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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문학의식 소설 동인회> 2014년도 작품집에 게재한 최신작입니다.
각각 20매 이내의 초단편 4편을 묶어서, 이를테면 음악의 경우 "조곡(suite)"처럼,
하나의 주제를 가진 작품이 되도록 엮어본 실험작입니다. >>
<초단편묶음>
행운의 비
곽명규
1. 행운의 비 The Fortune Rain
작은 빗방울 한 개가 이마 위에 살짝 내려앉더니 몇 걸음 뒤에 또 두어 개가 뺨 위에 떨어졌다. 거리는 한적했고, 주변에는 비가 내릴 때 몸을 가릴 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빗방울이라면 종일 맞아도 옷이 젖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때때로 콧노래도 부르고 휘파람도 불며 한가롭게 걸어갔다. 이따금 다른 사람들이 등 뒤에서 나타나 내 옆을 지나갔다.
공원이 있기에 그리로 들어갔다. 꽃밭 안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데서 신사복 정장을 한 남자가 행복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가 찍어 드릴까요?”
“아니요. 우리끼리 찍을게요.”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자 건너편에 학교 교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초대받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 창밖으로 책 읽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뛰어와 나를 잠깐 에워싸더니 호각소리와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처음 걷던 그 길은 아니었지만, 방향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주변에 걷는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져 갔다.
어느 모퉁이를 돌자 길 건너 멀지 않은 곳에 큰 궁궐이 보였다. 그곳이 내 목적지였다.
먼저 온 사람들이 대문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잠자코 순서를 기다렸고, 어떤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며 만날 사람을 기다렸다. 그 동안에 빗방울이 약간 굵어져 있었다. 제복을 입은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되나보죠?”
“네. 하지만, 표가 있는 사람은 바로 들어갈 수 있어요.”
“표가 없는데요.”
“그럼 줄을 서서 표를 사셔야 되구요.”
“아아.”
나는 다시 줄선 사람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사이에도 줄은 조금씩 더 길어지고 있었다.
“아직 매표소가 안 열려서, 좀 기다리셔야 될 거예요.”
그가 미안해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한 시간 쯤은 있어야 열릴 거예요.”
“아아.”
나는 시간을 보려고 소매를 쳐들었다.
“어어?”
손목에 시계가 없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지갑도 없다는 것이 동시에 깨달아졌다.
“어떡하지?”
나는 쳐들었던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줄서기가 힘드시면, 안쪽에 들어와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그는 친절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나는 형식적으로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한 번씩 건드려보았다. 물론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무얼 잃어버리셨군요?”
“지갑을... 안 갖고 나왔네요.”
뒤쪽으로 갈수록 말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왔다는 것도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도록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더 부끄러웠다.
“지하철을 탔더라면 바로 알았을 텐데...”
“차를 몰고 오셨군요. 그럼 모르실 수 있지요.”
“아니에요. 시간도 많고 해서 천천히 걸어왔는데... 두 시간 동안 지갑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으니, 참...”
그렇게 말하면서 마음은 더 답답해져 갔다. 궁궐에 못 들어가게 된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 먼 길을 다시 걸어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지요. 돌아가야지.”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빗방울이 이제는 우산을 써야 할 만큼까지 굵어져 있었다.
“우산도 없으시군요.”
그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에. 아까는 날이 좋았더래서...”
나는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제가 돈을 빌려 드릴까요?”
제복 입은 사람이 말했다. 귀가 번쩍 뜨이면서 눈길이 얼른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
나는 그가 내미는 돈을 받으려다 말고 동작을 멈추었다. 동전으로는 입장권을 살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 쪽으로 눈길이 되돌아갔다.
“표를 사실 돈까지는 저한테 없구요...”
그는 미안함이 담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체념의 감탄사를 흘렸다. 빗속에 두 시간을걷는 것만 면해도 다행이기는 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돌려드리지요?”
“이따가 다시 와서 갚으시면 되지요.”
“이따가요?”
“지금 집에 가시면, 지갑을 갖고 다시 오실 거 아닌가요? 시간이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팔소매를 열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아, 그렇군. 삼십 분이면 집에 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 궁궐을 떠났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역까지 걷는 동안 옷이 좀 젖기는 했지만 마음은 날개가 달린 듯 가벼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말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지갑과 우산을 가지고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탔다.
심할 때는 좍좍 쏟아 붓기까지 하던 비가 궁궐에 도착할 무렵에는 완전히 그쳤다. 줄을 섰던 사람들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모두 궁궐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표를 사서 곧장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오셨군요!”
제복 입은 사람이 다가오며 반갑게 말을 건넸다.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나는 얼른 동전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여기 계시던 분들은 비 때문에 고생들을 많이 하셨지요.”
나를 위로하려고 일부러 하는 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갑자기 행복한 기분이 되어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궁궐의 야외 연주는 한 마디로 환상적이었다.
부드러운 바람결에 끊임없이 귓가를 스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음악소리.
차츰차츰 넘어가는 저녁 해의 긴 그림자 속에서 조금씩 지워져가는 사람들의 얼굴.
마침내 은은한 어둠에 덮이며 머나먼 옛날의 시간 밑으로 가라앉는 궁궐의 윤곽.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가고 있는 모든 것들의 마지막 자태가 조금도 애처롭지 않고 오히려 감미롭게 느껴져 왔다.
풀잎에는 아직도 물끼가 조금 남아 있었다. 간혹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한 두 개씩 떨어져 내렸다. 낮에 내린 비가 뿌려놓은 행운의 씨앗들이 내 몸 안에서 작은 잎새들을 만들어내려고 꿈틀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 하늘의 뜻 Will of God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어...
-...아무개 씨? ...맞죠?
-맞아요. 안녕하셨어요?
-와아, 정말 오랜 만이네요! 반가워요!
-...하도 오래 돼서... 누군지 모르실까봐 걱정했는데...
-모르다니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이 목소리를?
-고맙습니다. 전화하길 잘 했나봐요.
-네, 아주 잘 했어요! ...언제 왔어요? 오늘?
-아니요...
-오래 됐군요?!
-네.
-아아. ...그래도 한참 더 있을 거죠? 얼마나?
-...그게...
-얼마 못 있을 거라구요?
-네, ...아니요! 저어...
-금방 떠나는 건 아니겠죠?
-미안해요. 전화가 너무 늦었어요.
-너무 늦다니요? 언제 떠나길래? 설마, ...오늘 떠나요?
-네에.
-아아니! ...왜 더 일찍 전화를 안 했어요?
-...이렇게 빨리 날이 갈 줄 몰랐어요.
-바빴군요.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지도 않았는데... 그냥, 망설이다 보니까... 우습죠?
-우스운 게 아니라, ...아쉽죠, 너무! ...얼마 만인데...
-네. 아쉬워요. 아니, 야속해요, 세월이 빠르다는 게...
-...하지만, ...그 야속한 세월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네에? 고맙다고요?
-네. 세월이 빠르기에 벌써 오늘 떠날 날이 된 거니까요.
-네에? 빨리 떠나게 돼서 좋다구요?
-아니요. 세월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면, 아직도 떠날 날이 안 됐을 테고, 그럼 아직도 전화를 안 걸었을 거 아니냐는 말이죠.
-아아! 떠날 날이 아직 안 됐다면 전화도 아직 안 걸었을 거라고요... 그렇긴 해요.
-그렇죠? 떠나면서 거는 전화라도 이렇게 받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전화 정말 잘 했어요.
-...그럼 이젠 늦게 전화했다고 나무라지는 않으시는 거죠?
-나무라다니요? 하나도 안 늦게, 딱 알맞게 걸었는데요!
-안 늦은 건 아니죠. 이렇게 떠날 시간에 쫓기며 허덕이고 있는데요?
-아녜요. 만일 더 일찍 전화를 했다면, 그래서 시간 여유가 많았다면 어땠을지 알 수 없어요.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얘기도 많이 하고...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좋지 않았겠어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이 아니었다면, 지금 만큼 반갑지는 않았을지도 알 수 없죠.
-그럼 마지막까지 망설인 게 오히려 잘 한 거네요. 왜 망설였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왠지도 모르면서 망설였다는 말이에요?
-네. 까닭도 없이, 그냥 망설이기만 했다구요.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면 왜 망설여졌을까요?
-글쎄요. 전화를 걸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망설이게 된 것 아닐까요?
-아니죠. 끝내 전화를 걸었다는 건, 걸어야 할 까닭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뜻이죠. 다만, 망설인 까닭만이 애매할 뿐.
-전화를 걸어야 할 까닭이 있었다면, 망설인 것도 어쩌면 같은 까닭일지 모르겠네요. 그게 무언지만 모를 뿐.
-까닭도 모르는 채로 기어이 해버리는 일이라면, 그건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전화를 못 걸고 망설였던 것도 하늘의 뜻으로 돌려야겠군요.
-그래야죠. 망설인 것도, 전화를 건 것도, 모두 다 하늘의 뜻이었다고요.
-하지만, 기껏 전화를 걸거나 망설이는 하찮은 일에까지 하늘이 무엇 때문에 뜻을 담아 주실까요?
-하늘이 보시기에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겠지요.
-중요한 일요? 무슨 중요한 일요?
-이를테면,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일이라든지...
-네에?
-밝힐 일이 있을 때는 꼭 그걸 밝히려는 게 하늘의 뜻일 테니까요.
-그럼, 밝힐 만한 일이 나한테 있다는 말이네요? 그게 무얼까요? 나 자신도 모르고 있는 진실이!
-하늘은 알고 있겠지요.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겠지요.
-하늘이 너무 짓궂으시군요?
-어째서요?
-그 동안은 매일 망설이게 하다가 마지막 날에야 겨우 전화를 걸게 하고, 그리고는 부랴부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진실을 밝히라고 하시니 안 짓궂으세요? 더구나 그렇게 하고 난 뒤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말예요.
-하늘이 바라시는 대로 하면 좋은 보답이 있겠죠.
-하늘이 개인적인 작은 일에까지 정말 관심을 가져주실까요?
-개인적이고 작은 일이라도, 진실이라면 귀중한 거니까요. ...그냥 하늘을 믿고, 말을 해 버리세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하늘이 듣고 싶어 하실 말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세요. ...지금 막 떠오른 생각... 바로 그걸 말하면 될 거예요.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 말을 외쳐보세요. 좋은 일이 뒤따를 거예요.
-알았어요. 그럼,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얼굴을 쳐들고.... 이젠 말을 할 차례네요. “사랑합니다--!” ...들으셨을까요?
-들으셨어요. 나도 들었는 걸요.
-그럼 이제 할 일은 다 했고, 떠날 시간도 됐으니, 그만 떠나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떠나지 마세요.
-네? 왜요? 더 할 말도 없는데요. ...아아, 하늘에서 답이 내려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요?
-답은 벌써 왔어요. 방금 들었잖아요?
-네? 무슨 답요? 못 들었는데...
-방금 들었죠. 나도 들었는데요.
-...아아, 떠나지 말라던 말요?
-네. 그 말요.
-그건 하늘의 답이 아니라...
-아니에요. 그게 하늘의 답이었어요. 나더러 대신 말하라고 시키신 거예요.
-아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요?
-그냥, 답을 받은 대로, ...떠나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하늘의 뜻대로 되는 거겠지요.
-하늘의 뜻이 무얼까요? 무엇 때문에 떠나지 말라는 답을 주신 걸까요?
-그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3. 스펠바운드 Spellbound
-오늘이 보름인가요? 밖에 달이 굉장히 밝은 것 같아요. ...그렇죠, 여보?
-글쎄 오늘이 몇일인가? 하여간 달이 정말 밝은가본데? 실내가 이렇게 밝은데도 커튼이 저렇게 훤한 걸 보면 말이야. 전등을 꺼도 괜찮겠어.
-오늘 보름날 맞아요. ...하지만 보름달이라고 언제나 저렇게 밝은 건 아니지요. 오늘은 워낙 맑은 날이라서 그런 거지만.
-맞습니다. 오늘, 날이 굉장히 맑았었지요. 그래서 달이 저렇게 밝은가봐요.
-여보게. 집사람 말은, 보름날에 하늘마저 맑아서가 아니라, 오늘이 내 생일이어서 특별히 밝은 달이 뜬 거라는 얘기지.
-오늘이 생일이세요? 정말?
-네, 생일이긴 생일이에요.
-그럼 오늘 이 모임이 진짜 환갑잔치셨네요.
-그런 셈이지요.
-아니 이 사람, 진작 말을 하지 않구. 그랬으면 아까 사회자한테 얘기해서 다 같이 축하도 해 주고 좋았을 텐데. ...잔치도 다 끝나고 다들 방에 들어갈 때가 돼서야 그 얘기를 하면 어떡하나?
-맞아요. 미리 알았으면 주최측에서 큰 생일 케익도 준비했을 텐데요.
-이 양반은 생일 케익을 안 좋아하세요.
-왜요? 나는 생일 케익이 언제나 제일 맛있던데?
-우리나 그렇지요. 남자분들은 별로 안 좋아하시데요.
-맞습니다. 저도 별로 안 좋아해요. 집사람이 좋아하는 바람에 매번 억지로 먹을 뿐이지요.
-그래도 생일 축하 노래는 좋아하시면서?
-노래야 좋지. ...안 그런가?
-노래야 다 좋지. 맞아.
-그럼 생일 노래라도 불러 드립시다. ...안 그래요, 여보?
-그럽시다. 그렇게라도 축하는 해야지.
-그건 좋아요. ...노래는 좋아하시니까.
-잠깐! 그럼, 내가 답례로 와인을 한 잔 준비할 테니, 잠깐들 기다리세요. ...웨이터님, 여기 와인 한 병 주세요.
-네에! 어떤 와인을 드릴까요? 여기 리스트가 있는데요.
-이거요! 맨 첫줄에 있는 걸로 주세요.
-자넨 와인을 참 빨리도 고르네, 까다로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까다롭게 고르는 게 꼭 잘 고르는 건 아니지.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건 와인이 아니라 연애 얘기 아닌가? 자네의 연애담 같은데? ...맞지요, 아주머니?
-맞기는요? 이 양반은 첫눈에 누구한테 반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건 알 수 없죠!. 그렇게 보이셨는지는 모르지만, 또 그렇게 말씀해 오셨는지도 모르지만, 속마음은 안 그럴지도 모르죠.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이 친구, 그냥 아무렇게나 첫줄에 있는 와인을 가져오란 건 아닐 거야. 아마 전에 마셔 본 와인이었을 게 틀림없다구.
-아니, 정말 처음 보는 와인이었다네. ...그냥 이름에 끌렸던 것 뿐이야.
-그것 보세요. 첫눈에 끌리기도 하시잖아요, 저렇게?
-와인 주문하신 것 가져왔습니다. 이 와인 맞지요? 그럼, 병을 따겠습니다. ...어느 분이 테이스팅을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냥 따라만 주세요. 어차피 내 책임이니까.
-저것 봐. 잘 아는 와인인 거야. 병을 딸 때 벌써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거라구. ...어디, 무슨 와인인가, 레이블을 좀 보세. ...스펠바운드? 나는 처음 보는 이름인데...?
-처음인 건 나도 마찬가지라니까. ...색깔로 봐서는 아마 까베르네 소비뇽 종류일 것 같고... 이름은... 마법에 걸렸다는 뜻이 아닐까 싶은데...
-마법요? 와인이 마법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마법에 걸렸다고 할 만큼 맛좋은 와인이라는 거겠죠, 뭐.
-아아, 보름달의 마법이에요! 이 로고를 보세요. 보름달 그림이 그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 보름달은 절반이 구름에 가렸네요. 구름도 왠지 시꺼멓게 보이고...
-보름달이 마법에 걸려서 시꺼멓게 타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보름달의 마법이 아니라, 마법에 걸린 보름달이네요!
-마법에 반쯤 걸린 보름달! 그러네요. 이 와인을 마시면서 생일 파티를 하면 우리도 반쯤은 마법에 걸리겠어요. 재미있네요.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마법에 걸린 이 시간을 축하하면서, 다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이젠 노래가 끝났으니, 잔을 부딪쳐요. 짜잔!
-사실은 오늘이 내 생일일 뿐 아니라, 우리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답니다. ...내가 결혼 날짜를 일부러 그렇게 정했었죠. 이 사람 집에서 우리 결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오히려 무어든지 다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거든요.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우리 집에서 심하게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승낙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었어요.
-부모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없으셨군요, ...아시겠지만, 이 친구가 우리 동창들한테는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거든요, 그 때.
-그건 저도 알고 있었죠. 그래서 끝까지 버텼던 거구요. ...잘 했지요? 안 그랬으면 이 양반은 아마 아직껏 총각 신세를 못 면했을 거예요.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아무리 부군께서 항상 떠받들어 주신다기로... 이건 설화예요, 설화!
-아닙니다. 이 사람 말이 맞아요. 옛날부터 내가 늘 해 오던 말이거든요. 정말이지,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누구하고 결혼할 수 있었겠어요, 이 바보가?
-자네가 바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네. 아무리 그저 겸손으로 하는 말일지라도 말이야.
-아니,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라네. ...아들바보, 딸바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아아, 한 여자한테만 완전히 꽂힌 바보! 마누라바보! ...정말 훌륭한 남자의 표상이지요. 사랑의 도를 깨달은 도사라고 할까. 도사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스스로 바보라고 부르더라구요. ...그런 바보하고 사시니, 얼마나 좋으세요?
-이 사람이 과연 좋은 줄을 알기나 할까 모르겠네요. 하하하.
-만일 그걸 모른다면, 함께 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요. ...안 그래요, 여보?
-모르실 리가 있나, 사실이라면?
-사실 나는 잘 몰라요. 물론, 나한테 꽂혀서 바보가 됐다는 말이야 사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정말 좋기는 좋은 걸까요?
-아아,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여자한테? 끝없이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을 받는 게 그렇게도 중요한 걸까? 당신은 이 세상의 별별 일들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을 받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다는 말을 저는 지지해요. 사랑 말고도 사람의 목숨을 내놓게 할 만큼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잖아요, 이 세상엔?
-하지만, 목숨을 내놓게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또 목숨만이 어떤 일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최고의 기준이라고 할 수도 없고.
-흠...
-그래요. 목숨을 걸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여전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나처럼 누구나 사랑받기만 원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랑을 받기보다 주려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그것도 중요한 일이죠. 주는 사랑이 있어야만, 받는 사랑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우리집 양반이 그런 분이지요. 주는 사랑 밖에 모르는 사람! 아마 스스로 바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내 생각엔, 사랑은 주느냐 받느냐보다, 그것이 정말 있느냐가 더 중요한 포인트일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야만,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 참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사랑이 정말 있느냐... 무엇이 사랑의 실체이며, 무엇이 사랑의 증거냐...
-그거야 간단하죠. 느낌이 있으면 실체가 있는 거예요.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해요?
-동감이에요. 사랑 자체를 자꾸만 파헤치고 조건을 붙여 나간다면 사랑이 있을 자리는 없게 되지요. 사랑을 주면서 느끼든, 받으면서 느끼든, 사랑의 느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체적 사랑의 증거이다! 이것을 나는 오늘 토론의 결론으로 삼겠습니다.
-좋은 결론이세요.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겹친 보름날 밤에 딱 어울리는 결론이고요. ...다시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이 몇 시죠? 벌써 보름달이 지고 하루가 끝났나봐요. 창밖이 많이 어두워진 것 같은데요?
-아니, 아직은 달이 떠 있을 시간인데... 아마 날이 갑자기 흐려졌나봐. 그믐밤처럼, 커튼에 비치던 달빛이 없어져 버렸네?
-웬일이죠? 한번 알아봐야겠어요. ...웨이터님, 아까는 분명히 큰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날이 갑자기 흐려졌나요?
-아닙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요, 보름달도 그대로 떠 있는데요. 다만 지금 월식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월식요? 오늘이 월식날이라고요?
-월식이라는 건, 해가 달을 가로막는 거죠?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과학적으로는, 우리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서 달이 잠깐 안 보이게 되는 현상이지만, 그게 그거지요.
-그럼 달빛은 다시 돌아오겠죠? 기다리고 있으면?
-그렇죠. 하지만,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죠. 금방 돌아올지...
-보름날의 월식은 드문 일이랍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요.
-그럼 우리 얼른 테라스에 나가서 구경을 하는 게 어떻겠어요?
-그럽시다. 우리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서 없어진 보름달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러 나갑시다.
-그래요. 우리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름달에게 어떻게 마법을 거는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4. 버튼이 있는 방 A Room with Buttons
작은 침대 하나 뿐인 골방의 창턱에 낡은 라디오 하나가 놓여있다. 작곡자를 알 수 없는 현대음악이 흘러나와, 먹어 본 적 없는 음식의 냄새처럼 흥미롭게 온 몸으로 스며든다.
라디오는 이 방송 저 방송 저 혼자 찾아다니며 별별 음악을 다 찾아 자동으로 틀어 주고 있다. 내가 그렇게 프로그램을 깔아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창가에 모로 누워서 얕은 잠을 자고 있다. 적외선 치료기처럼 따뜻한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며, 감겨진 눈꺼풀 속을 온통 빨간 햇빛으로 채우고 있다.
나는 스르르 일어나 안 쪽 벽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한쪽 손으로 버튼 L을 더듬어 찾는다. 눈앞이 희미해 조금 시간이 걸린다.
버튼 L이 눌러지자 머리 위에서 계집애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이 비 시 디 이 에프 지
목소리는 처음에는 글을 읽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곧 노래 소리로 바뀐다.
에이비시 노래가 끝나면서 소리 없이 벽이 열린다.
나는 뱀처럼 느리게 벽속으로 들어선다. 책이 꽉 찬 선반으로 둘러쳐져 있는 서재 같은 방이다. 나는 한가롭게 그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책들을 훑어본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에이비시 노래가 반복된다. 노래는 피아노 소리로 바뀌었다가 또 다시 계집애들의 목소리로 바뀐다.
반짝 반짝 작은 별, 밤하늘을 비추네
그 노래를 따라 불러 본다. 노래는 끝부분에서 영어로 바뀐다.
튕클 튕클 리틀 스타, 하우 아이 원더 웟 쥬아
두꺼운 책 하나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나는 그 책을 꺼내 들고 페이지를 넘겨본다. 갈피마다 지폐가 끼워져 있다. 문득 삶이 햇빛처럼 밝아지고 구름처럼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책을 닫아 책꽂이에 꼽아 넣으며, 슬그머니 그 방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진다.
L의 불이 꺼지면서 서재의 문이 닫힌다. 나는 그 아래 있는 M의 버튼을 누른다. 머리 위에서 또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벽이 열리고 나는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방 한 가운데에 피아노가 있고 구석에는 오래 된 턴테이블과 LP판들이 놓여있다.
나는 창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악보 책을 집어 들고 한 장씩 넘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페이지의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천장에서 내려다보며 연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는 <음악에게>의 페이지에서 멈추어, 저 혼자 건반이 움직이고 있는 피아노의 자동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난 뒤에 다시 책장을 넘기며 M으로 시작되는 제목의 노래들을 골라서 부른다.
만도린. 한 여름 밤의 사랑, 달빛, 달과 바다...
불현듯 밤의 바다를 향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나는 음악실을 뛰쳐나와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S의 버튼을 마구 눌러댄다.
S S S S S S
파도소리와 함께 물새의 울음소리를 실은 바닷바람이 천장으로부터 얼굴위로 쏟아져 내린다.
나는 S의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펼친 나선형 같은 S자의 돌계단이 깔려 있다. 나는 옷을 하나씩 벗어던져 점점 알몸이 되어가며 하얀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끝이 바닷물에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달빛에 내 몸은 대리석처럼 희고, 물은 검푸른 한밤의 빛깔로 팔을 벌린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가 되어 아늑한 바다 위에 드러눕는다.
하늘에서 작은 별들이 반짝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만도린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초록색 별빛을 온몸에 바르며 잠속에 빠진다. 바닷물이 발바닥을 살랑살랑 간질인다.
나는 문득 목이 마름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 일어선다. 벌거벗은 몸에서 초록빛 비늘 같은 별빛이 뚝뚝 떨어지며 부서진다.
하얀 가운으로 몸을 가리고 방으로 돌아와 벽 한 가운데 있는 버튼 C를 누른다.
커피 칸타타의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초콜릿 칼라로 치장된 카페의 실내가 들여다보인다. 칙칙 소리를 내며 주전자가 끓고 있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아직 누르지 않은 버튼들을 훑어본다.
V, I, B, G, Y, O, R.
일곱 개의 버튼이 더 남아 있다.
햇빛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는 듯 눈이 몹시 부시다. 손등으로 눈꺼풀을 눌러 본다. 눈 속의 하늘이 어두운 보랏빛으로 보인다.
보, 남, 파, 초, 노, 주, 빨.
눈을 조금씩 가볍게 풀어 줌에 따라 하늘은 보라에서 남색으로 파랑으로 초록으로 노랑으로 주황으로 빨강으로 바뀌어 간다. 일곱 가지로 변하는 하늘빛이 모두 단 하나 공중에 떠 있는 붙박이 흰 점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낡은 목제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사람들의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서두르고 있는 듯, 발을 옮기는 속도가 여느 사람들보다 빠르다. 찾아올 친구가 없는 이 골방으로 거침없이 달려오는 것을 보면 아마 나를 붙잡으러 오는 사람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뒤에는 벨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대답이 없으면 주먹으로 문을 두드릴 것이고, 그리고는 온몸으로 세차게 부딪쳐 목제 문짝을 부수고 방안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뱀처럼 부스스 일어나 더듬더듬 안쪽 벽으로 다가가 비상 버튼 E를 눌러야 하리라. 그리고는 영원히 아무도 찾지 못할 편안한 곳으로 탈출해야 하리라.
눈꺼풀 속이 온통 빨간 햇빛으로 가득하다. 내 몸 한 쪽 끝으로부터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듯 황홀하다. 이 행복한 잠속에 조금만 더 남아 있고 싶다.
다가오던 구두 소리는 이제 문 앞에서 멈추고 벨 소리로 바뀌어 들려오고 있다. 나는 지금 버튼 달린 골방의 창문 옆에 햇빛을 향해 모로 누워서 고물 라디오가 훔쳐다 귓속에 넣어 주는 세상천지의 음악을 모두 들으며 죽음처럼 달콤한 얕은 잠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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