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복 . 문영인
궁중 나인 출신의 순교자
강경복 : ?~1801, 세례명 수산나, 서소문 밖에서 참수
문영인 : 1777〜1801, 세례명 비비안나. 서소문 밖에서 참수
강경복(姜景福, 수산나)은 폐궁 나인(內人)으로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마혼 살이었다. 양민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恩彥君) 이인(李胭)의 부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사는 폐궁의 나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폐궁에는 강경복 외에도 젊은 나인 서경의와 늙은 나인 이덕빈이 있었는데, 여인들만이 사는 이 폐궁은 문자 그대로 어둡고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서소문 안에 살던 서경의의 외조모 조(趙) 노파가 찾아와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에게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를 믿으면 영혼을 구원받고 비탄과 우수를 잊을 수 있다고 권하였다. 그러므로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부터 이들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 강경복은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런 간다는 소식을 폐궁에 전해주어 주
문모 신부가 피신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그녀는 창의문 근처에서 체포 되었다.
체포소식 전하러 폐궁으로 달려간 강경복
송 마리아의 권유로 입교한 강경복은 당시 지병이 있었는데, 이는 죄를 추궁당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진술한 것이다. "저는 병이 있었는데, 폐궁 양반 부인이 천주교를 믿으면 병에 차도가 있으리라고 하여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천주교를 믿게 된 동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경복은 입교 후 폐궁 부인들과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
더욱이 그녀는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숨어 비밀리에 교리를 가르치며 미사를 드릴 때,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를 모시고 교리 강습과 미사에 참석하곤 하였다.
주문모 신부로부터 수산나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후, 강경복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게 다듬어 나갔다. 당시는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이 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천주 신앙을 택한 것은 남편도 자식도 없는 나인의 몸으로 오직 의지하고 바라는 것은 하느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가장 큰 위안이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1801년 2월 박해로 강완숙의 집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노비 구월의 안내를 받아 폐궁으로 피해 왔다. 그 무렵 강경복의 어머니는 홍어린아기년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당시 충훈부 근처에 살고 있던 홍어린아기년은 한동네에 살고 있던 강완숙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강완숙의 집에 불이 났을 때. 홍 씨의 아들 강득녕이 불을 꺼 주어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그 해 1월 강경복의 아버지 제사 때 그녀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남동생이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집에 들러 며칠을 묵고 돌아왔다.
이처럼 강경복과 홍어린아기년은 같은 신자로서도 통하는 사이였지만. 친정을 통해서도 잘 아는 사이로 자주 왕래하고 있었던 터였다.
어느 날 포교인 강득녕이 어머니 홍 씨에게 “지금 포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간다”는 정보를 전해 주었다. 이를 들은 홍 씨는 때마침 집에 와 있던 강경복에게 전해 주었고. 강경복은 급히 폐궁으로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주문모 신부
는 날이 저물 무렵 서소문 안으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한편 강경복이 폐궁으로 달려갔을 때 궁 앞에는 이미 기찰포교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 폐궁으로 들어가자. 늙은 나인 이덕빈이 깜짝 놀라며 “포졸들이 지
키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왔느냐? 위험한데 왜 왔느냐?"고 걱정하였다. 이에 강경복은 소식만 전해 주고 곧 돌아서 뒷문으로 빠져나왔는데. 결국은 창의문 근처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강경복은 포도청에서 1차 신문을 받는 자리에서 “저는 천주교가 좋기 때문에 비록 사형을 당할지라도 절대로 마음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3월 16일 국청으로 이송되어 신문 받을 때에는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답변하였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인지도 모른 채 한 말이었다. 그 후 정신을 가다듬은 강경복은 배교를 취소하고 끝까지 용감하게 형벌을 이겨내었다.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문영인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은 신궁(新宮)의 나인이었다. 중인 신분의 양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주 예뻤던 그녀는. 일곱 살 때 새 궁궐 나인으로 뽑혀 궁궐 예절을 배우며 자랐다. 열다섯 살이 되자 머리를 올렸고. 글씨를 잘 써 문서 쓰는 일을 하였다. 궁녀들은 저녁이면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며 담배를 피우거나 다과를 먹는 것이 예사였다. 문영인은 그날 밤도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헤어져 돌아가려다가, 갑자기 경련이 일어나면서 전신 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응급 치료를 다 하였으나 병이 점점 더 깊어만 가자. 궁에서는 할 수 없이 그녀를 사가(私家)로 내보내면서 병을 치료한 뒤 다시 들어오라고 하였다.
사가에 있을 때인 1797년, 문영인은 집집이 실을 팔러 다니는 노파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그 노파는 아마도 김섬아(수산나)인 듯하다. 이처럼 사가에서 천주교를 처음 접한 그녀는 교리를 더 깊이 배우기 위해 강완숙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때 강완숙은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대하였다고 한다. 또 가끔 찾아가면 "그렇게 잠깐 왔다가 가면 교리를 배워 보아야 유익하지 않다"라는 꾸지람까지 들었다고 한다. 문영인은 그 후로 찾아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강완숙이 보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그 집에 갔더니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이 좁은 골방으로 불러들여 천주교를 열심히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 뒤로 그녀는 자주 강완숙의 집에 드나들며 열심히 교리를 배웠고. 1798년에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 무렵 강완숙의 집에는 윤점혜를 중심으로 동정녀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문영인도 그 일원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년이 지나도록 낫지 않던 그녀의 병은 열심히 기도한 덕분으로 거의 완쾌되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궁에서 궁녀가 나올 때면 갑자기 경련이 일어났고,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궁녀들 사이에는 그녀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마침내 1798년 궁녀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그 후 어머니의 반대에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던 문영인은, 이듬해 어머니에게 쫓겨나 청석동에 따로 집을 마련하여 살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 청양에서 올라온 최인채 내외를 자기 집에와 살도록 하였고, 1800년 여름에는 강완숙의 요청에 따라 두 달간 정약종에게 집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한편 그녀는 회장 김승정의 어머니 김섬아와 함께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박해가 시작되려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주 신부가 다른 곳으로 피신하자 그녀도 집으로 돌아와 순교할 때를 기다리다가 체포되었다. 그녀는 포도청에서 주뢰형을 참지 못해 잠시 배교한다고 하였으나. 정신이 든뒤 곧바로 배교를 철회하고 만 번 죽어도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 후 강경복과 문영인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5월 22일(양 7월 2일) 강완숙, 최인철, 고광성, 김연이, 한신애, 이현, 홍정호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한편 문영인이 포도청에서 주뢰 형을 받을 때 그녀의 몸에서 나온 피가 꽃모양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며, 목을 벨 때 흰 피가 솟은 기적이 일어났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