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0 연중7주일 다해 – 133위 066° 최 마리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133위 066° ‘하느님의 종’ 최 마리아
이름 : 최 마리아
출생 : ?년, 공주?
순교 : 1867년 1월 22일, 교수, 홍주
최 마리아는 1866년 홍주에서 순교한 김선양 요셉의 아내로, 김선양 요셉과 혼인한 뒤인 1838년에 가족들과 함께 천주 교리를 배운 뒤 영세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최 마리아는 1839년에 시가 식구들과 함께 전라도 고산 시어골(현 전북 익산시 여산면 대성리의 세목[0.1])로 이주했다가 기해박해로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 남편 김선양 요셉은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그녀의 가족은 충청도 진잠(현 대전시 유성구 진잠동)을 거쳐 전주 약바위[0.2](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로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다시 박해를 겪은 뒤 공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서산 강당리[0.3](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최 마리아의 가족이 강당리에 정착한 지 6년 정도 되었을 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이에 그녀의 가족은 산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는데, 같은 해 11월 9일(음력 10월 3일)에는 강당리 회장이 체포되었고, 12월 13일(음력 11월 7일) 홍주 포교들이 들이닥쳐 남아 있던 신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남편 김선양 요셉도 아들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
이후 최 마리아의 남편 김선양 요셉은 1866년 12월 27일(음력 11월 21일) 교수형으로 홍주에서 순교하였고, 아들 요한은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요한이 홍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달아나자, 포교들은 그 대신 어머니 최 마리아와 아내 이 마리아를 체포하였다.
포교들은 최 마리아에게 아들이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하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했고, 이어 “누구에게 천주교를 배웠느냐?”고 하면서 다시 형벌을 가했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며느리 이 마리아가 그녀 대신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홍주로 압송되었다.[1]
홍주 진영에 도착하자 영장은 포교들의 보고를 듣고는 일단 최 마리아와 며느리 이 마리아를 하옥토록 하였다. 그런 다음 3일만인 1867년 1월 22일(음력 1866년 12월 17일)에 최 마리아를 옥에서 끌어내 교수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순교 직전에 최 마리아는 옥졸에게 “내 며느리 이 마리아는 나 대신 들어온 것이니 풀어 주라.”고 부탁하고, “예수, 마리아께 의탁하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2]
[註]__________
[0.1] 대성리(臺城里) : 전라도 여산군 천동면에 속했을 때는 ‘대성리(臺城里)’였는데 뒤에 돈 대(臺)자의 약자인 별 태(台)로 쓰게 되자 현재처럼 ‘태성리(台城里)’가 되었다. 태성리의 ‘세목’(익산시 여산면 태성리 산 21)은 누항(漏項, 시어목>세목)이다. ‘시어목>세목’은 한자로 누항(漏項), 곧 ‘샐 누(漏)’와 ‘목 항(項)’으로 표기한다. ‘시어목(漏項)’은 ‘물이 새어(시어, 漏)’과 들어가는 좁은 목(목덜미·끝, 項)’의 한자 합성어이다. 천호성지가 등진 천호산 북쪽 근처에 지형이 삿갓을 뒤집어 놓은 듯한(圓錐形) 곳이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천호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감으로 ‘시어목’이라 했다. 성치(城峙, 성잿골, 성칫골)에는 나백전(羅百戰, 660년) 때 쌓았다는 천호성이 있어 성잿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성(天壺山城)에 있는 성치(城峙)는 여산면 동쪽의 천호산, 남서쪽의 용화산과 미륵산, 낭산산이 있어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여산면 가운데로는 여산천이 흐르며, 좌우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 풍요롭다. 가히 한 고을이 될 만한 곳이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거점이었다. 박해시대에 충청도, 특히 내포 신자들이 피신하여 일대로 퍼져나가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1846년 6월 다블뤼 신부는 김대건 신부 체포 소식을 듣고 서울에 머물던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머물렀던 강경 황산포와 금강 수로로 통하는 외리골(부여군 규암면 외리?)로, 나중에는 여산 성치골로 피신하면서 큰 고초를 겪었다. 1846년 11월 2일 수리치골(현 공주 신풍면 봉갑리)로 되돌아와 평신도 신심 단체인 ‘성모성심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겪은 고생으로 다블뤼 신부는 1847년 봄에 중병을 앓았고,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그 후에 주교가 되어 사목하다 순교할 때까지 평생 걷는데 지장을 겪었다.
[0.2] 약바위(약바우, 약암) : ☞ 1866년 박인박해 전주 숲정이 103위 순교 성인들과 관련된 곳이다. 약바위는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는 지역이다. 꽃 속처럼 생겨서 ‘화심리’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화심리, 구진리, 묵방리, 유상리, 약암리를 병합하고 ‘화심리’라 했다. 1935년 전주군 전주읍을 전주부로 승격·분리하고, 전주군을 완주군으로 개칭하면서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가 되었다. 화심리의 주산은 묵방산이며 성안골, 활무당골, 세암골, 각긍골, 홀작골, 게너머골, 빈터골, 삼밭골, 소태골, 묵방골, 남석골, 가래골, 성가마골, 괴엄방골 등의 골짜기가 있고, 하천으로는 화심천이 있다. 유상마을에는 주산이 가무봉으로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병인박해 때 성 조화서·성 조윤호 부자, 성 정원지, 성 한재권은 유상마을로 피신해 살다가 잡혀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다음 막고개에 묻혔다(성 조윤호 묘는 확실치 않음). 화심리 일대는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교우들이 외부와 소통하면서도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적합한 땅이었다.
[0.3] 강당리(講堂里, 강당이, 강댕이) : 서산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골짜기다. 강댕이골은 덕산 한티, 해미 대곡리 교우촌과 더불어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대로 천주교인을 도륙하던 해미진영을 대담하게도 산 너머에 두고 있었다. ‘치명일기’와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에 1866년 11월 병인박해 때 강댕이에서 살던 ‘하느님의 종’ 김선양·최 마리아 부부를 비롯하여 교우 17명이 홍주 또는 해미의 포교에게 체포되어 홍주 또는 해미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들의 시신을 구덩이 하나에 묻어 버렸다고 한다. 이들에게 가해진 교수형은 두꺼운 큰 널판에 구멍 하나를 뚫고 양쪽에서 두 명이 줄을 끌어당겨 죽이는 식이었다고 한다.
강댕이 입구에 운산 고풍저수지가 있고 계곡 안으로 약 1km 남쪽 왼쪽 기슭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골짜기 안에 강당리 공소는 예전부터 옹기 마을로 이름난 곳이다. 1889년에 공소가 설립될 당시 교우가 120명이나 되는 비교적 큰 교우촌이었다. 병인박해가 끝나자 피신했던 교우들이 되돌아와 옹기를 구우며 교우촌을 이어 갔다. 당시 운산 면소재지 갈신리의 미럭벌 교우들은 강댕이 공소 신자로 분류되었다. 1894년 합덕본당 주임 퀴를리에(Curlier, 레오, 南一良, 1863-1935) 신부에 의해 강댕이공소와 미럭벌공소가 분리되었다. 하지만 동학혁명이 일면서 ‘갑오개혁’(1894-1896)으로 근대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10년 ‘한일병합’과 1914년 ‘전국부·군통폐합’에 따라 도시 집중 현상이 가속화하였다. 또한, 강댕이에는 옹기흙이 부족하고 판로도 멀어 교우들이 강댕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교우가 절반인 62명으로 줄자, 1919년 교세가 증가하는 운산 면소재지 미럭벌공소로 강댕이공소를 흡수·통합시켰다. 이에 때해 뮈텔 주교는 ‘1899년에는 미럭벌공소강당이 좁았지만, 1906년에는 강당이 아주 넓다’라고 기록하였다. 미럭벌 신자들이 급증하면서 공소강당을 증축했음을 알 수 있다.
태안·서산·당진·온양·천안·서울/예산·공주·대전 등지로 자동차 도로와 철길 나면서 산간벽지 사람들의 도시로 이주 바람이 일자, ‘비렁뱅이도 서울 비렁뱅이’라는 허풍 따라 강댕이 사람들의 이곡(離谷) 현상은 가속화 하였다.
1958년 당진본당 주임 유인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924-1998) 신부가 구호금으로 대철중학교를 설립하여 전교를 활성화하였다.
하지만 강댕이골은 운산 면소재의 발전으로 더욱 쇠락하였다. 강댕이골 입구 고풍리(고풍저수지)에서 1960년 전후에 유소년 시절을 보낸 방윤석 베르나르도(1950-2012)의 회고담을 기억한다.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니는 산과 골짜기는 산짐승과 뱀과 송충이가 득실거려 두려움과 공포의 고립무원이요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강댕이 골짜기를 순례할 때마다 사철 비바람이 나무를 비벼 내는 소리가 박해시절에 교우들이 울리던 기도 소리처럼 들린다. 마치도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듸없는’ 폐수도원에서 듣는 성가 소리처럼 들린다. 지금처럼 휴양지로 개발되기 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 강댕이골망은 풍수로 망하고 묵언수행하고 있었다. 강댕이개울을 사이에 두고 쥐상과 고양이상을 한 바위 둘과 그 근처에 절 둘 있었지만,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모두 망해버렸다 한다. 전설로 남은 강댕이 보원사(普願寺, 백제 때 건립되고 신라 때 화엄 10대 사찰 중 하나) 빈절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독경처럼 들리는 듯했다.
[1] 며느리 이 마리아가 이때 석방되어 뒷날 홍주옥으로 시어머니를 만나러갔다는 기록도 있다(『병인치명사적』, 1권, 156-157면).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681번; 『병인치명사적』, 1권, 156-157.162-163면; 2권, 151면. 이후 이 마리아는 석방되었다. 또 그녀가 시어머니 최 마리아의 시신을 거두고자 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