨 정조는 자주 어려운 시험을 치루게 했는데,
어느날은 '중용'을 읽고 의문이 나는 점 70가지를 뽑아 이를 논문화 하라는 과제를 내립니다.
(전하...너무하십니다 70개씩이나.)
이때 정약용이 쓴 글이 정조의 생각과 기가 막힐정도로 일치합니다.
그걸 잠깐 설명하자면..
정조는 중용과 관련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학설 모두를 인정하고 공부했는데 사실상 이 문제와 관련해선 율곡 이이의 학설이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글을 쓴 것이지요.
이게 참 대단한게,
정약용이 단순히 정조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그가 바로 남인출신인데도 이같은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남인은 대대로 퇴계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집단이었기에
어떠한 일에 있어도 율곡의 학설을 인용하거나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당쟁의 가장 큰 문제였지요.하지만 정약용은 오랫동안의 폐단을 극복하고
사상의 자유로움을 통해 반대당의 정신적 기둥인 율곡의 학설을 지지하고 인용한 것입니다.
이 일은 진정 국왕 정조가 추구하는 탕평정치와 정확히 일치했고,
정약용이 얼마나 깊은 사고와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계기였지요.
또 그 사상뿐만이 아니라 글솜씨도 다른 유생들은 난잡한데에 비해 정약용의 글은 흠잡을데가 없었다고 해요.
이때부터 정조의 본격적인 총애와 훈육이 시작됩니다.
성균관에서 보는 크고 작은 시험에서.거의 늘 정약용이 1등을 합니다.
그때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글이나 사상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때로는 초시에서는 합격시키고 본시험에서는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실력부족이 아니라 정약용을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담금질 이라고 할까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임금이 다산의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고 무릎을 치며 칭찬하기를
‘네가 지은 것이 사실은 장원보다 못지않으나,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물러나오니, 승지 홍인호(洪仁浩 : 다산의 6촌 처남)가
‘아무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다’
라는 임금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사암연보> 中
시험에서 1등을 한 이에게는 질 좋은 종이나 귀한 책을 한권씩 선물로 내렸는데
정약용은 그런식으로 한권한권 팔자백선 대전통편 국조보감 병학통까지 전부 받아 공부하게 되죠.
국조보감을 받던 해에는 정조가 흰 종이 100필을 함께 하사하는데, 특이한 명이
궁궐문 앞까지는 스스로 안고가고, 궁궐문 밖에 당도해서야 나졸들을 시켜 들어주도록 하죠.
그래서 정약용은 상으로 받은종이 백필을 껴안고-궐안을 걷게되고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겠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은연중 정약용을 뛰어난 자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정조는 그걸 의도한거지요.
(요새말로 언론플레이라고 할까 ㅋㅋ궁궐내에 정약용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도록 정조는 정약용을 자연스럽게 칭찬합니다. 정약용을 관직에 나오면 높이 쓰려고 하는것이지요.).
성균관에서는 매번 1등을 하는 정약용이였지만 대과시험에서는 번번히 낙방합니다.
그가 남인이기 때문이지요. 보다못한 정조가 감독관은 남인출신 채제공으로 지시하고 특별과거를 열고 정약용은 그 시험에서 장원을 합니다.
정조는 과거에 급제한지 6개월밖에 안된 정약용게 영의정에게나 맡길 큰 임무를 지시합니다.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으로 모시는데 한강을 편안하게 건너갈 배다리를 설계하는 일이었습니다.
임무도 막중하지만 정조가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생각하면..
이 일은 정말 자신이 심적으로도 믿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겠지요.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을겁니다.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신뢰가 있었고. 정약용은 이 일을 완벽하게 해내죠.
- 아버지(사도세자)를 돌아가게 한 정적들에게 내가 조선의 왕이다 라는걸 각인시키는 대규모운행행렬-
3년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돌아가십니다.
정약용은 관직에서 물러나 시묘살이를 하러 고향에 내려가지요.
그리고 그해 겨울 정조가 사람을 하나 보냅니다..
바로 수원 화성을 설계하라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지요
.
조선시대에는 부모사망으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면,
그 동안은 절대 출사할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도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대신에게 어떤 일도 내리지 않았지요.
그 관례를 깨고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건립에 대한 설계 지시를 내립니다.
화성을 짓는데 정약용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였지요.
수원화성은
곧 정조와 정약용이 앞으로 꽃피울 기반의 시작이였으니까요.
(이날을 기다렸다.. 앞으로 시작이다. 같은..)
정조의 가르침으로 커온 정약용은
그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수원화성설계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거중기를 발명하고
덕분에 처음 정조가 구상한 10년에서 무려 8년을 앞당겨 2년만에 완공합니다.
그 설계가 너무나 과학적이고 아름다워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됩니다.
<우리성상께서는 평소에 뜻이 공손하고 검소하셔서 말달리며 사냥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여색이나 진귀한 물건도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
환관과 궁첩에게도 사사로운 정을 주지 않으시면서 오직 신하들 중에 문학과 경술이 있는 자만을 좋아하여 그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 즐기신다.
비록 사죽금석 같은 온갖 악기를 벌려 놓고 번갈아 연주하게 하면서 노닌 적은 없으나, 음식을 내려주고 온화한 낯빛으로 친한 이를 대하는 것이 마치 집안 사람들이나 부자사이와 같았으며, 엄하고 딱딱한 낯빛을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털어놓지 않는 바가 없어서, 민생의 질고와 여항의 감춰지고 답답한 사정을 모두 들을 수 잇엇으며, 경을 말하고 시를 이야기하는 자들도
의구심이 없이 질정을 변석하는데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책에서 정조의 성격에 대해 언급한 부분입니다.
정조는 나라와 관리의 모범이 되야 된다 하여 반찬도 다섯첩 이상은 자제하게 하였고 옷도 기워입을정도로 검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약용도 마찬가지지요. 임금을 도와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위해 관직에 나아갈 꿈을 품은 정약용이지만 막상 그를 아낀 정조가 큰 벼슬을 제시하면 형평에 어긋난다며
늘 마다하곤 했습니다.
(정조가 아무리 들이 밀어도 큰 자리 안갖겠다고 반항하느라 잠수도 타서 정조를 애태우고.. 뭐..그럽니다;;)
정약용은 백성을 잘 살게하고 농업, 상업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실용주의를 추구했고
어느 당쟁에도 휘말리지 않으며 정조의 개혁을 도왔습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맡긴 임무들은 그 범위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특히나 비밀스러운 업무는 거의 대부분 정약용에게 맡깁니다.
제대로 믿을수 있는 손발역할을 해준 것이지요.
정조와 정약용만큼 다양한 분야에 전문가적 지식을 갖춘 임금과 신하는 없을것입니다.
어느 하나만 뛰어난게 아니라 둘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였죠..
<정조와 정약용의 한자 내기>
정조가 먼저 "말이 마치(馬齒 : 말의 이빨)하나 둘이리"라고 농을 걸었다.
대구를 하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즉각 "닭의 깃이 게우(鷄羽 : 닭의 깃)열다섯이오"라고 응했다.
정조는 숨 돌릴 틈도 주지않고 "보리뿌리 맥근(麥根)맥근" 이라고 다시 문제를 던졌고,
정약용은 "오동열매 동실(桐實)동실"이라고 응수했다.
정조가 다시 "아침까치 조작(朝鵲)조작"이라고 던지자
정약용은 "낮 송아지 오독(午犢)오독"이라고 받았다.
이런 대거리가 끝나면 서로 마주보고 웃는 수밖에 없었다.
또 어느날, 정조와 정약용은 3개자가 1개자로 합성한 한자 쓰기 내기를 하였다.
晶(밝을 정), 姦(간사할 간), 森(나무 빽빽할 삼), 磊(돌 무더기 뢰), 묘(물 아득할 묘.水子3개)
등을 쓰는 내기였다.
"전하께서 한 자만은 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 옵니다"
"자전에 있는 모든자를 다 암기 하는데 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란 말이 왠말이냐?"
"그래도 한자만은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둘이 각자 쓴것을 교환 했더니 과연 정조가 한 자 부족했다.三(석삼)자를 빼놓은 것이었다.
군신(君臣)은 서로 무릎을 치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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