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 하선옥
이십여 년 전이었나 보다. 추운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살짝 오려고 할 즈음에 아파트 화단에 벌거벗은 채 쫓겨난 염자가 눈에 밟혔다(그 때는 사실 염자인 줄 모르고 데려왔다). 위쪽 가지는 얼어서 뭉뚱그려졌고 잎은 얼어서 흐물거렸고 간신히 추스르고 있는 몸통과 뿌리는 숨이라도 쉴 수 있으려나 싶을 정도로 애처로웠다. 쪼그리고 앉아 버려진 아이를 주워 들고는 집으로 데려왔다.
신문지를 깔아놓고 뭉뚱그려진 가지와 잎을 떼어 내고 나니 아주 작은 몸통과 뿌리만 남은 아이를 집에 있는 화분에다 심고 햇빛이 잘 든 뒤 베란다에 놓아두고 "추워서 힘들었지, 힘내서 나랑 살아보자 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까, 마치 나의 다독임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몸통 주변에서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화월이는 싹을 피워내고 가지를 키우고 이십여 년을 변함없는 색으로 겨울이 오면 잎끝을 불그스레 물들이며 늙어가는 나랑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살아왔다. 몸집이 커지길래 딱 한 번 큰 화분에다 분갈이 한번 해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아름답게 꽃을 피워 올리니 더 정겹고 고마울 뿐이다.
한 달 전쯤 화분에 물을 주다 보니 염자의 이파리 끝에 뭔가 모를 뾰족함이 자디잔 몽우리 같은 걸 달고 올라오고 있었네. 반가운 마음에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육식물 돈나무(염자). 잎이 동전모양이라서 돈나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유통상의 이름으로는 화월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염자는 지금 꽃말처럼 지금 풍요로움을 듬뿍 담고 별 모양을 툭 툭 터뜨리며 아주 옅은 분홍색을 곱게 곱게 펼치고 있다. 다육식물에 대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나는 처음으로 접하는 꽃이라 기적 같았고, 흔히 볼 수 없는 꽃이라서 더 반갑고 고맙기만 하였다. 몸통은 내 손목 정도 될 만큼 커졌지만, 꽃이 피지 않는 화초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버려지면 그 아픔은 오래오래 가나 보다. 그 아픔을 밀어내고 회복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아픔이 승화되어 잊음의 시간을 갖게 돼야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나올 수 있나 보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내게 온 ‘화월(염좌)’이는 인제야 춥고 힘들고 버려졌든 그 아픈 세월을 잊었나 보다. 그래서 고운 흔적을 곱디고운 여린 분홍으로 거둬 키운 내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풍요와 행운을 선물하려나 보다. 오랜 상처를 치유하고 밝고 맑은 꽃향기를 전해주는 화월이가 내 곁에 있는 지금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2024 년 2월 20일
◎염자의 학명은 Crassula ovata 이고 돌나물과에 속해 있으며 유통명은 ‘화월’이라고 불립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염자[艶姿] (국가농업기술포털 “농사로”)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화월이, 염자, 돈나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이 무식한놈을 어쩌면 좋을까요?
화월이라고 하여 옛날 무슨 기생의 이름을 차용한줄 알았습니다.
이십여성상을 함께 하고 금이야 옥이야 사랑을 주었으니 얼마나 특별한 관계일까요?
그도 감탄하여 보답코저 활짝 웃음을 펼쳐 보이는게지요.
말 못하는 식물이라고는 하지만 표현 방법까지 모를리가요.
남은 생 끝까지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귀한 작품 감사합니다.
자주 맛보고 싶습니다. 선생님.