蘆沙先生文集卷之十八 / 序 / 扶寧金氏族譜序
金氏多名貫。扶寧亦其一也。謹按其家牒。受封最早。致位崇顯。與松京相終始。至典醫少監諱光信。値麗氏運訖。始奠居貫鄕。而子姓久益蕃衍。至於跨州連省。積慶深流澤遠。扶寧氏之謂歟。扶寧氏旣南。雖崇顯遜于前。亦累累冠冕。如梅堂坫守靈光郡事益福。其子孫皆名家。今又得府使漢佑,宜寧縣監德福兩家。蓋府使公有忠義器局。當壬辰之燹。與次子承白。有扈駕之勩。長子元龍及其從子震龍,應龍。致身于丙子南漢。先後勳券。兄弟連芳。縣監公襲傳家孝義。未老勇退。經道自樂。嘉行懿蹟。矜式鄕邦。皆言足聽聞。不佞於人家先德。耳目不廣。以其爲先世切姻也。而知有梅堂家。以中歲與故大諫漢益氏相知也。而知有靈光郡事家。靡今日斯文益臣氏惠然肯來。示以新印譜編。則幾失此府使縣監兩家矣。貫扶之金。自昔無全譜。蓋族大難湊合也。益臣氏縣監之裔。於府使公爲近。故其所新印。亦止此兩家而不遑廣蒐。益臣氏不以正鎭無似。猥問所以弁卷者。正鎭辭不獲。因竊念族之有譜。其大關於倫理者四焉。原原本本。使人無忘其所生一也。講親修睦。使吾族類別於路人二也。名諱墳壠。因以記錄。使爲子孫者各伸追遠之情三也。凡此三者。金氏諸賢修譜之規盡之。無容吾之贅一辭。爲祖宗名德。因以稱述。使後承有傳守式穀之地四也。此若可以稍假外人之公頌者。金氏所以命於正鎭者。不在於斯耶。扶寧氏名德顯著。當以高麗文貞公爲最。然士林公傳道之。固已久矣。無竢乎一家之言。故今於金氏之託。不敢遠述文貞。特於府使縣監二公之德。採錄其一二。以備課忠責孝之意云。
노사집 제18권 / 서(序) / 《부령김씨족보》 서〔扶寧金氏族譜序〕
김씨(金氏)에는 잘 알려진 관향이 많으니, 부령(扶寧)도 그중의 하나이다. 삼가 그 가첩(家牒)을 살피니, 가장 일찍 수봉(受封)하여 지위가 높고 현달한 데 이르러 송경(松京 개성(開城))과 시종 함께 하였다. 전의 소감(典醫少監) 휘 광신(光信)이 고려의 운세가 다할 때에 비로소 관향에 정착했는데, 자손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번성하여 주(州)를 넘고 성(省)까지 잇닿으니 적경(積慶)이 깊어 유택(流澤)이 멀리까지 가니 부령 김씨라고 이르게 되었다.
부령씨가 이미 남쪽으로 온 이후 지위가 높고 현달한 것은 전보다 못하나 역시 누누이 벼슬에 올랐으니, 매당(梅堂) 점(坫)과 영광 군수(靈光郡守) 익복(益福)과 같은 이는 그 자손들이 모두 명가가 되었다. 이제 또한 부사(府使) 한우(漢佑)와 의령 현감(宜寧縣監) 덕복(德福)의 두 집안을 발견하였다. 대체로 부사공은 충의의 기국(器局)이 있어서 임진년의 병화(兵禍)를 당하여 둘째 아들 승백(承白)과 함께 호가(扈駕)의 공훈이 있었고, 큰 아들 원룡(元龍) 및 그 조카 진룡(震龍)과 응룡(應龍)은 병자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목숨을 바쳐 앞뒤로 훈권(勳券 공훈 녹권)이 있으니, 형제가 향기를 나란히 하였다. 현감공은 집안에 전해진 효의(孝義)를 이어받아 늙기 전에 용감히 물러 나와 경전과 도의를 스스로 즐겨 아름다운 행의와 사적이 향방(鄕邦)의 사표가 되었으니, 모두 이야기로써 들을 만하였다. 나는 인가(人家)의 선덕(先德)에게 듣고 본 것이 넓지 못하나 그 선세와 매우 가까운 인척간이어서 매당(梅堂)의 집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중년에 옛 대간 한익(漢益) 씨와 서로 알게 되어 영광 군사의 집안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오늘날 사문(斯文) 익신(益臣) 씨가 영광스럽게 찾아주어 새로 인쇄한 족보 책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 부사와 현감 두 집안의 것을 거의 빠뜨릴 뻔하였다.
부령을 관향으로 하는 김씨는 예로부터 전보(全譜)가 없었으니, 아마도 씨족이 커서 수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익신씨는 현감의 후손으로 부사공과 가깝기 때문에 그 새로 인쇄한 것도 이 두 집안에 그치고 미처 널리 수집하지 않았다. 익신씨가 정진(正鎭)을 형편없다 생각하지 않고 외람되게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므로 정진은 사양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씨족은 족보를 가져야 하는데, 크게 윤리에 관계된 것이 네 가지이다. 근원을 근원으로 하고, 근본을 근본으로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출생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째이고, 친함을 강론하고 화목을 닦아 우리 족류(族類)로 하여금 행인(行人)과 구별하도록 하는 것이 두 번째이며, 명휘(名諱)와 분롱(墳壠 무덤)을 기록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각자 추원(追遠)의 정을 펴도록 하는 것이 세 번째이다. 무릇 이 세 가지는 김씨 제현들이 수보(修譜)하는 규례(規例)에서 다 말하였으니, 내가 겹쳐 말할 필요는 없다. 조종(祖宗)의 명덕으로 인해 칭술(稱述)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전하여 지키고 식곡(式穀)의 바탕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네 번째이다. 이와 같은 것은 외인(外人)의 칭송을 조금 빌릴 만하니, 김씨가 정진에게 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부령씨의 명덕이 현저히 드러난 것은 마땅히 고려 문정공(文貞公)이 으뜸이나 사림공(士林公)을 전하여 말한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한 집안의 말에서 기다릴 것이 없기 때문에 이제 김씨의 부탁에서 감히 멀리 문정공을 칭술하지 못하고, 특별히 부사와 현감 두 공의 덕을 그 한두 가지에서 채록하여 충을 다하고 효를 다한 뜻을 갖추도록 하였다.
[주-D001] 적경(積慶) : 적선여경(積善餘慶)의 준말로,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덕행을 쌓은 집안은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주-D002] 매당(梅堂) 점(坫) : 김점(金坫, ?~1560)을 말하며, 매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경숙(敬淑)이다. 전북 부안에서 출생하였다.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이현(二賢)으로 꼽힌다. 명종 때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연은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벼슬에서 물러나 스승 이항이 있던 고부 우일[우일은 현 정읍시 정우면 우일리를 말한다.]로 이주하였다. 망제동 물가에 척심정(滌心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글을 읽었으며,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였다. 기대승과는 사돈지간이다.[주-D003] 영광 군수(靈光郡守) 익복(益福) : 김익복(金益福, 1551~?)을 말한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계응(季膺)이다. 조부는 석량(錫良)이며, 부친은 찰방 광(光)이다. 1573년(선조6)에 진사가 되고 1580년(선조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사ㆍ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광 군수로서 현감 임계영(任啓英)과 함께 인근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결국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어려서는 노진(盧禛)으로부터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金長生)과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주-D004] 식곡(式穀) : 자식을 착한 데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완(小宛)〉에 “언덕 가운데의 콩을 서민들이 거두어 가는 것처럼, 명령의 새끼를 과라가 업어 데리고 가서 키우니, 그대도 아들을 잘 가르쳐서, 좋은 방향으로 닮도록 하라.[中原有菽, 庶民采之,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주-D005] 외인(外人) : 씨족 외의 사람들을 지칭한다.[주-D006] 문정공(文貞公) : 문정은 김구(金坵, 1211~1278)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 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예종 때 유경(柳璥)이 천거하여 예부 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관한 문서를 담당했으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그 뒤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지첨의 부사(知僉議府事) 등을 거쳤다.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도록 권장하였고, 원종 때 유경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시록을 수찬하였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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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공(士林公)을 전하여 말한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사림(士林)이 공적으로 전하여 이야기한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區區嘗病吾儕以此等議論爲暗中隱秘說話,不敢公傳道之。저는 일찍이 우리들이 이런 의론들을 암중에 은밀하게 숨기는 이야기로 삼고 감히 공적으로 전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생각하였습니다.<九思堂集 卷五 / 書 / 答權景晦 권경회에게 답하다〔答權景晦〕>
"昔者聖人之作春秋也에 旣深其文辭矣로되 然猶不敢公傳道之요 口授弟子하여 至於後世然後에 其書出焉하니 其所以慮患之道微也라"<古文眞寶 後集 卷二重答張籍書>
마땅히 고려 문정공(文貞公)이 으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