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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남은 생애 마지막까지
2023년 4월 23일 / 요한복음 12:23-24
요 12:23-24 /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이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밀알 하나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한 알의 죽은 밀알에서 많은 밀알이 맺히듯이 새 생명들을 풍성하게 거두게 될 것이다.’
1. 예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한주간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마지막한 주간은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한 수난의 한 주간이었으며 부활하여 죄와 사망을이기신 승리의 시간이었다. 그 하루하루를 살펴보자.
주일 :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믿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송하며 영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심판으로 무너질 성전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마 21:1-11, 요 12:12-19).
월요일 : 예수님은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아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 모의하기 시작하였다(마 21:12-13. 눅 19:45-46).
화, 수요일 :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서기관과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의 간교한 질문들에 답변하시며 성전의 파괴와 대환란, 종말의 징조들, 제자들의 박해받을 일과 재림 등을 예언하시며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가룟 유다가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다(마 26:1-5, 막 14:1-11).
목요일 : 유월절 저녁이다. 예수는 어느 가정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다. 서로 누가 터 크냐는 논쟁을 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서로 섬겨야 할 것을 친히 보여주셨고, 배반자 유다를 지적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번 예수를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잔을 받으신다. 유다가 무리와 함께 올라와 예수님을 체포, 대제사장에게 넘긴다(마 26:47-56, 요 18:3-13).
금요일 :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유대인들의 요구로 바라바는 놓임을 받고 대신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아 그날로 십자가에 달려 장사되신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시편 31:5에 나와 있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인용한 말씀이다.
시 31:5 /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동안 이 땅에서 사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셨다.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하는 마귀를 대적하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예수님의 마음과 영혼과 인격과 삶 전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아셨고, 그 말씀을 다 성취하며 사셨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 마지막을 기도로 마치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생은 기도의 생애였고, 말씀의 생애였다. 평생을 기도로 산 사람은 기도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죽을 때의 모습과 죽음 이후의 모습은 우리가 일생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은 바로 그가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순간은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결산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왔던 평소의 그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 때에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은 죽을 때에도 믿음으로 죽을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이 세상을 산 사람만이 죽을 때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믿음으로 죽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렸고, 죽은 후 그의 묘비에 ‘하나님의 사람, A. W. 토저’라는 글귀가 새겨졌던 토저 역시 『잃어버린 보물, 예배』(Worship: The Missing Jewel)라는 책에서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나는 내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 이렇게 한다면 나 역시 마지막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지금도 예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라고 고백하면서 평안히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기 위해서는 일생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이렇게 담대하게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드릴 수 있었던 것은 일생 동안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예수님께서는 일생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맡겨주신 모든 일들을 다 이루고 성취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셨다.
우리도 우리 생애 마지막 순간에 주님처럼 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담대하게 부탁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애 동안 주님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런 기도는 아무나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드릴 수 있는 기도가 결코 아니다. 나는 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아름다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 땅을 떠나야겠다고 굳게 결심한다고 해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주님처럼 일생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산 사람들이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셔서 성령의 붙들어주심과 역사하심과 감동하심을 통하여 이런 아름다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시는 것이다.
성경이나 교회사를 보면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런 아름다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 땅을 떠나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스데반은 죽을 때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도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하면서 순교할 때에 이 기도를 하고 이 땅을 떠나갔다. 종교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보헤미아의 존 후스도 중세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화형을 당하면서 순교할 때 이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신실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감옥생활을 했고, 『천로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썼던 청교도 존 번연, 박윤선 목사님 등, 일생동안 믿음으로 살았고, 기도로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으며,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복되고 영광스러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 땅을 떠나갈 수 있었다. 일생을 그렇게 사셨던 주님처럼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생을 마칠 수 있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주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2. 경건하게 살다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과 안나(눅 2:25-38)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낳은 후 정결 예식을 행하고 맏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으로 올라갔을 때, 거기에서 그들은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다.
시므온과 안나는 모두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예수님 당시 여자들은 보통 14살 때 혼인하던 것으로 안나는 결혼한 지 7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된 지 84세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어떤 성경은 과부된 지 84년 동안 살았다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전승(유딧서)에 따르면, 안나는 10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 전승이 맞는다면 안나는 그녀의 생애 거의 마지막 해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 된다. 시므온도 고령의 노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26, 29절 참조). 이들은 모두 인간적으로 보면 노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시므온은 일찍이 메시야를 보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26절). 그러므로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25절). 안나에게는 선지자의 호칭이 확실하게 주어졌고(36절), 일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던 여인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세우는 일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고 신앙의 거장(巨匠)들이었다.
저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증언들을 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의 구원 ... 곧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30-32절)이라고 불렀다. 또한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과 장차 아기 예수님의 죽음이 모친의 마음을 칼로 찌르듯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다(34-35절),
▶ 시므온과 안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지냈다. 우리도 이 시대에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생의 진리이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자신들에게 닥치면, 놀라고, 좌절하고, 우울해진다. 우리 역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앞서 간 많은 신앙의 선진들은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신앙으로 맞아 의연하게 견디며 마지막까지 충성하였다(스펄전, 요나단 에드워즈, 이성봉 목사).
시므온과 안나는 일평생 구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고,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마리아를 위로하고 격려까지 하였다. 젊었을 때보다, 어쩌면 노년에 더 크게 쓰임을 받았다. 노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신앙의 사람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다가 끝까지 믿음을 지켜 신앙인으로 살다가 신앙의 큰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도록 하자.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앙의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경험하지도 못하고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갖고 있지 못한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젊은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수아처럼 패기가 있지만 경험부족으로 모세나 아론, 훌과 같은 신앙의 어른들 기도에 미치지 못하며, 그들의 경건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와 교회에는 시므온과 안나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므온의 모습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 말세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심판의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답은 하나님의 기준 즉 말씀에 입각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갖은 죄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정결한 신부와 같이 구별된 의의 옷으로 단장을 해야 할 것이다.
■ 오늘을 철저히 준비한 것이 내일을 위한 것이 됨 / 독일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바바리아(Bavaria)라는 성에 루드비히(Ludwig) 공작이 살고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혀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어느 날 공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단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기에 앞부분만 기억났다. 3일인지, 3달인지, 3년인지 아무튼 ‘그 안에’(In Three)라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삼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 해주었다. 죽어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을 하며 삼일째 되던 날 높은 탑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공작은 다시 생각했다. ‘삼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그래서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공작은 ‘삼 년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3년 동안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다. 바로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기 위해서 온 곳이다. 삼일, 삼개월, 삼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졌던 것이다. 공작이 독일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행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선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철저히 준비한 기다림’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 것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면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다. 앞으로 몇 십년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3일 뒤에, 3주 뒤에, 3년 뒤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 경건하게 살아가자.
3. 모범적인 삶을 살고도 남은 생애 역시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무엘 선지자
유종의 미(有終의 美)란 말이 있다. 이는 끝을 아름답게 장식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시작이 보잘 것 없고 힘들었어도 끝이 좋으면 그 전체가 모두 좋은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의 후손과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성공적인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자. 내일은 오늘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람에게, 내일은 오늘을 보람있게 준비한 사람에게 밝음으로 찾아올 것이다. 영원한 천국은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사무엘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도했다. 나이가 많아 늙자 백성들은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했다. 하는 수없이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허락하에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라는 걸출한 청년을 왕으로 세우고, 모든 권력을 왕에게 물려주고 백성들에게 고별 설교를 했다(삼상 12:2-3). 사무엘 선지자는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백성들과 약속하였다.
삼상 12:23 / 나도 계속 여러분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드리고, 가장 옳고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내가 만약 기도하기를 그친다면 스스로 죄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사직에서 물러난 후 바로 하나님 말씀 사역에 힘을 기울였다. 선지 생도들을 모아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고향 마을 라마와 기브아에 학교를 세웠다. 나중에는 길갈, 벧엘, 여리고에도 학교가 세워졌다(왕하 2장, 왕상 20:25).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다윗을 차기 왕으로 세우는 일을 했을 뿐 아니라 83세에 죽기 전까지 다윗을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다윗의 든든한 울타리였다.
■ 찬양사역자 김석균 목사의 대표작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많은 곡들이 있다. 사랑의 종소리, 내가 너를 도우리라, 주님의 빚진 자, 주를 처음 만난 날, 돌아온 탕자,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금보다도 귀하다, 나의 참 친구, 고백, 예수가 좋다오 등... 그런데 미쳐 내가 알지 못했던 2가지 곡이 있었다. 2019년 9월부터는 ‘나의 남은 생애는’이란 곡을 알게 되어 많이 활용하고 있다.
4. 실패를 거울 삼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는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변명 아닌 호소로 아뢰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을 것이다. 40년 전 애굽에서 도망쳐 나온 자기로서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애끓는 부르심에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만을 내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큰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며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출 3:7-10).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발을 벗어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애굽에서 내 백성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다. 또 강제노동을 시키는 자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도 다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뼛속 깊이 사무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리라. 내가 내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리라.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개 취급하듯 다루는 모습도 내가 보았다. 그래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14절).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다니요!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주님.’
하나님께서 모세가 해야 할 일과 되어질 일들을 말씀해 주셨다(15-22절).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섬기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내는 표징이 되리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여라. ‘내가 너희가 애굽에서 겪고 있는 일들을 일일이 다 살펴보았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너희가 말할 수 없이 시달리고 있는 애굽에서 내가 너희를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리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이 네 말을 따를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렇게 요청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저 빈들로 나가 사흘 길쯤 되는 곳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궁지에 몰리지 않는 한 애굽 왕은 너희를 밖으로 나가라고 순순히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러 가지로 놀라운 일을 벌여 애굽을 내리쳐야 비로소 너희를 밖으로 내보내리라. 또 애굽 사람들이 이모저모로 너희들을 도와주도록 하마. 그래서 너희가 나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아낙네들은 저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나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붙이, 금붙이, 옷 등을 달라고 해서 자녀들을 꾸밀 것이며, 너희는 이런 식으로 애굽을 털어 가게 될 것이다.”
모세가 이의를 제기하여도 모세를 끝까지 설득시키시는 여호와(출 4:1-9). ‘그들이 저를 믿지도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며 여호와께서 제게 나타나시지 않으셨다고들 말할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졌더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무서워 피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 모세가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자 그의 손에서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 여호와가 네게 나타났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네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냈더니 손에 문둥병이 생겨 눈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여호와께서 ‘다시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꺼내 보아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그대로 하였더니 본디 살갗으로 되돌아와 깨끗해졌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처음 이적을 표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두 번째 이적은 표징으로 믿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않고 네 말을 듣지도 않거든 강물을 조금 떠다가 땅바닥에 쏟아라. 네가 떠다가 쏟아부은 그 물이 땅바닥에서 피로 변하리라.’
모세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는 여호와(출 4:10-17) / 모세가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저는 본디 말주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부터도 그랬습니다만 주께서 이것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지금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굳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 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느냐? 누가 사람의 앞을 보게 하거나 못 보게 하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아무런 걱정말고 가거라. 네가 입을 열 때마다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다 가르쳐 주리라.’ 모세가 말하였다. ‘주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러면 너의 형인 레위 사람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가 얼마나 말주변이 좋은지 내가 다 알고 있다. 그가 너를 만나러 올 터인데 그가 네 얼굴을 볼 때 무척 기뻐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해야 할 말을 그에게 들려주어라. 나는 네가 말할 때에나 그가 말할 때에나 힘이 되어 주리라. 너희가 무슨 일을 해나가야 할지도 가르쳐 주리라. 그가 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을 해줄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어 네가 말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따라서 말할 것이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이적을 베풀어라.’
▶ 누구를 막론하고 경고망동(輕擧妄動)하는 것은 금물이다 / 대부분 마음에 조그마한 감동을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가르쳐 왔다. 물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모세처럼 적든 많든 사람의 지도자가 되려면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잘못된 것은 회개하여 고치고, 나약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채워 나가야 한다. 자신의 주제파악도 못하고 충동에 못이겨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경우라면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외식하는 맹인과 같은 지도자로 남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모세의 경우를 볼 때, 모세가 염려한 대로 얼마나 많은 배신과 살해의 위협까지 받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사실 큰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핍박은 모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볼 때, 진리의 길을 가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예언으로 베드로와 요한도 핍박의 문턱을 넘어 사도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마 10:16-25, 막 13:9-13, 눅21:12-17).
모세가 바로보다 더 염려하며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역이었다. 누구보다 모세의 40년 전에 있었던 쓰라린 과거가 있었다(출 2:11-14). 그렇지만 모세는 이번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아픔을 털어버릴 수가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대화하는 중에 큰 깨우침이 있었다. /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제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장면은 성경에는 없다. 출애굽기 4:17을 보면, 하나님과의 대화를 마친 후 모세는 곧바로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서 말하였다. ‘애굽에 있는 내 피붙이에게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에 이드로는 모세에게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미디안으로 돌아간 것인가? 아니다. 추측하건대 모세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었다. 자신이 겪은 쓰라린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출 3:7-9 /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애굽에서 내 백성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다. 또 강제노동을 시키는 자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도 다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뼛속 깊이 사무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리라. 내가 내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리라.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리라. 9)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개취급하듯 다루는 모습도 내가 보았다.
모세는 지금까지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무정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듣는 순간 자신의 의심과 부족함을 깨닫고 사실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엄 앞에 엎드린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하심 앞에 엎드린 것이다.
출 3:10-12 / 그래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다니요!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주님.' 12)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섬기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내는 표징이 되리라.'
▶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위치에 있었다면 ‘할렐루야!’하며 곧 바로 일어나 애굽으로 달려갔겠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감사를 돌리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난 모세가 정작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누구보다 애굽에서 왕자로서의 많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모세로서는 영적 지도자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기본의 결핍이었다.
신명기 9장을 모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으며, 최소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라면 이러한 마음은 필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명기 9:7-29을 보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인격이 무엇인가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신 9:7-20 [호렙산에서 불순종한 백성] / 여러분은 광야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얼마나 자주 격노케 하였던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항상 여호와께 불평하며 거역하였습니다. 8) 호렙산에서는 여러분이 어찌나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던지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진멸시키려고 결심하실 정도로 진노하셨습니다. 9) 그때 나는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맺으신 계약의 돌판을 받으려고 호렙산으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나는 밤낮 40일 동안 산 위에 머무르면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10)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두 개를 주셨는데 여러분이 산기슭에 모여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 산의 불꽃 속에서 여러분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하신 돌판이었습니다. 11) 밤낮 40일이 지났을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계약의 돌판 두 개를 주시며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일어나 이 산에서 빨리 내려가거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해 낸 내 백성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벌써 떠나 자기들이 섬길 신상을 부어 만들었다.’ 13) 또 여호와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못되고 고집 센 백성인가를 네가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14)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그들을 진멸시켜 세상에서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겠다. 그 대신에 내가 네 후손으로 그들보다 더 강하고 수도 많은 백성을 만들겠다.’ 15) … 18) 그리고 나는 전과 같이 밤낮 40일 동안 여호와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앞에서 끔찍한 일을 저질러 주님의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지은 모든 죄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19) 여호와께서 크게 화를 내시어 여러분을 전멸시켜 버리실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20) 여호와께서 전에 아론에게도 몹시 화를 내시고 그를 죽이려 하셨으나 그때 내가 그를 위해서 주께 간구하였습니다.
참고 [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빌다] 출 32:30-33 / 이튿날 모세가 무리에게 말하였다. ‘너희의 허물이 너무나도 크다. 그래도 혹시 너희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내가 여호와께로 올라가 보아야겠다.’ 31) 모세가 이렇게 말하고 여호와께 가서 여쭈었다. ‘주님, 이 무리가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주께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32) 이들의 허물이 엄청나게 큰 줄은 아오나 아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소서. 주께서 이들의 허물을 용서할 마음이 없으시거든 주께서 손수 쓰신 책에서 저의 이름도 함께 지워 버리소서.’ 33)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앞으로 누구든지 나를 거슬러 못된 짓을 하는 자는 그 이름을 내가 쓴 책에서 지워 버리겠다.
모세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모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모세는 예수님처럼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모세가 보통 사람과 남다른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점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그를 남달리 들어 쓰셨을까? 모세의 남다른 자질을 대표적으로 하나 꼽으라면 온유함으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셨다(민 12:3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혈기로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야 했다(출 2:11-12)
온유의 대명사라고 해도 괜찮을 모세가 40년의 사역 끝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나 자신부터 수시로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민 20:1-13 / 그들이 진을 친 가데스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자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대들면서 3)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 이스라엘 형제들이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우리도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소! 4) 당신들은 어째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이 무리를 광야로 끌어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게 하는거요? 5)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렇게 험악한 광야까지 끌고 나왔단 말이오? 이 거친 광야에서는 농사지을 곳도 없고, 무화과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못하오. 더구나 마실 물마저 없지 않소!' 6) 모세와 아론이 무리를 떠나 만남의 장막문 앞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 앞에 찬란하게 빛났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9)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세가 가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11) 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왔다.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불평하다'라는 뜻으로 므리바라고 불렀지만, 여호와께서는 물이 터져 나오게 함으로써 당신이 거룩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임을 드러내신 곳이기도 하다.
모세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도 혈기 때문에 그토록 숙원이던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물론 모세에게 가나안 입성이 허락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과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중요 원인 중 하나가 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모세가 습관적으로 혈기를 부리는 혈기쟁이는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온유한 사람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혈기를 부려서 화를 초래했다. 과거에도 시내산에서 40일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부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다가 백성들이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제물을 바치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떠들며 흥겹게 뛰노는 타락한 광경을 목도했을 때 혈기를 못 참고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두 돌판이 박살내고 말았다(출 32:15-19). 그 후로 모세는 온유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가데스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그만 화풀이로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커다란 잘못은 분명하다. 물은 하나님께서 내어주시는 것이지 자신이 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물을 내는 양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며 분노가 폭발하였다. 사람이 혈기를 부리면서 말을 하게 되면 조심성이 없어지고 엉뚱한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럴 때 쏟아낸 말은 다시 쓸어담지 못하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홍해를 가를 때처럼 지팡이를 하나님 권위의 상징으로 쳐들고서 너희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선언했어야 했다. 백성들로 지난 40년간 비록 광야이긴 해도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게 인도한 것이 얼마나 크고도 풍성한 은혜였는지 깨달으라는 뜻으로 말이다.
모세가 화낸 사실보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했지만, 지금은 단지 말로 명하라고 지시한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광야 생활을 마감하는 시점에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은총을 바라보면서 이제부터는 떡으로만 사는 백성이 아닌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 말을 듣지 않는다고 야단만 치는 것이 아닌 저들로 하여금 강팍한 자신들을 위해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성숙한 백성다웁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달라는 권면을 했어야 했다.
광야 40년을 종결짓는 마지막 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인 출애굽 40년 11월 1일에 신명기가 기록되었는데, 이때 모세는 심오한 말을 했다. 그중에 신명기 8:1-6을 보면서, 가데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바위를 명하여 물을 내면서 이런 말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신 8:1-6 /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모든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살아남아서 번성하게 되고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에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4) 지난 40년 동안 여러분의 옷이 해진 일이 없었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튼 일이 없었습니다. 5)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로만 걸어가면서 주님을 경외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유언과 같은 말을 하면서 당부하는 모세의 말을 들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40년 동안 자기네들을 이끌어온 지도자 모세가 그토록 소원했던 가나안에 함께 못 들어가는 것을 미안함을 넘어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에 자손들에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믿고 전적으로 따를 것을 당부하였을 것이다.
▶ 모세의 이어지는 유언과 같은 권면(신 8:7-20)은 저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신 8:7-18 /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러분을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땅에서든 들녘에서든 산지에서든 똑같이 깊은 곳에서 샘물과 시냇물들이 솟아날 것입니다. 8) 그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열고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입니다. 9) 그 땅에서는 먹는 데에도 부족한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 땅의 돌에는 철이 들어 있고 어느 산에서나 구리를 캘 수 있습니다. 10) 여러분은 거기서 풍족하게 먹고 행복해지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땅을 보며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11)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주님의 명령과 계명과 규정들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잠시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여러분이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며 13) 소 떼와 양 떼도 불어나고 은과 금도 많아지고 여러분의 모든 재산이 많아질 때에 14) 여러분은 절대로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마십시오. 주께서는 여러분을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15) 저 끝없이 넓고 위험한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셨고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물 한 방울 없이 메마른 곳에서 여러분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바위에서 물을 먹여 주시고 16) 광야에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조상들도 모르던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의 고집을 꺾고 여러분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시려고 굶주리고 목마른 고생길로 인도하셨으나 이것은 나중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7) 여러분은 평안해지더라도 `이 모든 재산은 내 손으로 일해서 모았고 내가 잘나서 부유하게 되었다.' 하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18) 오히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모든 재산을 얻었다는 것을 아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부강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유언으로 축복을 빌었다(신 33:1-29). 그리고 신명기 34장에서 모세는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이렇게 모세는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신 34:1-12 / 그 뒤로 모세가 모압 평원에서 느보 산지로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자 여호와께서 그 앞으로 펼쳐진 온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요단강 동쪽의 길르앗 지역과 거기서 북쪽으로 단 지파에 이르는 전지역과 2) 거기서 요단강 서쪽으로 납달리 지파의 온 지역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온 지역과 지중해에까지 이르는 유다 지파의 온 땅과 3) 거기서 남쪽으로 펼쳐진 메마른 네겝 지역과 종려나무의 성읍인 여리고에서부터 사해 남단의 소알 성읍에 이르기까지 요단강 계곡의 온 주변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4)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면서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그 땅을 네게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네가 직접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5) 이리하여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종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어 6) 모압 땅의 벧브올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나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은 지금껏 아무도 모른다. 7) 모세는 죽을 때 나이가 120세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를 위하여 슬퍼하며 30일 동안 애곡하였다. … 10) 그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한 명도 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친히 얼굴을 대면하여 사귀신 예언자였다. 11) 그가 애굽에서 바로와 그의 대신들과 그의 온 백성에게 여호와의 권능을 보여줄 때에 행한 것과 같이 놀라운 이적과 기사들을 행한 예언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12)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토록 엄청나고 두려운 일들을 행한 예언자는 그 후 한 명도 없었다.
모세에 대한 설교를 마감하면서 모세와 나 자신을 비교할 때에 무엇이라고 표현조차 못하겠다. 그러나 할 말이 있다면 ‘모세를 닮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것이다.’라는 말만은 하련다.
5.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베드로와 요한도 쓰시는 하나님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
행 3:1-10 / 어느 날 오후 베드로와 요한은 3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2)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였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하나가 실려 왔다. 그는 날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살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다. 4)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여겨보았다. 이윽고 베드로가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하자 5)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6)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8)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9)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걸어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10) 그가 바로 그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날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인 것을 알자 너무도 놀라 말을 잃었다.
사도행전 3:1-10을 만들어 낸 베드로와 요한이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어 그런 일이 기록됨으로써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례가 되고 있다. 요엘 2:28-29의 말씀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120여 명의 성도들에게 임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다.
행 2:17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의 비를 부어 준 다음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여러 가지 꿈을 꿀 것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온갖 환상을 볼 것이다. 18) 또 그날이 오면 너희의 남녀 노예들에게도 똑같이 나의 영을 부어 주고
애즈베리대학의 영적 대각성 / 지난 2월 8일에 시작해 20일(약 13일)에 공식적인 예배를 마친 미국 켄터키주 윌모어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의 영적 대각성 현상이 전 세계 부흥 운동으로 확산하는 중이다.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이었는지 기독교계를 넘어 각계각층의 관심은 물론 CNN 뉴스에서조차 이를 보도했다. 각국 각지에서는 ‘Asbury Revival’(애즈베리 대학교의 부흥)이라고 불리는 모임에 참여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천의 인파가 몰렸다. 무려 현장 참여자 중 60% 이상이 타지역 출신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애즈베리 대각성 모임은 이곳을 찾는 것을 넘어 테네시주 리 대학교, 인디애나주 앤더슨 대학교, 오하이오주 시더빌 대학교, 앨라배마주 샘포드 대학교 등 다른 기독교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번졌다. 이를 보고 크리스천 포스트(CP)는 켄터키주 안팎의 다른 지역을 향해 자발적 예배 형태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현상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애즈베리 휴즈 강당(Hughes Auditorium)에서 진행된 정기 수요 채플을 통해 일어났다. 설교자는 잭 미어크립스(Jack Meerkreebs)라는 젊은 목사였는데, 그는 로마서 12장을 본문으로 ‘행동하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고, 설교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뉘앙스로 설교를 마쳤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잭 목사의 선포에 이어 예배가 마쳐질 무렵 소수(약 20명) 학생들에게 ‘머물라’라는 음성이 강하게 들렸고, 이 학생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성에 순종하여 기도하다가 폭발적인 대규모 집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1,500석이나 되는 휴즈 강당은 물론 학내 다른 집회 장소인 에스테스 채플과 맥케나 채플까지 순식간에 채워졌다. 또 SNS와 유튜브 등 각종 미디어를 접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수많은 인파로 강당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캠퍼스 잔디밭과 인근 주변에서 자발적인 기도회를 통해 같은 영적 현상을 경험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애즈베리 대학교에 이런 영적 부흥 현상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 애즈베리 대학교는 1970년 2월, 학교 내에서 열린 기도회의 영향으로 2,000여 개의 전도팀이 조직되어 130여 곳의 대학 캠퍼스로 파송하기도 했다.
애즈베리대의 부흥 역사와 다양한 시각 / 애즈베리 대학교의 부흥 역사를 살펴보면, 1905년 2월(남학생 기숙사에서 시작된 기도 모임이 학교와 지역사회로 확산), 1908년 2월(채플 시간에 누군가의 기도로 2주간 중보기도 지속), 1921년 2월(예정된 부흥 집회의 3일 초과), 1950년 2월(한 학생의 죄 고백의 전파로 5일간 기도와 간증 지속, 학생 전도팀이 결성, 5만 명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 1958년 3월(학생들의 금식기도로 63시간 기도회 지속), 1970년 2월(채플 시간 어느 학생의 간증으로 영적 갱신, 기도, 기쁨 현상이 6일간 지속, 2,000여 명의 학생이 지역사회와 미국 내 130개 대학의 전도자로 참여), 1992년 3월(채플 시간 한 학생의 죄 고백으로 5일간 기도와 찬양 지속), 2006년 2월(4일간 학생들의 예배, 기도, 찬양 지속) 등 이번 대각성 모임을 합하면 1900년대 이후 모두 아홉 번의 부흥 운동의 경험을 이어오고 있다. 덧붙이면, 공교롭게도 이 모두가 2월과 3월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교회력으로 보면 사순절 언저리에 있거나 겹치기도 한다.
결 론 / ■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인도의 성자라 불린다. 그는 89세에 뇌일혈로 쓰러졌다. 선교회는 그를 강제로 미국으로 송환하여 입원하여 치료받게 하였다. 다시 일어났을 때 모든 사람이 인도로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지만 90세에 다시 인도로 돌아가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종지부(period)를 찍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가 쉼표(comma)를 찍지 않는다’고 하였다.
▮ 유종의 미(有終의 美)란 말이 있다. 끝을 아름답게 장식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시작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었어도 끝이 좋지 못하면 그 전체가 다 실패한 것이요 반대로 시작이 보잘 것 없고 힘들었어도 끝이 좋으면 그 전체가 모두 좋은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루라는 시작과 끝을 주셨고 또 월(月)과 한 해(年)를 주시고 일생이라는 기회를 주셔서 시작과 끝을 살게 하셨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할 때도 혹 낮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고 하셨으며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마 6:34)고 하셨다. 하루 동안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어도 그 날 일은 그 날에 마감하고 좋은 쪽으로 마무리를 해야 내일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의 후손과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성공적인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자. 내일은 오늘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람에게, 내일은 오늘을 보람있게 준비한 사람에게 밝음으로 찾아올 것이다. 영원한 천국은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2023년 4월 23일 / 요한복음 12:23-24
요 12:23-24 /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이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밀알 하나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한 알의 죽은 밀알에서 많은 밀알이 맺히듯이 새 생명들을 풍성하게 거두게 될 것이다.’
1. 예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한주간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마지막한 주간은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한 수난의 한 주간이었으며 부활하여 죄와 사망을이기신 승리의 시간이었다. 그 하루하루를 살펴보자.
주일 :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믿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송하며 영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심판으로 무너질 성전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마 21:1-11, 요 12:12-19).
월요일 : 예수님은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아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 모의하기 시작하였다(마 21:12-13. 눅 19:45-46).
화, 수요일 :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서기관과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의 간교한 질문들에 답변하시며 성전의 파괴와 대환란, 종말의 징조들, 제자들의 박해받을 일과 재림 등을 예언하시며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가룟 유다가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다(마 26:1-5, 막 14:1-11).
목요일 : 유월절 저녁이다. 예수는 어느 가정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다. 서로 누가 터 크냐는 논쟁을 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서로 섬겨야 할 것을 친히 보여주셨고, 배반자 유다를 지적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번 예수를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잔을 받으신다. 유다가 무리와 함께 올라와 예수님을 체포, 대제사장에게 넘긴다(마 26:47-56, 요 18:3-13).
금요일 :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유대인들의 요구로 바라바는 놓임을 받고 대신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아 그날로 십자가에 달려 장사되신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시편 31:5에 나와 있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인용한 말씀이다.
시 31:5 /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동안 이 땅에서 사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셨다.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하는 마귀를 대적하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예수님의 마음과 영혼과 인격과 삶 전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아셨고, 그 말씀을 다 성취하며 사셨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 마지막을 기도로 마치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생은 기도의 생애였고, 말씀의 생애였다. 평생을 기도로 산 사람은 기도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죽을 때의 모습과 죽음 이후의 모습은 우리가 일생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은 바로 그가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순간은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결산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왔던 평소의 그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 때에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은 죽을 때에도 믿음으로 죽을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이 세상을 산 사람만이 죽을 때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믿음으로 죽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렸고, 죽은 후 그의 묘비에 ‘하나님의 사람, A. W. 토저’라는 글귀가 새겨졌던 토저 역시 『잃어버린 보물, 예배』(Worship: The Missing Jewel)라는 책에서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나는 내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 이렇게 한다면 나 역시 마지막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했으며, 지금도 예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라고 고백하면서 평안히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기 위해서는 일생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이렇게 담대하게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드릴 수 있었던 것은 일생 동안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예수님께서는 일생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맡겨주신 모든 일들을 다 이루고 성취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셨다.
우리도 우리 생애 마지막 순간에 주님처럼 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담대하게 부탁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애 동안 주님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런 기도는 아무나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드릴 수 있는 기도가 결코 아니다. 나는 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아름다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 땅을 떠나야겠다고 굳게 결심한다고 해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주님처럼 일생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산 사람들이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셔서 성령의 붙들어주심과 역사하심과 감동하심을 통하여 이런 아름다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시는 것이다.
성경이나 교회사를 보면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런 아름다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 땅을 떠나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스데반은 죽을 때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도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하면서 순교할 때에 이 기도를 하고 이 땅을 떠나갔다. 종교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보헤미아의 존 후스도 중세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화형을 당하면서 순교할 때 이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신실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감옥생활을 했고, 『천로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썼던 청교도 존 번연, 박윤선 목사님 등, 일생동안 믿음으로 살았고, 기도로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으며,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복되고 영광스러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 땅을 떠나갈 수 있었다. 일생을 그렇게 사셨던 주님처럼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생을 마칠 수 있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주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2. 경건하게 살다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과 안나(눅 2:25-38)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낳은 후 정결 예식을 행하고 맏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으로 올라갔을 때, 거기에서 그들은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다.
시므온과 안나는 모두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예수님 당시 여자들은 보통 14살 때 혼인하던 것으로 안나는 결혼한 지 7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된 지 84세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어떤 성경은 과부된 지 84년 동안 살았다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전승(유딧서)에 따르면, 안나는 10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 전승이 맞는다면 안나는 그녀의 생애 거의 마지막 해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 된다. 시므온도 고령의 노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26, 29절 참조). 이들은 모두 인간적으로 보면 노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시므온은 일찍이 메시야를 보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26절). 그러므로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25절). 안나에게는 선지자의 호칭이 확실하게 주어졌고(36절), 일평생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던 여인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세우는 일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고 신앙의 거장(巨匠)들이었다.
저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증언들을 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의 구원 ... 곧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30-32절)이라고 불렀다. 또한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과 장차 아기 예수님의 죽음이 모친의 마음을 칼로 찌르듯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다(34-35절),
▶ 시므온과 안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지냈다. 우리도 이 시대에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생의 진리이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자신들에게 닥치면, 놀라고, 좌절하고, 우울해진다. 우리 역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앞서 간 많은 신앙의 선진들은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신앙으로 맞아 의연하게 견디며 마지막까지 충성하였다(스펄전, 요나단 에드워즈, 이성봉 목사).
시므온과 안나는 일평생 구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고,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마리아를 위로하고 격려까지 하였다. 젊었을 때보다, 어쩌면 노년에 더 크게 쓰임을 받았다. 노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신앙의 사람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다가 끝까지 믿음을 지켜 신앙인으로 살다가 신앙의 큰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도록 하자.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앙의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경험하지도 못하고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갖고 있지 못한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젊은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수아처럼 패기가 있지만 경험부족으로 모세나 아론, 훌과 같은 신앙의 어른들 기도에 미치지 못하며, 그들의 경건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와 교회에는 시므온과 안나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므온의 모습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 말세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심판의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답은 하나님의 기준 즉 말씀에 입각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갖은 죄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정결한 신부와 같이 구별된 의의 옷으로 단장을 해야 할 것이다.
■ 오늘을 철저히 준비한 것이 내일을 위한 것이 됨 / 독일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바바리아(Bavaria)라는 성에 루드비히(Ludwig) 공작이 살고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혀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어느 날 공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단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기에 앞부분만 기억났다. 3일인지, 3달인지, 3년인지 아무튼 ‘그 안에’(In Three)라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삼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 해주었다. 죽어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을 하며 삼일째 되던 날 높은 탑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공작은 다시 생각했다. ‘삼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그래서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공작은 ‘삼 년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3년 동안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다. 바로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기 위해서 온 곳이다. 삼일, 삼개월, 삼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졌던 것이다. 공작이 독일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행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선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철저히 준비한 기다림’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 것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면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다. 앞으로 몇 십년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3일 뒤에, 3주 뒤에, 3년 뒤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 경건하게 살아가자.
3. 모범적인 삶을 살고도 남은 생애 역시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무엘 선지자
유종의 미(有終의 美)란 말이 있다. 이는 끝을 아름답게 장식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시작이 보잘 것 없고 힘들었어도 끝이 좋으면 그 전체가 모두 좋은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의 후손과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성공적인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자. 내일은 오늘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람에게, 내일은 오늘을 보람있게 준비한 사람에게 밝음으로 찾아올 것이다. 영원한 천국은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사무엘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도했다. 나이가 많아 늙자 백성들은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했다. 하는 수없이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허락하에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라는 걸출한 청년을 왕으로 세우고, 모든 권력을 왕에게 물려주고 백성들에게 고별 설교를 했다(삼상 12:2-3). 사무엘 선지자는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백성들과 약속하였다.
삼상 12:23 / 나도 계속 여러분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드리고, 가장 옳고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내가 만약 기도하기를 그친다면 스스로 죄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사직에서 물러난 후 바로 하나님 말씀 사역에 힘을 기울였다. 선지 생도들을 모아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고향 마을 라마와 기브아에 학교를 세웠다. 나중에는 길갈, 벧엘, 여리고에도 학교가 세워졌다(왕하 2장, 왕상 20:25).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다윗을 차기 왕으로 세우는 일을 했을 뿐 아니라 83세에 죽기 전까지 다윗을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다윗의 든든한 울타리였다.
■ 찬양사역자 김석균 목사의 대표작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많은 곡들이 있다. 사랑의 종소리, 내가 너를 도우리라, 주님의 빚진 자, 주를 처음 만난 날, 돌아온 탕자,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금보다도 귀하다, 나의 참 친구, 고백, 예수가 좋다오 등... 그런데 미쳐 내가 알지 못했던 2가지 곡이 있었다. 2019년 9월부터는 ‘나의 남은 생애는’이란 곡을 알게 되어 많이 활용하고 있다.
4. 실패를 거울 삼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는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변명 아닌 호소로 아뢰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을 것이다. 40년 전 애굽에서 도망쳐 나온 자기로서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애끓는 부르심에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만을 내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큰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며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출 3:7-10).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발을 벗어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애굽에서 내 백성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다. 또 강제노동을 시키는 자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도 다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뼛속 깊이 사무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리라. 내가 내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리라.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개 취급하듯 다루는 모습도 내가 보았다. 그래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14절).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다니요!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주님.’
하나님께서 모세가 해야 할 일과 되어질 일들을 말씀해 주셨다(15-22절).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섬기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내는 표징이 되리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여라. ‘내가 너희가 애굽에서 겪고 있는 일들을 일일이 다 살펴보았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너희가 말할 수 없이 시달리고 있는 애굽에서 내가 너희를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리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이 네 말을 따를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렇게 요청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저 빈들로 나가 사흘 길쯤 되는 곳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궁지에 몰리지 않는 한 애굽 왕은 너희를 밖으로 나가라고 순순히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러 가지로 놀라운 일을 벌여 애굽을 내리쳐야 비로소 너희를 밖으로 내보내리라. 또 애굽 사람들이 이모저모로 너희들을 도와주도록 하마. 그래서 너희가 나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아낙네들은 저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나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붙이, 금붙이, 옷 등을 달라고 해서 자녀들을 꾸밀 것이며, 너희는 이런 식으로 애굽을 털어 가게 될 것이다.”
모세가 이의를 제기하여도 모세를 끝까지 설득시키시는 여호와(출 4:1-9). ‘그들이 저를 믿지도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며 여호와께서 제게 나타나시지 않으셨다고들 말할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졌더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무서워 피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 모세가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자 그의 손에서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 여호와가 네게 나타났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네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냈더니 손에 문둥병이 생겨 눈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여호와께서 ‘다시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꺼내 보아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그대로 하였더니 본디 살갗으로 되돌아와 깨끗해졌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처음 이적을 표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두 번째 이적은 표징으로 믿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않고 네 말을 듣지도 않거든 강물을 조금 떠다가 땅바닥에 쏟아라. 네가 떠다가 쏟아부은 그 물이 땅바닥에서 피로 변하리라.’
모세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는 여호와(출 4:10-17) / 모세가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저는 본디 말주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부터도 그랬습니다만 주께서 이것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지금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굳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 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느냐? 누가 사람의 앞을 보게 하거나 못 보게 하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아무런 걱정말고 가거라. 네가 입을 열 때마다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다 가르쳐 주리라.’ 모세가 말하였다. ‘주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러면 너의 형인 레위 사람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가 얼마나 말주변이 좋은지 내가 다 알고 있다. 그가 너를 만나러 올 터인데 그가 네 얼굴을 볼 때 무척 기뻐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해야 할 말을 그에게 들려주어라. 나는 네가 말할 때에나 그가 말할 때에나 힘이 되어 주리라. 너희가 무슨 일을 해나가야 할지도 가르쳐 주리라. 그가 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을 해줄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어 네가 말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따라서 말할 것이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이적을 베풀어라.’
▶ 누구를 막론하고 경고망동(輕擧妄動)하는 것은 금물이다 / 대부분 마음에 조그마한 감동을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가르쳐 왔다. 물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모세처럼 적든 많든 사람의 지도자가 되려면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잘못된 것은 회개하여 고치고, 나약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채워 나가야 한다. 자신의 주제파악도 못하고 충동에 못이겨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경우라면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외식하는 맹인과 같은 지도자로 남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모세의 경우를 볼 때, 모세가 염려한 대로 얼마나 많은 배신과 살해의 위협까지 받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사실 큰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핍박은 모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볼 때, 진리의 길을 가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예언으로 베드로와 요한도 핍박의 문턱을 넘어 사도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마 10:16-25, 막 13:9-13, 눅21:12-17).
모세가 바로보다 더 염려하며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역이었다. 누구보다 모세의 40년 전에 있었던 쓰라린 과거가 있었다(출 2:11-14). 그렇지만 모세는 이번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아픔을 털어버릴 수가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대화하는 중에 큰 깨우침이 있었다. /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제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장면은 성경에는 없다. 출애굽기 4:17을 보면, 하나님과의 대화를 마친 후 모세는 곧바로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서 말하였다. ‘애굽에 있는 내 피붙이에게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에 이드로는 모세에게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미디안으로 돌아간 것인가? 아니다. 추측하건대 모세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었다. 자신이 겪은 쓰라린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출 3:7-9 /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애굽에서 내 백성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다. 또 강제노동을 시키는 자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도 다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뼛속 깊이 사무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리라. 내가 내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리라.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리라. 9)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개취급하듯 다루는 모습도 내가 보았다.
모세는 지금까지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무정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듣는 순간 자신의 의심과 부족함을 깨닫고 사실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엄 앞에 엎드린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하심 앞에 엎드린 것이다.
출 3:10-12 / 그래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다니요!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주님.' 12)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섬기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내는 표징이 되리라.'
▶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위치에 있었다면 ‘할렐루야!’하며 곧 바로 일어나 애굽으로 달려갔겠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감사를 돌리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난 모세가 정작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누구보다 애굽에서 왕자로서의 많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던 모세로서는 영적 지도자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기본의 결핍이었다.
신명기 9장을 모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으며, 최소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라면 이러한 마음은 필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명기 9:7-29을 보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인격이 무엇인가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신 9:7-20 [호렙산에서 불순종한 백성] / 여러분은 광야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얼마나 자주 격노케 하였던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항상 여호와께 불평하며 거역하였습니다. 8) 호렙산에서는 여러분이 어찌나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던지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진멸시키려고 결심하실 정도로 진노하셨습니다. 9) 그때 나는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맺으신 계약의 돌판을 받으려고 호렙산으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나는 밤낮 40일 동안 산 위에 머무르면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10)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두 개를 주셨는데 여러분이 산기슭에 모여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 산의 불꽃 속에서 여러분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하신 돌판이었습니다. 11) 밤낮 40일이 지났을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계약의 돌판 두 개를 주시며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일어나 이 산에서 빨리 내려가거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해 낸 내 백성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벌써 떠나 자기들이 섬길 신상을 부어 만들었다.’ 13) 또 여호와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못되고 고집 센 백성인가를 네가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14)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그들을 진멸시켜 세상에서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겠다. 그 대신에 내가 네 후손으로 그들보다 더 강하고 수도 많은 백성을 만들겠다.’ 15) … 18) 그리고 나는 전과 같이 밤낮 40일 동안 여호와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앞에서 끔찍한 일을 저질러 주님의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지은 모든 죄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19) 여호와께서 크게 화를 내시어 여러분을 전멸시켜 버리실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20) 여호와께서 전에 아론에게도 몹시 화를 내시고 그를 죽이려 하셨으나 그때 내가 그를 위해서 주께 간구하였습니다.
참고 [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빌다] 출 32:30-33 / 이튿날 모세가 무리에게 말하였다. ‘너희의 허물이 너무나도 크다. 그래도 혹시 너희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내가 여호와께로 올라가 보아야겠다.’ 31) 모세가 이렇게 말하고 여호와께 가서 여쭈었다. ‘주님, 이 무리가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주께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32) 이들의 허물이 엄청나게 큰 줄은 아오나 아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소서. 주께서 이들의 허물을 용서할 마음이 없으시거든 주께서 손수 쓰신 책에서 저의 이름도 함께 지워 버리소서.’ 33)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앞으로 누구든지 나를 거슬러 못된 짓을 하는 자는 그 이름을 내가 쓴 책에서 지워 버리겠다.
모세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모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모세는 예수님처럼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모세가 보통 사람과 남다른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점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그를 남달리 들어 쓰셨을까? 모세의 남다른 자질을 대표적으로 하나 꼽으라면 온유함으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셨다(민 12:3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혈기로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야 했다(출 2:11-12)
온유의 대명사라고 해도 괜찮을 모세가 40년의 사역 끝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나 자신부터 수시로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민 20:1-13 / 그들이 진을 친 가데스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자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대들면서 3)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 이스라엘 형제들이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우리도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소! 4) 당신들은 어째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이 무리를 광야로 끌어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게 하는거요? 5)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렇게 험악한 광야까지 끌고 나왔단 말이오? 이 거친 광야에서는 농사지을 곳도 없고, 무화과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못하오. 더구나 마실 물마저 없지 않소!' 6) 모세와 아론이 무리를 떠나 만남의 장막문 앞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 앞에 찬란하게 빛났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9)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세가 가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11) 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왔다.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불평하다'라는 뜻으로 므리바라고 불렀지만, 여호와께서는 물이 터져 나오게 함으로써 당신이 거룩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임을 드러내신 곳이기도 하다.
모세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도 혈기 때문에 그토록 숙원이던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물론 모세에게 가나안 입성이 허락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과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중요 원인 중 하나가 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모세가 습관적으로 혈기를 부리는 혈기쟁이는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온유한 사람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혈기를 부려서 화를 초래했다. 과거에도 시내산에서 40일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부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다가 백성들이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제물을 바치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떠들며 흥겹게 뛰노는 타락한 광경을 목도했을 때 혈기를 못 참고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두 돌판이 박살내고 말았다(출 32:15-19). 그 후로 모세는 온유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가데스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그만 화풀이로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커다란 잘못은 분명하다. 물은 하나님께서 내어주시는 것이지 자신이 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물을 내는 양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며 분노가 폭발하였다. 사람이 혈기를 부리면서 말을 하게 되면 조심성이 없어지고 엉뚱한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럴 때 쏟아낸 말은 다시 쓸어담지 못하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홍해를 가를 때처럼 지팡이를 하나님 권위의 상징으로 쳐들고서 너희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선언했어야 했다. 백성들로 지난 40년간 비록 광야이긴 해도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게 인도한 것이 얼마나 크고도 풍성한 은혜였는지 깨달으라는 뜻으로 말이다.
모세가 화낸 사실보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했지만, 지금은 단지 말로 명하라고 지시한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광야 생활을 마감하는 시점에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은총을 바라보면서 이제부터는 떡으로만 사는 백성이 아닌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 말을 듣지 않는다고 야단만 치는 것이 아닌 저들로 하여금 강팍한 자신들을 위해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성숙한 백성다웁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달라는 권면을 했어야 했다.
광야 40년을 종결짓는 마지막 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인 출애굽 40년 11월 1일에 신명기가 기록되었는데, 이때 모세는 심오한 말을 했다. 그중에 신명기 8:1-6을 보면서, 가데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바위를 명하여 물을 내면서 이런 말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신 8:1-6 /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모든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살아남아서 번성하게 되고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에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4) 지난 40년 동안 여러분의 옷이 해진 일이 없었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튼 일이 없었습니다. 5)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로만 걸어가면서 주님을 경외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유언과 같은 말을 하면서 당부하는 모세의 말을 들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40년 동안 자기네들을 이끌어온 지도자 모세가 그토록 소원했던 가나안에 함께 못 들어가는 것을 미안함을 넘어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에 자손들에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믿고 전적으로 따를 것을 당부하였을 것이다.
▶ 모세의 이어지는 유언과 같은 권면(신 8:7-20)은 저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신 8:7-18 /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러분을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땅에서든 들녘에서든 산지에서든 똑같이 깊은 곳에서 샘물과 시냇물들이 솟아날 것입니다. 8) 그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열고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입니다. 9) 그 땅에서는 먹는 데에도 부족한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 땅의 돌에는 철이 들어 있고 어느 산에서나 구리를 캘 수 있습니다. 10) 여러분은 거기서 풍족하게 먹고 행복해지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땅을 보며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11)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주님의 명령과 계명과 규정들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잠시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여러분이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며 13) 소 떼와 양 떼도 불어나고 은과 금도 많아지고 여러분의 모든 재산이 많아질 때에 14) 여러분은 절대로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마십시오. 주께서는 여러분을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15) 저 끝없이 넓고 위험한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셨고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물 한 방울 없이 메마른 곳에서 여러분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바위에서 물을 먹여 주시고 16) 광야에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조상들도 모르던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의 고집을 꺾고 여러분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시려고 굶주리고 목마른 고생길로 인도하셨으나 이것은 나중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7) 여러분은 평안해지더라도 `이 모든 재산은 내 손으로 일해서 모았고 내가 잘나서 부유하게 되었다.' 하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18) 오히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모든 재산을 얻었다는 것을 아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부강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유언으로 축복을 빌었다(신 33:1-29). 그리고 신명기 34장에서 모세는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이렇게 모세는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신 34:1-12 / 그 뒤로 모세가 모압 평원에서 느보 산지로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자 여호와께서 그 앞으로 펼쳐진 온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요단강 동쪽의 길르앗 지역과 거기서 북쪽으로 단 지파에 이르는 전지역과 2) 거기서 요단강 서쪽으로 납달리 지파의 온 지역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온 지역과 지중해에까지 이르는 유다 지파의 온 땅과 3) 거기서 남쪽으로 펼쳐진 메마른 네겝 지역과 종려나무의 성읍인 여리고에서부터 사해 남단의 소알 성읍에 이르기까지 요단강 계곡의 온 주변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4)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면서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그 땅을 네게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네가 직접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5) 이리하여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종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어 6) 모압 땅의 벧브올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나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은 지금껏 아무도 모른다. 7) 모세는 죽을 때 나이가 120세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를 위하여 슬퍼하며 30일 동안 애곡하였다. … 10) 그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한 명도 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친히 얼굴을 대면하여 사귀신 예언자였다. 11) 그가 애굽에서 바로와 그의 대신들과 그의 온 백성에게 여호와의 권능을 보여줄 때에 행한 것과 같이 놀라운 이적과 기사들을 행한 예언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12)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토록 엄청나고 두려운 일들을 행한 예언자는 그 후 한 명도 없었다.
모세에 대한 설교를 마감하면서 모세와 나 자신을 비교할 때에 무엇이라고 표현조차 못하겠다. 그러나 할 말이 있다면 ‘모세를 닮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것이다.’라는 말만은 하련다.
5.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베드로와 요한도 쓰시는 하나님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
행 3:1-10 / 어느 날 오후 베드로와 요한은 3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2)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였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하나가 실려 왔다. 그는 날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살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다. 4)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여겨보았다. 이윽고 베드로가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하자 5)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6)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8)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9)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걸어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10) 그가 바로 그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날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인 것을 알자 너무도 놀라 말을 잃었다.
사도행전 3:1-10을 만들어 낸 베드로와 요한이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어 그런 일이 기록됨으로써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례가 되고 있다. 요엘 2:28-29의 말씀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120여 명의 성도들에게 임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다.
행 2:17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의 비를 부어 준 다음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여러 가지 꿈을 꿀 것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온갖 환상을 볼 것이다. 18) 또 그날이 오면 너희의 남녀 노예들에게도 똑같이 나의 영을 부어 주고
애즈베리대학의 영적 대각성 / 지난 2월 8일에 시작해 20일(약 13일)에 공식적인 예배를 마친 미국 켄터키주 윌모어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의 영적 대각성 현상이 전 세계 부흥 운동으로 확산하는 중이다.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이었는지 기독교계를 넘어 각계각층의 관심은 물론 CNN 뉴스에서조차 이를 보도했다. 각국 각지에서는 ‘Asbury Revival’(애즈베리 대학교의 부흥)이라고 불리는 모임에 참여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천의 인파가 몰렸다. 무려 현장 참여자 중 60% 이상이 타지역 출신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애즈베리 대각성 모임은 이곳을 찾는 것을 넘어 테네시주 리 대학교, 인디애나주 앤더슨 대학교, 오하이오주 시더빌 대학교, 앨라배마주 샘포드 대학교 등 다른 기독교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번졌다. 이를 보고 크리스천 포스트(CP)는 켄터키주 안팎의 다른 지역을 향해 자발적 예배 형태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현상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애즈베리 휴즈 강당(Hughes Auditorium)에서 진행된 정기 수요 채플을 통해 일어났다. 설교자는 잭 미어크립스(Jack Meerkreebs)라는 젊은 목사였는데, 그는 로마서 12장을 본문으로 ‘행동하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고, 설교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뉘앙스로 설교를 마쳤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잭 목사의 선포에 이어 예배가 마쳐질 무렵 소수(약 20명) 학생들에게 ‘머물라’라는 음성이 강하게 들렸고, 이 학생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성에 순종하여 기도하다가 폭발적인 대규모 집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1,500석이나 되는 휴즈 강당은 물론 학내 다른 집회 장소인 에스테스 채플과 맥케나 채플까지 순식간에 채워졌다. 또 SNS와 유튜브 등 각종 미디어를 접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수많은 인파로 강당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캠퍼스 잔디밭과 인근 주변에서 자발적인 기도회를 통해 같은 영적 현상을 경험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애즈베리 대학교에 이런 영적 부흥 현상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 애즈베리 대학교는 1970년 2월, 학교 내에서 열린 기도회의 영향으로 2,000여 개의 전도팀이 조직되어 130여 곳의 대학 캠퍼스로 파송하기도 했다.
애즈베리대의 부흥 역사와 다양한 시각 / 애즈베리 대학교의 부흥 역사를 살펴보면, 1905년 2월(남학생 기숙사에서 시작된 기도 모임이 학교와 지역사회로 확산), 1908년 2월(채플 시간에 누군가의 기도로 2주간 중보기도 지속), 1921년 2월(예정된 부흥 집회의 3일 초과), 1950년 2월(한 학생의 죄 고백의 전파로 5일간 기도와 간증 지속, 학생 전도팀이 결성, 5만 명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 1958년 3월(학생들의 금식기도로 63시간 기도회 지속), 1970년 2월(채플 시간 어느 학생의 간증으로 영적 갱신, 기도, 기쁨 현상이 6일간 지속, 2,000여 명의 학생이 지역사회와 미국 내 130개 대학의 전도자로 참여), 1992년 3월(채플 시간 한 학생의 죄 고백으로 5일간 기도와 찬양 지속), 2006년 2월(4일간 학생들의 예배, 기도, 찬양 지속) 등 이번 대각성 모임을 합하면 1900년대 이후 모두 아홉 번의 부흥 운동의 경험을 이어오고 있다. 덧붙이면, 공교롭게도 이 모두가 2월과 3월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교회력으로 보면 사순절 언저리에 있거나 겹치기도 한다.
결 론 / ■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인도의 성자라 불린다. 그는 89세에 뇌일혈로 쓰러졌다. 선교회는 그를 강제로 미국으로 송환하여 입원하여 치료받게 하였다. 다시 일어났을 때 모든 사람이 인도로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지만 90세에 다시 인도로 돌아가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종지부(period)를 찍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가 쉼표(comma)를 찍지 않는다’고 하였다.
▮ 유종의 미(有終의 美)란 말이 있다. 끝을 아름답게 장식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시작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었어도 끝이 좋지 못하면 그 전체가 다 실패한 것이요 반대로 시작이 보잘 것 없고 힘들었어도 끝이 좋으면 그 전체가 모두 좋은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루라는 시작과 끝을 주셨고 또 월(月)과 한 해(年)를 주시고 일생이라는 기회를 주셔서 시작과 끝을 살게 하셨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할 때도 혹 낮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고 하셨으며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마 6:34)고 하셨다. 하루 동안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어도 그 날 일은 그 날에 마감하고 좋은 쪽으로 마무리를 해야 내일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의 후손과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성공적인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자. 내일은 오늘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람에게, 내일은 오늘을 보람있게 준비한 사람에게 밝음으로 찾아올 것이다. 영원한 천국은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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