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입니다.. 글 참 잘 쓰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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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저의 소견을 간략하게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대승기신론은 인도에서 저술된 논서가 아닌 것으로 강하게 의심을 받는 중국불교에만 특유한 논서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대승기신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논서이거나, 적어도 중국에 들어온 인도나 중앙아시아 역경사들의 가르침을 듣고 역경에 참여한 중국인 역경사들이 정리한 것으로 간주가 되는 논서입니다. 산스끄리뜨 원전이 발견되지 않은 논서입니다. 만일 인도에서 중시된 논서라면 반드시 산스끄리뜨 원전이 남아있거나 적어도 티벳 대장경에 나타나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은 불교의 주류 흐름인 초기불교-아비담마-반야중관-유식의 관점과는 다른 여래장 계열의 이론서입니다. 그러므로 기신론을 <대승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으로 간주하는 법우님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기신론은 단지 대승불교의 하나의 가지인 여래장 계열의 이론을 체계화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후대의 그것도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대승기신론의 관점으로, 그리고 그것도 불교의 주류에 들지 못하는 여래장 계열의 이론으로 불교의 주류에 있는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와 반야중관과 유식의 가르침을 평가하는 것은 그 방법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모두 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승 안에서도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정토, 밀교, 선종 등은 그 계통이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가르침이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온존하며 서로 많은 이론투쟁을 하여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공, 법공, 구공이라는 관점은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이론이지 절대로 초기불교의 이론은 아닙니다. 초기경들에 공(sun$n$a, s#uunya)이라는 술어가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공이니 법공이니 구공이니 하는 용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을 가지고 초기불교를 평가하는 것은 “내 일기장에 너는 나쁜 놈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에 너는 나쁜 놈”이라는 어거지 주장과 꼭 같은 오류에 빠져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중론에서 말하듯이 공을 무아와 동의어로 간주한다면 아공과 법공은 각각 아무아(인무아)와 법무아로 대치가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실제로 인무아와 법무아라는 술어도 대승논서들에는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에서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것(아, 인)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개념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초기경과 아비담마에서 제법무아는 항상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공히 인무아와 법무아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도 아공법공을 설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승에서 말하기를,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아공법유를 말하기 때문에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자기들이 스스로 너는 나쁜 놈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나서 너는 나쁜 놈이라고 고함치는 우스운 논리와 같습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어디에도 법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가 법유를 설한다는 것은 상대를 폄하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어거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 아래의 답글들에서 많이 제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법유나 아공법유 등으로 검색을 해보시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공부하시려면 부디 초기경들과 아비담마 논서들을 먼저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시라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소승이라고 폄하하기 위해서 후대에 억지로 만들어진 아공법공이니 아공법유니 하는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이론으로 초기경들과 아비담마를 평가하지 마시라고 조언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자신이 초기경들과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한 뒤에 후대의 대승논서들이 아공법유니 법체항유니 하면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폄하하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 아닌가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하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객관세계조차 일심임을 깨달아야> 운운하신 것은 전적으로 여래장 계열에서만 그것도 중국의 논서들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임을 아셔야합니다. 초기경의 어디에도 객관세계가 일심의 소현이라거나 일체유심조라거나 하는 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식에서는 대상을 식전변에 의한 사현으로 설명하고 식전변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고 식전변을 찰나생/찰나멸로 설명합니다. 그런 것이지 유식은 일심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초기경과 불교의 주류의 흐름에 없는 이런 부정확한 언어표현은 오히려 불교의 가르침을 외도의 가르침으로 만들고 마는 엄청난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모든 불교는 연기와 무아를 근본으로 합니다. 일심이니 일체유심조니 하는 표현은 연기/무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언어표현입니다. 만일 이런 경지를 가지고 깨달음이라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깨달음은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대승논자들은 말합니다. 일심이야말로 연기고 무아라고. 이야말로 참으로 우습고 유치한 표현입니다. 연기와 무아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고 일심이란 언표는 마음을 실체화하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이 둘이 같을 수 있습니까?
초기경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간주하고 유위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설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연기적 존재요 무상한 존재며 그래서 실체가 없으며 그래서 무아입니다. 그러나 일심이라는 표현은 마음을 절대화하는 표현입니다. 만일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그것은 즉시에 무아와 연기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불교에서 마음은 절대화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이 절대화되면 그것은 외도들이 설하는 마음이 되고 자아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고요 실체가 없으며 조건발생(연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불교의 마음이 아닙니다. 대승의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으로 표현되는 제8식도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며 실체가 없으며 무자성이며 조건발생이며 대상을 가지는 것이며 무아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뢰야식은 절대로 일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독 여래장 계열의 경론에서 여래장이니 불성이니 일심이니 하면서 마음을 절대화하는 듯한 애매한 언어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래장 혹은 불성은 연기요 무아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지 않으면 여래장이나 불성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닌 외도의 자아(아뜨만)와 같아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 不空여래장을 말합니다만 그들이 불공여래장이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空을 연기와 무아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공을 허무나 단멸로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을 허무로 이해했기에 다시 불공이라는 술어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평천장 교수의 말처럼 진정으로 공이라면 불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래장 계열의 경론들은 잘 못 이해하면 완전히 외도의 가르침이 되고 맙니다. 여래장 계열을 경론을 좋아하는 분들은 반드시 명심하고 조심해야할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적고 싶은 말은 ... 깨달음의 경지도 정확한 언어표현으로 표현되어야한다는 점입니다. 비불교적인 언표를 사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승이라느니 최상승이라느니 하는 것은 단지 감언이설일 뿐입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깨달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느니 깨달아봐야 스스로 안다느니 하는 것도 깨달음을 호도하는 무지몽매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창시자며 불자들의 스승이고 사표인 분입니다. 그분 부처님께서는 결코 애매한 언표나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어떤 언어표현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 팔정도를 실현하는 것, 오온/12처/18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12연기를 순관/역관하는 것 등으로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대승기신론과 같은 후대의 논서를 절대시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초기불교를 잘못이해하거나 폄하하거나 깨달음을 절대화 하는 듯한 태도는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법우님의 자유입니다. 대승기신론을 의지해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자 하시면 그대로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신론을 가지고 초기불교나 아비담마를 평가하거나 섣불리 우열을 비교하려는 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라고 거듭 말하고 싶습니다. 만일 초기불교나 아비담마를 평가하고 싶으시면 부디 먼저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정확하게 공부하시고 난 뒤에 평등한 입장에서 평가하실 것을 권합니다. 아니면 오히려 불교만대의 표준이 될 수밖에 없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과연 대승기신론은 부처님 원음을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는 논서인가를 먼저 평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라고 여겨지므로 이렇게 평가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면 기신론을 읽고 음미하는 것이상으로 더 정교하고 분명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라고 적으면서 두서없이 답글을 마무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