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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출근 길.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나이 서른에 우리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어 근데 이 노래를 내가 왜 부르고 있지? 29살 되던 해. 난 늦깍이 의대생이었다. 94년도. 본과 4학년. 길고긴 학창 시절의 마지막에 나는 조금의 의미를 더 얻기 위해 대전 성남동에 있는 야학교에 수학선생님으로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한~6개월 쯤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좋아 했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성실하게 수학 공식을 이해시키느라고 진땀을 뺀곤 했었다. 아이를 다루는 교사로서의 자질이 영 서툴렀던지 경험 많고 노련한 실무선생님이 내 눈치를 보며 애써 산만한 아이들을 꾸짖느라고 고생했다. 그 때 언젠가 학예회 비슷한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때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나이 서른에 우리~. 멍했다. 내가 그 나이 아닌가. 당시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30대 언저리에 있었던 선배들을 보고 "아~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 선배처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고 노련해져 있겠지"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30이 되다니. 난 아직도 세상을 모르고 음흉하고 비겁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데...하며 우울해 했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인턴,레지던트를 밟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었다. 개업을 하고 죽을 둥 살 둥 하며 살다 40이 넘었고 이제 50을 바라보는 49세의 아홉 수 나이가 되었다.
나이 서른에 우리~라는 노래를 흥얼거리지만 흥겹지는 않았다. 아침이기도 했지만 난 29이 아니라 49의 철저한 중년임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라는 자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고정희의 '사십나이(?)'라는 시가 떠 올랐고 야~ 50이다. 잘 살았다. 축하한다. 앞으로 잘 살자~라고 격려했던 어느 작가의 산문이 기억났다. 모든 인생은 자기 삶이 중심이다. 자아를 깨닫기 시작하는 유년 시절에도 질풍노도의 청소년시기에도 좌절과 방황으로 세상의 변방으로 숨어들어가려는 청년기도 먹고 살라고 아둥 바둥 거리는 30~40대도, 이제는 고요히 자기 삶의 경계를 줄여 가는 황혼기 노인때에도 세상의 중심은 바로 자신이다. 30.40대에는 가끔 20대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20대에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물론 60대 미래로 먼저 가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시간,시각. 대천 천변에 먹이를 찾아 물 위에 떠 다리젓기에 열심인 청둥오리 식구를 보는 것이 즐겁고 힘겹지만 내 병원에 오는 환자에게 집중하는 것이 좋다. 지금 현재 여기에서 살아 가는 것. 사랑하고 사랑할 것. 지금 여기에서. 이것이 내 40대 아홉수의 철학이 되었다.
위기철의 자전전 소설-소설을 가장한(?) 철학서-<아홉살 인생>은 용감이가 추천한 책이다. 아홉살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경험한 바를 통시적 이야기로 풀어 놓었다. 이러한 류의 책은 우리는 많이 접한다. 최근에 읽은 것으로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놓고>나, 은희경의 <새의 눈물>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류의 책의 공통점은 어린 주인공들의 태도가 어른스럽다는 것이다. 생각이 철학적이고 인생을 달관한 듯 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사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커 버린 어른의 시선이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리가 되지 않고 당시엔 잘 몰라서 그렇지 분명 어린 주인공도 어른 못지 않게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책에도 나왔듯이 "지나치게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홉 살은 세상을 느낄 만한 나이이다."라 하지 않았던가. 어찌보면 이러한 소설은 그 옛날 어릴 적 덩쿨처럼 얽혀 있었던 삶의 진실에 이미 커 버린 어른이 정리해 준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추억을 인위적으로 꼬여 작품을 만들려 했다면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독자는 다 큰 어른이 깨끗이 딱아 준 창문을 통해 다 큰 어른의 어린 자아가 살아가는 것을 본다. 그 아이를 따라 가면서 다른 어른은 자기 삶을 돌아 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 묻게 된다면 참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이 책은 소설을 가장한 철학책이거나 쉽게 읽는 이야기 철학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친구들은 어떻게 이 책을 소화할까? 어른으로서 친구들의 독서모임이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본인들도 아홉살 인생이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 인생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하려 할까? 핵심은 이런거다. 내가 신기종 같은 친구를 만나다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오금복이란 친구를 만나면 어떻게 할까? 내가 장우림같은 아이와 연애를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지금 이런 친구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아니 내가 이 소설의 누구와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대한 삶의 태도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이니 말이다. 간접 경험. 우리 친구들에게 직접경험을 넘어서는 폭 넓은 사유를 이 책은 던져줄 것이라 생각한다.
낙천적인 아버지와 마음씨 고운 어머니를 둔 9살 짜리 초등3년 백여민. 서울 산동네로 이사 와 뒷 산에서 아이들과 놀고 학교를 다니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경험한다. 그 경험은 앞으로 인생에 본질을 이룬다. 지금까지의 삶은 그 본질의 변형일 뿐이다. 독자의 인생 경험도 이 인생 장치에 끼여들게 한다. 당신도 별 반 아니라고 벗어 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요소 요소에는 여러 철학적 장치들이 숨어 있다. 왜 본질을 숨겨 놨으니 어디에 이야기에. 그 본질은 철학이라 할 수 있으니까.
여민이가 산동네로 이사오고 앞쪽은 빽빽이 판잣집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아웅다웅 살아가는데 뒷쪽 숲은 울타리가 처져 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엄마에게 물어봐도 땅 임자가 있어서 그렇다고 할 뿐이다. 임자가 살지 않는데 어째서 그 숲이 남의 것인가? 아무도 살지 않고 그저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면 나도 가지고 있으면 되지 않는가? 9살 인생은 이렇게 선언해 버린다. " 그냥 가지고 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저 숲을 가지고 있어도 돼"(21쪽)
비록 자본주의적 소유가 독점과 지배를 허락했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독점과 지배라면 제한을 두여야 한다. 왜 그 땅은 그 숲은 누구나 놀 수 있는 공공성도 띠는 것이다. 우리는 철망을 뚫고 거기서 놀 권리가 있다.
불행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 사람들도 불쌍하다고 말하는 토굴할매. 여민이는 엄마에게 묻는다. "어머니 토굴할매보다 더 불쌍한 사람도 있어?" 어머니가 답한다." 가나하다고 해서 모두 불쌍한 것은 아니야, 가난한 것은 그냥 가난한 거야. 가장 불쌍한 사람은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57쪽). 맞다. 스스로 불쌍하다는 사람이 불쌍한 거다. 그러면 불쌍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남의 진심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천기누설하지 않는 한. 정답은 불쌍하게 보일 뿐인 거다. 스스로 불쌍하지 않다면 누구에게도 불쌍함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
여민이는 골방철학자의 부탁을 받고 피아노 선생님인 윤희언니에게 편지를 건네 준다. 근데 여민이는 예쁜 윤희누나를 보면서 갑자기 수치심을 느낀다. '그건 심부름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심부름 삯으로 받기로 한 이십 원 때문이었다. 이십 원 때문에 이 예쁜 누나에게 왔다는 사실이 몹시 비참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85쪽). 자고로 일은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해야 하는 법. 댓가를 받고 하는 일은 한계가 명확히 있는 것. 세상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것.
골방철학자는 대졸이다. 고시공부한다고 집안에 틀여 박혀 있다. 늙어 빠진 어머니의 등에 기생하고 사는 그에게 동네 사람들은 말이 많다. 그가 말한다. " 사람들의 편견은 꼭 가래침 같단다. 칵 뱉어 버리고 싶지만, 목구멍에 찐득찌득 달라붙어 뱉을 수가 없지. 너는 이런 심정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 할 거야"(102쪽) 그는 그런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도 속물이다. 남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자신도 남을 편견의 시선으로 볼 가능성이 크므로. 적당히 해야 한다. 비교하면 지는 거다. 남의 말은 그에게 그저 지나가는 말이다. 듣는 이가 마음에 꽁 안고 있으면 병 난다. 그런가 보다다. 적당히 거리 두기. 삶의 지혜다. 그는 말한다."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108쪽). 찔리는 말이다. 남에게 화나는 일이 있으면 심호흡 크게 하고 안면에 웃음근육을 만들자. 그러면 우리 뇌는 어리석어 '애가 웃는가 보다 기분좋은 감정호르몬을 보내야지~'한다. 상대방은 내가 회를 안 내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스스로 안다. 만약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계속 화나게 한다면? 글쎄 만나지 말자. 거기까지 정리해 주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차선은 될 거다. 최선은 잘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정답이 있을까?
산동네에 풍뎅이 영감이 있다. 교활하다. 무주공산 터에 말뚝 받고 판잣집 짓고 없는 사람들에게 세를 주고 돈을 받는다. 그것도 인정머리 없게. 여민이 아버지는 그 영감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세입자들에게 패악질을 못 하게 한다. 어떻게 했을까? 그가 세 놓은 집터도 무허가다. 고발하면 끝이다. 기세등등한 영감태기를 한 코에 잠잠하게 한 아버지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며 여민이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 한다. 아버지가 말한다."그건 비밀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만 네게 가르쳐 주지. 네가 앞으로 살아가다 어떤 악당과 싸우게 되면 말이다. 넌 그 악당보다 훨씬 더 교활해져야 해. 그러러면 너는 그 악당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해.알겠니?"(122쪽) 법 없이 사는 순진함은 없다. 교활함의 먹이일 뿐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돈 버는 것 좋다. 그러나 그 착한 사람이 돈 벌기 위해 교활해 져야 하는 역설이 존재한다. 순진함과 교활함이 내 안에 있는 것. 정의와 악마가 동시에 같은 곳에 산다는 것. 거짓과 진실이 동전의 양면인 것. 이것이 문제다. 쉽지 않다. 세상이 인생이.
여민이는 가난했다. 남들이 소시지,쇠고기볶음,달걀부침을 싸 올때 된장만 싸 왔다. 그에게 가난은 부끄러움이었다.' 학교 점심시간은 내게 가난이 뭔가를 처음으로 그리고 매우 적나라하게 가르쳐 주었다. 학교 점심시간을 통해 배운 가난이란 매우 부끄러운 것이었다. 이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125쪽). 이 부분은 할 말이 없다. 내 학창 시절도 오로지 김치였다. 근데 다른 친구도 비슷했다. 부끄럽지 않았다. 맛있게 먹었다. 밥과 반찬의 양을 눈대중으로 맞춰가면서...
낭만에 대하여 일갈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민이네 집은 비오는 날이면 비가 곳곳에서 샌다. 이를 막느라고 온 가족이 불편을 겪는다. 다 큰 어른 여민이가 이야기 한다. ' 낭만은 생활을 벗어난 자리에나 존재하는 것인지. 내가 창 넓은 찻집에 앉아 비 오는 날의 낭만적 분위기를 즐기는 요즘에도, 지붕 위에서 부엌바닥에서 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웃들이 얼마든지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 시대의 낭만이란, '대단히 미안한 짓거리'이기 일쑤이다.'(137쪽). 이 책이 1991년에 나왔다. 지금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좋다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낭만이라는 허영을 벗어 버리고 사유와 사색을 즐기는 장소로 자리매김 한다면 그리 나쁠 것은 없다고 본다.
여민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예전의 나'에서 '느닷없이 바뀌어 버린 나'로 변했다. 정체성에 혼란이 왔지만 여민이는 신비로운 빛에 빛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교실의 주류로 떠 오른다. 예전의 나의 친구인 신기종이가 멀어져 간다. 부잣집 아들인 반장이 주변으로 밀려 간다. 기종이가 슬픈 눈으로 자신을 쳐다 보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나는 칭찬을 받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되었다. 여민이는. 세상은 그렇다. 어떤 기준으로 나뉘어 지면 그동안 친했던 친구와 서먹해진다. 그들이 다시 친해지려면 멋 훗날이 필요하다. 그 훗날도 이전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지 못할 거다. 그것이 인생임을 인정하는것이 스트레스 안 받는 지름길일거다.
여민이는 장우림을 좋아한다. 윤희누나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듯 하다. 그들이 나누는 사랑이야기는 이런거다."참 이상한 일이야 뭔가 아쉽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데, 사랑을 하면 더욱 아쉬워지게 되거든,그래서 때때로 악당이 되어 버리지.공연히 트집을 잡고 공연히 화를 내고..","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는 없다는 사실이야. 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저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속만 부글부글 끓이다가 그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하지.","사랑을 하면 기대하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아쉬운 것도 많아지고 그래도 공연한 투정도 부리는 건데, 상대방은 결코 그걸 이해하려 들지 않아.단지 못된 성깔을 가졌다고만 생각하는 거야"(163쪽). 의과대학 시덜 과커플이 많았다. 이들은 졸업하자 마자 결혼을 안했다면 100% 깨진다. 결국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힘들고 외롭고 어려운 학생시절의 연대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없다. 알에서 깬 그들에게 보인 세상은 너무나 넓고 아름답다. 연대가 족쇄가 되었음을 깨닫고 신속히 청산절차에 돌입한 그들의 용감성에 찬사를 보낸다.
토굴할매가 죽었다. 연고 없는 그 녀를 위해 아버지가 솔선해 장례를 치뤘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강패질을 하며 살았다. 어머니를 만나고 그 길을 접었다. 효도를 제대로 하려 했는데 친할머니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왜 죽음이나 이별이 슬플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라다. 아버지 말이다.(173쪽) 할 말없다. 그러나 아마 그럴 것 같다.
서글픈 평화가 란 말이 있다. 느껴지는가? 서글픈 평화. 이 동네 어릿아이 대빵 검은제비네 집이 그렇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술 마시고 온 집안을 부셔 놓는다. 검은 제비는 송곳을 갈으면서 꼭 커서 자기 손으로 그 놈을 죽일거란다. 아버지는 결국 노상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집안에 찾아 온 서글픈 평화. 검은 제비는 여민이에게 대빵 자리를 물려 주고 생업전선으로 떠난다.씩씩하고 자부심있게 떠난 검은제비를 여민이는 가끔 본다. '새까맸던 얼굴은 몹시 해쓱해졌고,맑았던 눈빛은 흐리멍덩해졌다'(181쪽).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얼굴이 해쓱해지고 눈빛이 흐리멍덩해짐을 뜻하는 것일까? 여민이는 그렇게 생각한다. 검은제비는 자기 삶에 배신 당하고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다 큰 여민이는 세상의 검은 제비에게 이렇게 외친다.'슬픔과 외로움과 가난과 불행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제 피붙이와 제 자신을 향해 애꿎은 저주를 퍼붓고 뽀족한 송곳을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용서해선 안될 적들은 쉽사리 용서하면서 제 피붙이와 제 자신의 가슴엔 쉽사리 칼질을 해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검은 제비는 잘 있습니까? 혹시,당신이 검은제비 아닙니까?"(183쪽)
검은 제비가 떠난 산동네에서 신이 난 사람은 신기종이다. 기종이는 여민이를 대빵으로 몰아 세운다. 그러나 여민이는 관심이 없다. 기종이는 다른 동네 아이들에게 싸움을 걸자고 한다. 왜? 나쁘니까! 왜 나쁘지? 나뻐야 하니까! 싫은데. 이러한 여민이에게 기종이가 말한다. " 물론 그 아이들은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이들이 나쁘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거다. 반드시 그래야만 해."(186쪽). 비단 아이들 세상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일본에게 남한의 수구세력에게, 또 나 자신의 내면세계에게 묻고 물을 일이다.
골방철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를 죽음에 내몰게 된 것은 무엇일까? 다 큰 여민이는 욕망을 이야기 한다. " 사람이 꿈꿀 수 있는 욕망은 무한하다. 거지는 왕자가 되고 싶고..왕은 신이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모든 욕망이 현실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욕망은 어찌되는가? 그것은 우리마음속에 고이고 썩고 응어리지고 말라비틀어져, 마침내는 오만과 착가과 몽상과 허영과 냉소와 슬픔과 절망과 우울과 우월감과 열등감이 되어 버린다."(203쪽). 그리고 그 극단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물론 죽음의 원인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우리 삶은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줄을 타는 것은 맞다. 그 줄타기에서 나오는 감정의 선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삶의 지혜일 것이다.
외팔이 하상사가 있다. 월남전에서 슈류탄 파편으로 왼팔을 잃고 고물장수를 하는 사람이다. 결국 기종이 누이와 결혼을 한다. 인생은 외롭다. 결국 혼자 사는 거고 그 삶은 오로지 자기가 감당할 몫이다. 그렇다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장벽을 치고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곳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어차피 죽을 삶이라면 죽기 전까지 멋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잘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잘 살기 위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하상사와 기종이 누이의 결혼. 그것이 인생이다.(215쪽) 창조적 허무. 이것이 삶의 태도다. 피괴적 허무에 빠지면 이웃이 괴롭다. 사랑하는 이가 상처를 받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창조적 허무'노선을 지켜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후회하고 공허하다고 느끼며 사는 거다. 그러나 그럴 수록 '기왕이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창조적'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서로 만나고 힘을 보태고 그리고 강해'(223쪽)져야 한다.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에 나온다.여민이는 학교를 땡땡이 치고- 연인 우림이에게 복수한다는 꼴이 자기학대다.왜 있지 않는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일하게 복수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해치는 거라는 것. 이것을 정치학에서는 소아병적 급진주의라 하지요.ㅎㅎ-숲 속에서 노닐 때 산지기를 만나게 된다. 산지기에게 혼쭐이 나고 그에게서 방면되어 나오는데 화끈하게 지랄을 떤다. 반전의 반전. 피습과 역습의 태극양상. 그날 배운 인생교훈.'오늘 우리는 창 넓은 찻집에서 다정스런 눈빛으로 천천히 살아온 나날처럼 따뜻한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지만, 내일은 돼지처럼 뚱뚱한 수사관에게 끌려가 곰팡이 냄새 푹푹 나는 지하 밀실에서 똥오줌 질질 싸며 고문을 받을 수도 있다. 험상궂은 세상의 낭만이란 허망하게 깨지기 쉬운 마른 낙엽 같은 것..빠작!'(259쪽)
낭만과 허영은 욕망과 현실사이에 떠도는 부나방이다. 불빛(욕망)에 달려들어 무참히 불타버리는 부나방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유와 행복'을 노래해야 할 것이다. 자유와 행복은 남의 자유와 행복을 전제로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철학은 이런 것을 알려 준다. 반성적 성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이것이 자유의 출발이다. 또 하나 황금율. 남에게 내가 싫은 것을 시키지 말 것. 이것이 행복의 출발이다.
40대 아홉 수에 들어선 나에게도 욕망은 무한하다. 반성적 성찰과 황금율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일지라도 나는 금기와 배제를 넘어서는 나의 욕망을 추구할 것이다. 가끔은 낭만과 허영으로 갈 것이고 현실에서 너무 많이 올라가 고소공포증을 느낄 수 있을 거다. 그러다 가끔은 떨어져 갈비뼈 한 두대 나가기도 하겠지.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야 속이 편하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자신은 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할 참된 가치는 '우리의 자유와 행복'임을.
첫댓글 다방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원장님 덕분에
친구들의 앞날도 기대되고,
자유속에서 많은 행복 찾아가는 나날 되시길요
참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시느라 정신없지요~?
독서를 통해 인재를 찾는 재미가 솔 찮은 것 같습니다
좋은 직업이자 여가활동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